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내고 뛰면서 구정물 먹어봤수?
1999/1999년 11월 :
1999/11/01 00:00
중앙일보 하프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의 이유있는 항변
물이 부족해 구정물까지 마셔야 하는 마라톤대회를 본 적이 있는가. 지난 9월 12일 중앙일보 서울하프마라톤대회에 참여했던 '순수'마라토너들이 중앙일보 측의 어설픈 준비와 무성의한 태도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나섰다.
“마라톤을 시작한 지 2년째. 경주마라톤, 춘천마라톤 다 참가해 봤지만 이렇게 엉망이고 개판인 마라톤대회는 처음이다. 참가비 3만 원 내고 쓰레기통 뒤져 물먹는 마라톤대회가 어디 있나…(kamizang)”
“어느 지점에선가 식수차가 뿌려주는 물은 도랑물인지 냄새가…. 기록으로 보아 중간 이상인 것 같은데 내 뒤에 뛴 분들은 그 똥물도 없었으리라 생각하니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언론을 빙자해 치졸하게 장사해 먹지 말고 정신 좀 차려라.(K8383)”
원성이 대단하다. 중앙일보사가 야심차게(?) 준비해왔던 서울하프마라톤대회(이하 중앙하프마라톤대회)가 어느 정도 형편없었길래 이렇게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헌데 박윤배 씨(43)는 오히려 대회 당일 참가자들이 느꼈던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전한다. 노사관계 전문연구기관인 (사)‘창조와 모색’ 소장인 박씨의 중앙하프마라톤대회 참가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지난 9월 12일.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중앙하프마라톤대회에 늦지 않기 위해 박씨는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왜 신문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마라톤대회를 주최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박씨는 어쨌든 마라톤대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웠던 탓에 벌써부터 기대가 컸던 것이다.
서둘렀던 탓인지 출발지인 잠실종합운동장에 도착한 것은 7시를 갓 넘긴 시각. 약간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였음에도 이미 운동장은 마라톤대회의 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마라톤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소지품과 옷가지들을 맡기기 위해 모여 있는 물품보관소가 진원지였다. 들어보니 옷을 갈아입을 장소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데다 단순히 옷가지들을 맡기기 위해 벌써 30여 분째 기다리고 있다는 불만들이었다. 다행히 간편한 옷차림이어서 탈의실을 찾는 고생은 덜했지만 박씨는 속으로 혀를 찼다. 준비가 이래서야,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옷을 맡기는데만 1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
어쨌든 주최측이 밝히는 대로라면 13,000여 명이 참여한 마라톤대회는 시작되었다. 잠실운동장을 출발, 잠실 주변지역 21㎞에 달하는 거리였다. 1만 명 이상이 함께 달리는 모습은 그대로 장관이었다. 30여 분을 달렸다. 5㎞지점에 도착한 박씨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을 찾았으나 앞서 달린 이들이 마신 흔적만 있을 뿐 남아 있질 않았다. 화가 났으나 계속 달릴 수밖에. 그 다음 지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씨는 반환지점이 가까운 10㎞ 지점에서도 역시 물을 마시지 못했다.
“1시간 넘게 달렸는데 목이 타는 것은 당연하죠. 도대체 이럴 수 있는가, 기가 막히더군요.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온몸의 기관을 총동원하는 마라톤대회에 물이 없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나요? 갈증에다 화까지 치밀어 오르니 말 그대로 극한 상황이 따로 없더군요.”
지하도를 가로지르는 마라톤대회?
그러면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후에 주최측 사무국이 해명한 바에 따르면 물을 준비하긴 했는데 이런 식이었단다. 생수 1병을 컵에 따르면 4잔, 따라서 4명이 마실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단다. 그러니 준비한 대로라면 앞서 뛴 사람이 병째 가져갔다면 뒤따르던 3명은 구경도 할 수 없었던 게 당연한 일. 결국 마라톤대회에 참여한 이 가운데 75%는 물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라톤 경로 어디에도 지하도를 거친다는 말은 없었는데 난데없이 지하도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가로막아 불가피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마라톤대회를 준비하면서 제대로 안내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한쪽에서는 주민들이 교통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들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고, 말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같은 일반 참가자들은 지하도로 뛸 수밖에 없었죠.”후에 알았지만 그날은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영어능력 평가시험인 TEPS시험일이기도 했다. 통신에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시험을 보지 못한 이가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한 글도 올라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잠실운동장에 마침내 도착했다. 한데 점입가경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골인지점에서도 역시 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참가자 모두에게 제공한다던 바나나, 초코파이, 음료도 없었다. 마라토너들의 엄청난 열량 소모를 감안해 당연히 준비했어야 했고, 광고에서도 분명히 보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탈진한 이들이 잔디를 밟는다고 안내요원들이 여기저기서 호통을 치고 있었다. 완주를 했다는 기쁨은커녕 농락당했다는 비참함까지 밀려왔다.
네티즌 민주주의, 집단소송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박씨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신이 당한 기막힌 경험을 주최측에 정확히 밝혀야했다. 이미 몇 건이 올라와 있었다. 모두 주최측의 준비부족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도 의견을 올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항의들이 봇물 터지듯 통신에 오르기 시작했다. 주로 물부족으로 인한 고통, 엉성한 준비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구정물을 얻어마셨다는 이, 식수차가 주는 냄새나는 물을 마셨다는 이, 심지어 쓰러진 병 옆에 있던 수건을 짜 마셨다는 이, 물 한모금을 얻어 마시려다 눈총만 받고 물러서야 했다는 이…. 서러운 사연은 가지가지였다.
열흘도 채 되지 않아 300여 건의 의견이 오르고(누군가 고의적으로 폐쇄했는지 통신 사이트가 열리지 않아 집계가 어려웠음), 조회수는 5만 건을 넘었다. 하지만 중앙일보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대회 다음날 ‘세계적 시민축제로 거듭났다’는 등 무려 7개에 달하는 기사로 자화자찬을 한데 비해 참가자들의 항의에는 5일이 지나서야 통신사이트에 사과문 하나를 올린 것이 전부였다.
통신의 힘은 놀라웠다. 패러디와 독설로 유명한 ‘딴지맨’들이 가세하면서 사건의 본질이 약간 변했지만 개개인의 항의성 발언이 주조를 이루던 초기에 비해 중앙일보측의 무성의를 접하면서 집단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어갔다. 박씨가 이때 집단소송을 제안했다. 우습게 표현하면 바나나 안 준다고 어른들이 소송까지 하느냐는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작지만 정당하게 요구할 권리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공정한 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스포츠대회가 아니던가.
“수많은 이가 논리정연하게 항의해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한 주최측에 화가 나 사과를 요구하는 적극적 의지 표현으로 법적인 제재방안을 찾아본 겁니다. 사실확인을 한 변호사에게서 주최측에 ‘과실로 인한 배상책임 및 환급의무’가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를 알리자 10여 명이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보여왔습니다. 곧 정식 집단소송을 제기할 계획입니다. 이들 모두 첫 대회라는 점에서 미숙한 점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문제는 실수와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는 자세죠.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일을 중앙일보가 자초한 것입니다.”
박씨는 이 일을 겪으면서 또다른 중요한 사실을 깨우쳤다. 통신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가 유통될 수 있다는 것, 소위 ‘네티즌 민주주의’의 힘, 민주주의의 형식이 주는 변화를 실감한 것이다. 박씨는 소송 결과가 나오면 이 또한 인터넷에 공개해 대중적으로 공유할 생각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