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자도 남은 자도 모두 치욕스러웠다
1999/1999년 11월 :
1999/11/01 00:00
한 은행원이 겪은 IMF2년
평상시 2년이면 지난 기억이 가물가물해질만한 기간이지만 치욕적인 IMF 협조융자체제가 시작되던 2년 전과 숨막히던 그 후의 기억들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밀레니엄에 대해 말하고들 있지만 그 사건은 지난 천년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10대 사건에 충분히 꼽힐만한 일이 아닐까. 불과 수개월 전 OECD에 가입했다며 으쓱해하고, 1달러에 770원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가히 환상적인 환율로 제주도 여행보다 비용이 싸다며 동남아로, 유럽으로 너도나도 여행을 다녀오던 그 시절, 혜성이라도 충돌한 듯 갑작스럽고 믿기지도 않게 IMF체제는 시작됐다.
그 무렵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삼성이 계열금융회사를 통해 재계순위 7위의 기아에 대한 여신을 급격히 회수해 부실화시켜 인수하려 했으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금융권이 전반적으로 부실화되고 대외신인도가 추락하고 외환채무의 연장이 거절되면서 외환 유출과 환율의 앙등이 위기를 불렀다거나 소로스 등 국제헤지펀드의 공략으로 태국 바트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폭락하고 현지의 경제환경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단기로 조달한 외자로 해당국에 무분별한 장기투자를 해오던 한국계 현지금융기관들이 거액의 투자손실을 입고 원리금을 회수하지 못한 채 자금상환 압박을 받은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는 분석들이 분분했었다. 막대한 부채규모는 아랑곳없이 세계경영의 기치 아래 20세기의 징기스칸을 자임하며 세계를 누비던 김우중 회장이나, 대우가 세련되지 못한 노사관계 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프랑스의 국영기업인 톰슨을 인수하려던 게 IMF의 총재를 배출한 그 나라의 자존심을 결정적으로 건드렸다는 이야기, 미국의 유명기업이 인수하려던 동구의 국영 자동차 회사를 먼저 인수하는 바람에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거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의 ‘음모’가 개입했다는 갖가지 분석이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두 번 세 번 고통겪은 퇴출은행원들
사태 초기에는 그저 은행객장에 게시되는 환율이 참 놀라운 속도로 올라가는구나 하는 정도 외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외환보유고 고갈상황이 카운트다운 되는 초읽기상황에 들어가서야 어렴풋이 그 사태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해서 인식이 미쳤고 극심한 위기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석유 한 방울 안나는 척박한 이 땅에서 비축된 원유는 떨어져가는데 수입해 올 외환도 없고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다면, 이제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는데 난방은 어쩔 것이며 화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추어 단전된다면 저 높은 아파트를 어찌 걸어서 오르내릴 것이며 또한 상수도가 끊겨 집집마다 넘쳐나는 악취는 또 어찌할 것인지, 아니 그런 건 오히려 사소한 문제일지 모른다. 25% 남짓한 식량 자급율에 식량수입이 끊기면… 오만가지 걱정에 지옥이 바로 대문밖에 이사해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걱정은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공통으로 느끼는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IMF체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윤곽을 드러냈다. 은행에 근무하는 우리들에게는 그 진행과정이 피부로 느껴졌다. IMF의 통제에 따라 고환율· 고금리 정책이 시작되면서 부채가 많은 기업들의 부도가 속출했다. 따라서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파산으로 이미 많은 돈을 떼이고 있던 금융기관들의 피해금액도 더욱 늘어났다. 그 와중에 1차로 부실종금사에 대한 대대적인 퇴출이 단행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만해도 ‘방만하고 부실한 경영에 대한 단죄이려니’, ‘그간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받으며 부러움을 사더니…’ 하는 정도에만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BIS(국제결제은행)기준에 따른 ‘위험자산에 대한 자기자본비율’을 기준으로 한 부실은행에 대한 퇴출 방침이 발표되었다. 은행들마다 대출금 회수, 증자, 인원감축을 통한 경비절감 등 살아 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시작됐다. 이제 경제위기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가장 안정된 직장의 하나라던 은행원들이 받은 충격은 그 때문인지 더욱 컸다. BIS 비율을 안전한 수준까지 올려놓아야 하는 많은 은행들 앞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 놓여있었다. 부실한 5개 은행이 P&A(자산부채 이전)방식으로 퇴출되었다. 몇몇 은행들은 대형화의 명분 아래 피합병되며 간판을 내렸다. 바야흐로 많은 동료들이 대책 없이 거리로 내몰려 신사복 차림에 소주병을 들고 관악산으로 북한산으로 때아닌 등산에 나서는 서글픈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유년시절 우표수집에 몰두했을 때, 실수로 살짝 잘못 인쇄된 우표가 희소성 때문에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혹시 은행 뱃지(행표) 수집가가 있다면 1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반짝 존재하다 퇴출·합병된 은행의 그것도 높은 가격은 쳐 줄까…
