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은 시대적 도전의 특성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대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반세기 이상 지속된 대결과 반목의 남북관계를 마감하고,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민족사의 새로운 길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대전환의 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고 희망을 키워가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비전과 각오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분단의 원인이었던 냉전이 끝나고 세계가 급격하게 변화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이제 새로운 세계화ㆍ정보화의 물결은 동북아에까지 밀려들어 각 국가와 민족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며,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이 같은 세계화의 도전은 우리에게 이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면서 갈라진 남과 북이 사이좋게 발전을 도모하는 새로운 안목을 요구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반세기가 넘는 분단시대를 남과 북은 서로 너무나 반목하고 살아왔다.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땅 이북이 아니던가? 교통·정보·통신의 발달로 날로 좁아지는 세계 속에서 휴전선 너머의 부모형제와 서로 생사를 모른 채 전화통화는 말할 것 없고 서신 한 장 교환 못하면서 반세기를 지내온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더 이상 시대는 이 같은 야만을 용납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통일지향적 민족안보 필요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의 감격과 흥분이 가시기 시작하는 요즈음 남북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권과 언론의 소모적 논쟁과 국회파행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예상되는 동북아 질서의 개편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국익 확보를 위해 발빠르게 한반도와 주변 대상국에 대한 외교적 행보에 나서고 있는 주변 4강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입으로는 화해와 협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낡은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행태가 가장 큰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북한이 진정으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면서,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대응논리가 될 수 없는 냉전·분단·개발독재체제의 논리와 행동방식에서 자신들의 생각과 시각이 어느 정도 멀어져 있는지는 자문하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통일은 과거로의 원상회복이나 현재의 남과 북의 기계적 봉합이 될 수 없으며, 더 나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상호변화와 창조적 수렴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변화는 자신의 잣대로 어느 일방에게만 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주적 개념을 둘러싼 논란이나 국가보안법 개폐, 한미관계 논의 등에서 여전히 안보를 통일 노력과 대치되는 것인 양 호도하고 있는 일부 언론의 은근한 부추김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하고 만일의 군사대결에 대비해서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보개념 역시 통일지향적 민족안보라는 개념으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할 때이다.

오늘날의 안보개념은 군사력을 통한 억제보다는 상호신뢰구축을 통한 공동안보로 변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포괄적 안보, 인간안보 개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남과 북의 화해·협력 노력이 안보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복리와 번영을 위한 포괄적 안보로 발전할 수 있음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반도에는 양측 합쳐 160만명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고, 이러한 대결 태세를 유지하는 비용도 엄청나다. 연간 200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비 외에도 정치, 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체제 유지와 경쟁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통일비용보다 분단 비용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적대적인 북한의 존재는 우리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점차로 경제적 담이 허물어져 가는 개방경제 현실 속에서 남북간의 긴장이나 위기는 우리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관계의 개선이야말로 중·장기적으로 가장 좋은 경제정책일 수 있다. 남북한 경제의 상호 보완성, 지리적 인접, 대륙진출의 물류 비용 등을 감안하면 남북의 협력이 우리경제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할 것이다.

6.15선언 흔들림 없이 이행돼야

이런 점에서 과거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해결의 주도권을 명실상부하게 우리 민족이 쥐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 이후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에서 강대국의 권력정치에 희생당해 왔으나, 21세기의 한반도는 더 이상 강대국 권력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적 상수로서, 곧 경제적으로는 동북아 경제권의 정보 및 물류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정치ㆍ군사적으로는 세력균형의 요충지로서의 민족적 비전과 위상을 확립하고 온 민족이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감안해볼 때, 양 당국간의 노력과 함께 시민사회에서 전개되는 통일운동세력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책임 역시 크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롭게 전개되는 남북관계 역시 그간 군사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어 온 민간차원의 자주적 통일논의, 고난을 무릅쓴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씨, 문규현 신부 등의 자주적 접촉과 교류를 위한 선도적 행동, 종교계, 여성계, 문화·학술계 등의 교류사업의 성과에 힘입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의 선각적 노력들이 높고 견고하게만 보이던 분단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 왔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진전과 시대의 변화는 통일에 대한 당위적 요구와 원칙적 주장을 넘어 우리 사회의 주민들 속에, 그리고 제도와 풍토 속에 통일의 기반을 확대하고 착실한 통일실천의 모범을 세워 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문제를 정파적 이해에 종속시키려는 편협한 정치세력이나 특정 사회세력, 그리고 부당한 간섭과 개입으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고자 하는 외세의 기도를 견제하고, 화해와 협력의 흐름을 동요 없이 전진시켜 나갈 커다란 민간운동의 흐름이 필요하다.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야기되는 정치사회적 혼선과 마찰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그간의 체제교육과 선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중적 사고와 헛갈린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중의 시각과 감각을 통일지향적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것도 대중에게 신뢰를 주는 민간통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간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사람과 조직들부터 6·15선언을 흔들림 없이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폭넓은 단결과 참여를 가능케 하기 위해 자신들의 실천을 조정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쪼록 금년 21세기의 첫 광복절은 흩어져 비난하는 분단의 역사가 아니라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찬란한 민족의 미래를 꿈꾸는 감격의 장이 남과 북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황인성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2000/08/01 00:00 2000/08/01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3383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