삶의 길목에서



팔불출 엄마의 재산목록


고진하『참여사회』 편집위원 gojinayo@hanmail.net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큰애에게 또래보다 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사소하지만,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이가 말없이 자율학습을 빼먹은 사실을 담임선생님을 통해 듣게 되거나 동생을 거칠게 대하는 것을 볼 때 당혹스러웠다. ‘이제부터 진짜 부모노릇이 시작되는구나’ 싶어 긴장도 되었다. 달라진 관계를 실감하고 앞으로 더 달라질 관계를 예감하면서 지난 여름 전문상담기관에서 실시하는 부모역할훈련에 참가했다. 적절하게 칭찬하는 법을 연습하는 시간에 자신이 칭찬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는 순서가 있었다.

재작년 성탄절 아침 큰애는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해서 다음에 태어나서도 좋은 엄마 만나야지” 하고 말했다. 큰일을 해서 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엄마를 만나겠다는 소원이 약간 우습게도 느껴졌지만 코끝 시큰, 가슴 뭉클. 과장을 좀 하면 어느 성인의 유언처럼 이제 다 이룬 것 같은 만족감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하고 저절로 다짐이 되었다.

작년에 아이의 교실에서 아이가 장래 희망을 ‘엄마’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꿈이 너무 소박한 것 같아서 살짝 실망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감추고 ‘엄마는 장래희망으로까지 삼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내 꿈은 보통 엄마가 아니라 엄마 같은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부끄러운 한편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런 엄마가 되면 어떤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겠어?” 하는 말에는 거의 감격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아홉 살 먹은 둘째는 한 듯 안 한 듯 쿨하게 칭찬하는 재주가 있다. 언젠가 녀석이 “엄마, 우리는 다음에 태어나도 엄마와 딸로 태어나자”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우리는 누구보다 익숙해졌잖아?” 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이 녀석은 자기는 ‘화려한 장래 희망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결혼을 빨리 해야겠다’고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점입가경, 빨리 아기를 낳아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조숙한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니 ‘쿵!’ 하고 뭐가 떨어지는 느낌이 가슴 쪽에서 전해져왔지만 내색 않고 다시 이유를 물었다.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알아봐야겠어요.” 그 발랄한 대답에 나는 또 한 번 넘어갈 뻔했다. 

부모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부자 엄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넉넉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아이들이 내게 준 순수한 마음의 조각들이 나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하는 지인은 관계의 저금통에 저금을 많이 해두어 든든하겠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부모인들 통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 정도의 밑천이 없을까. 출금 내역만 기억하고 입금 내역은 잊어버리고 사는 것일 게다. 잘 간직했다가 어려울 때 찾아 써야겠다.


2008/09/01 21:49 2008/09/0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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