자기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알 수 없었기에 누가 내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던 시기가 계속되었다. 운 좋게 직장에 남게 되더라도 정말로 열심히 일하던 좋은 동료들, 선후배들이 은행을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하는 심정은 참담했다. 그렇게 떠난 동료들 중 파이낸스사로, 증권회사 계약직으로라도 전직한 사람들은 비록 자존심은 상처받았지만 비교적 상황이 나은 경우였다. 그나마 파이낸스 쪽 사람들은 요즈음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야기된 부실 파이낸스 사태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어 건실한 회사들도 도매금으로 타격을 입고 있다. 증권사쪽으로 전직한 사람들도 최근의 대우그룹 사태로 자금시장이 냉각되어 성과급 산정의 기초가 되는 수익증권(MMF)유치 및 기업어음(CP)중개의 기회가 크게 위축되어 또 한번 마음 고생들을 하며 어깨가 처져 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실력
이웃 일본에서는 대형은행끼리의 합병으로 세계최대의 은행이 탄생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그들과의 경쟁이 우리의 생존을 가늠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대우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되느냐로 금융권의 우열이 가려지고, 또 한차례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도대체 그 많은 엘리트 경제학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기에 국민들과 직장인들이 이렇게 속수무책 혼란스런 상황이 되도록 진지한 경고 한 번 없었단 말인가. IMF사태는 성수대교 붕괴, 삼풍아파트 참사, 대구지하철 가스사고, 서해 여객선 침몰, 비행기 추락사고 등 문민정부 통치시기에 일어난 대형사고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임기응변과 융통성이라는 단어만을 미덕으로 여기며 원칙을 방기해온 우리 사회의 부실한 구조가 그런 파국을 불러온 게 아닐까.
은행원으로서 오늘날의 금융·경제 위기의 원인중 한가지를 되짚어 보자면, 가장 간단하면서도 기본이랄 수 있는 자금운용의 미스매치(mis match-단기자금을 빌어 장기자금으로 빌려주는 것)에 따른 위험에 철저히 무방비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어찌 보면 그리도 간단한 개념을 자각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과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금융산업이 그러한 위험에 제대로 대응해 나가며 외국의 금융기관과 당당히 경쟁하기에는 아직 기본기가 많이 뒤떨어진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는 그만큼 직업의식이 투철했던 금융인이 아니었을까. 서구는 수 백년 동안 그런 금융거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의 금융현실은 어땠는가? 오죽하면 은행돈 못 빌리면 능력 없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무용지물이 되는 여신의 원칙과 기준이 ‘펀다멘틀(Fundamental)이 튼튼하다’던 우리 금융업계와 경제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이제 외국계 은행이 급격히 몰려오고 있다. 우리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 앞선 철학과 금융 기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벌써 몇몇 은행들은 발빠르게 세계기준에 맞추어 투명하고 경쟁력 있는 경영을 하겠다고 선포하고 그 실행에 착수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2년 전에 시작되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IMF사태와 같은 치욕,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뽑히는 그런 비극을 다시 맞지 않으려면, 금융을 포함해 우리나라의 사회 각 분야가 국제 기준에 손색없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할텐데 과연 지금 그런 변화와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어디에서도 속시원한 대답은 들려오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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