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 집단학살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피난시켜주겠다고 모아놓고 전투기로 기총 소사를 가해 200여 명의 피난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미군의 공식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노근리 학살 사실이 드러난 뒤 온 나라 여기저기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주장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학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곳만도 13군데나 된다.

한국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던 전쟁이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6·25 전쟁 중 쌍방의 약 1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360만 명이 다쳤다. 문제는 이 500여 만 명의 사상자가 모두 전투행위의 피해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노근리 주민들이 여러 차례 미국에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번번이 무시해버렸다. 국내법으로는 책임자 처벌과 피해보상이 불가능하다 하여 우리 정부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에 제정된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을 적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전쟁당사국들은 군 병력과 민간인, 군사시설과 민간물자를 구분해야 하며 군사목표물에 대해서만 작전을 행해야 한다. 따라서 민간인인 피난민을 집단학살한 것은 명백히 미군의 전쟁 범죄다. 당연히 그 진상을 밝혀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 더구나 미국은 제네바협약 초기 가입국이며, 베트남전쟁 당시 미라이 민간인 학살사건의 주범인 미군 대위가 미국 군사법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선례도 있다. 또 전쟁이나 인도주의에 관한 범죄, 집단학살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대원칙이기도 하다.

비밀해제 안된 전쟁자료 볼 수 있어야

노근리 학살은 거듭되는 패전에 따른 미군의 중압감, 피난민으로 위장하는 북한군의 게릴라전술에 대한 공포, 피난민이 작전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비극이다. 노근리 학살문제 처리는 노근리 주민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며 우리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정부는 미국이 베트남전 전범을 처벌할 때에도 국제사회의 강한 압력이 주효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적극적으로 미국을 상대로 협의에 나서야 한다. 다행히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정부가 대책반을 만들어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미국도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미국은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를 통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고위전문가그룹을 구성해 우리나라에 파견할 예정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조사방법에 있어서는 우리나라가 공동조사단 구성을 희망했으나 미국이 거절해서 따로따로 조사하기로 했다. 스탠리 로스 미국 차관보가 우리나라에 와서 협의한 결과 공동조사기구 대신 한미공동협의체를 만들어 조사활동을 협의조정하기로 했다. 전세계에서 전쟁을 하는 미국으로서는 선례를 만들 경우 발목잡힐 가능성을 우려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실이 밝혀져도 책임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각자 조사한 결과가 엇갈릴 경우 권위있게 조정할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또한 문제이다.

비록 공동조사단 구성은 무산됐지만 한미간의 공조가 전쟁의 비극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전쟁자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사실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과 배상 보상 또는 아무 것도 아닌 불가피한 행위로 결론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피해자 증언 청취 정도만 가능한 상태다. 미군 단독으로 이뤄진 작전에 대해 작전문서, 참전장병 등에 대한 조사 등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유족 등 피해자와 민간전문가들을 다수 참여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강력한 진상규명 의지다. 한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들어 소극적으로 이 문제를 대처하면 안될 것이다. 국제협약을 넘어 무고한 인명을 해친 인권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한미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것이며, 의혹을 제대로 풀 수 있다면 오히려 굳건한 동맹관계를 다시 한번 과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일단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조사활동을 하되, 조사과정에서 미국측의 자료 증인 등을 계속 요구하고 그것이 원만하게 안될 경우 합동조사기구 구성을 다시 요구해야 할 것이다. 국제분쟁의 경우 양쪽 당사자와 제3국(스위스 스웨덴 등) 대표를 포함시켜 객관성 있는 조사를 하는 게 국제관례임도 알아야 한다.

미국에 떳떳하게 진상규명 요구해야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에 그치지 말고 다른 지역의 양민학살 의혹에 대해서도 반드시 진위 여부를 밝히고, 진상을 밝혀내고, 피해에 대한 배상은 물론 필요하면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주한미군의 범죄를 막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만 불리하게 되어 있는 현행 한미행정협정을 평등하게 고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매주 금요일 낮 12시 전쟁기념관이 있는 서울 용산 미군기지 5번 게이트에 한번 가보시라. 7년째 금요일마다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군범죄를 뿌리뽑을 것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다. 이는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의 금요집회로 통한다. 운동본부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피와 분노로 얼룩진 단체다. 1992년 10월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당시 스물여섯 살 난 윤금이라는 여성이 미군 마클 이병에게 살해되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죽은 윤금이 씨 살해사건 1년 뒤에 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뒤에도 7명의 여성이 미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한국인 세 모녀가 미군 물품을 빼돌려 판다는 누명을 쓰고 손이 묶인 채 미군 헌병에게 뭇매를 맞는 사건이 발단되어 94년 12월 28일부터 시작된 금요집회가 아직도 열리고 있다. 93년 이전에는 해마다 1,700∼1,800건에 이르던 미군범죄가 운동본부가 출범한 뒤 한 해 1,000여 건 정도로 줄었다. 만일 금요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 숫자는 더 줄어들 것이다.

주한미군의 범죄는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디딘 1945년 이후 50년간 끊임없이 발생했다. 96년 10월 운동본부가 펴낸 주한미군범죄백서에 따르면 45년 이후 발생한 미군 범죄는 무려 10만 건이 넘는다. 93년 이후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 평균 1.8건이 발생했다. 미군범죄가 심각한 것은 미군범죄자들이 적법한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범죄가 계속 양산된다는 사실이다. 93년 이후 96년 6월까지 일어난 미군범죄 가운데 우리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2%에 불과하다. 이것은 모두 한미행정협정이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는 모두 미군과 행정협정을 맺고 있는데 우리나라와 맺은 행정협정만이 유독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날 월남전쟁에 파병했던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한 월남민들의 학살이 없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동티모르에 파견된 우리 군인들에 의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는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아닌 경찰과 우익단체 손에 양민들이 대거 학살당했다는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사건 등의 진상도 사실 그대로 밝혀내야 우리 정부가 미국에게 떳떳하게 진상규명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 동안 역사 속에 버려져 있다가 이제 와서 진실을 드러내는 비극들이 다시는 이 땅에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 속의 숨은 그림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손혁재 정치학박사 참여연대 협동처장
1999/11/01 00:00 1999/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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