댐건설로 마을은 잠기지만 생존권을 위해 끝까지
1999/1999년 11월 :
1999/11/01 00:00
태국현지보고│박문댐 매문만옌 마을을 가다
방콕을 떠난 지 12시간, 새벽 네 시경 박문댐이 있는 우본 라차다니 지방에 들어섰다. 아침 노을 아래 초록의 숲이 조금씩 드러나고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화롭게 흐르는 강의 허리를 잘라놓은 시멘트 댐이 보였다. 댐 위로 난 길을 건너자 목적지인 매문만옌(Mae Moon Man Yuen)-‘문강(Moon River)의 장수’를 뜻함-마을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5시를 지나자 아침 노을이 엷어지며 밥 짓는 연기와 함께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매문만옌 마을은 태국의 여느 마을과는 다른 곳이었다. 문강에 댐을 건설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5,000여 명의 농민들이 올해 3월 23일부터 정부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며 추가로 댐을 건설하거나 증축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저항의 마을인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댐 건설을 반대하던 농민들은 싸움 끝에 정부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약속받았으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간헐적으로 싸워나가다가 올해 8개 지역에서 댐 건설 등 국가개발계획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함께 모여 전력공사의 땅을 ‘무단점거’하고 이 마을을 세웠다.
마을 가운데 넓은 공터 옆에 사무실과 방문객을 위한 집이 있고 광장 연단에는 대형 스피커가 마을주민들에게 공지사항도 알리고 대학문화패가 방문하면 전통음악 연주와 연극공연도 펼쳐지곤 한다. 성능 좋은 앰프 덕분에 마을에 머무는 동안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울리는 요란한 음악에 잠을 깨곤 했다. 눈을 비비고 나가보면 주민들이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하느라 분주했다. 어린시절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집집마다 한사람씩 부역 나가 마을청소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새마을운동과 다른 점일 것이다. 우리네 농촌에서 그랬듯 울력을 하는 것이 무척 정겹게 느껴졌다.
아침을 먹고 나면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회의장으로 마을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자리를 가득 메웠다. 각 집단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의 회의였으나 누구든지 참석하고 발언할 수 있었다. 이날의 안건은 물 사용, 공동논에서 경작하는 유기벼농사, 젖소 구입, 병원 운영 등에 대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젊은 활동가부터 노인까지 100여 명이 참석하여 자유스럽게 발언하고 웃는 모습에서 땅을 딛고선 참여민주주의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대표자는 인구수에 비례해서 뽑으며 각 집단간에 문제가 생기면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해결한다고 했다.
점심식사 후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올린 야트막한 전통 태국 가옥들을 보며 마을이 임시 농성장이라기 보다는 영구적인 마을 같다는 얘기를 필리핀에서 온 참석자와 나누고 있는데 이 마을의 지도자인 통차론 씨와 몇몇 마을 대표들이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다.
“댐이 건설되기 이전에 이곳은 정말 풍요로웠어요. 물고기도 많이 잡히고 농사도 짓구요. 그러나 댐이 건설되자 물고기 씨가 마르고 땅은 척박해져서 예전 같은 수확량을 올릴 수가 없어요.”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곳 강에서 잡힌 어른 키만한 물고기사진을 보여주었다. 강에 그렇게 큰 물고기가 산다는 것을 몰랐던 나에게 그 사진은 이름 그대로 달빛이 비치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풍성한 문강의 이미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야기는 계속 다른 지역의 댐건설문제, 정부의 단종식수 계획으로 파괴되는 숲, 국경지역에 건설되는 대형상업센터 때문에 쫓겨난 재래상인에 관해 이어졌다. 정부 보상이 없었냐는 질문에 주민 캄푸이 씨는 지난 3년간 고기잡이를 못해 잃은 손해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말했다. 보상이 충분치 않다는 얘기는 다음날 방문한 인근 마을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땅이 물에 잠기게 되자 정부는 다른 곳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보니 돌투성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 근처로 돌아왔지만 생계를 꾸릴 수가 없어 한 달의 반은 방콕에 가서 쓰레기 하치장을 뒤져서 삽니다”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주민들의 투쟁을 설명하던 통차론 씨는 결국 이 대목에서 눈물을 글썽였고 같이 갔던 일본 대학생 마이코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재정적인 보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연과 하나되어 살던 우리의 터전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의 말이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들을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마을 광장에는 89년 싸우다 사망한 마을사람의 동상의 서 있는데 매일 아침 마을을 돌며 시주를 받던 스님들이 여기서 시주를 받고 불공을 드렸다. 태국은 국민의 80%이상이 불교신자라 어디서나 마을과 함께 절이 반드시 들어선다. 이곳 마을에도 17명의 스님들이 투쟁에 참여하여 절을 짓고 사람들과 함께 유기농과 전통의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마을 내에 학교도 있고, 전통마사지와 허브 사우나, 여러 가지 전통의술로 사람들을 돌보는 병원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창한 빌딩이 아니라 야자나무 잎과 대나무로 지은 건물에서 소박하게 주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외부의 양약에 의존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의술이 있으니까요.”
후아이 라하 댐지역에서 온 페치 칸찬타 씨는 말했다.
자립 자족하는 공동체 건설 이야기는 이튿날 저녁에 만난 프라피체 스님에게 좀더 들을 수 있었다. 프라치체 스님은 ‘가난한 자들의 포럼(Forum of the Poor)’이라고 IMF 이후 우리 사회운동에도 잘 알려진 연합조직의 지도자중 한 분이다.
“가난한 자들의 포럼은 지역별, 부문별 네트워크 조직이에요. 민중의 힘을 모아 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고 궁극적으로 기업 편에서 농촌을 파괴하는 정부의 개발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우리의 기본 철학 중 하나는 다양함 속의 결합이에요. 이곳 마을에는 다양한 집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는데 함께 연대해서 싸워나가죠.”
스님은 자립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거주하는 가족들은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고 투쟁에 참여할 때는 공동으로 투쟁기금을 내며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할 때는 캠페인을 조직한다고 했다. 또 공동농장경영과 채소경작, 약초재배 등을 소개하면서 “원주민의 지혜를 보존, 개발하고 이를 사회봉사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이것이 정부가 추진해온 개발의 피해를 극복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에 우리는 우리의 마을을 세워나가고 있는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다시 방콕에 돌아와 회색빌딩 사이로 아스팔트를 맨발로 걸으며 행상 하는 아줌마의 발을 보았을 때 똑같이 신발이 없건만 매문만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발은 흙과 함께 웃고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눈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30년간 산업화를 추진해온 우리의 발전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되씹어 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