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개발, 과연 환영할 만한가?
1999/1999년 11월 :
1999/11/01 00:00
난 1월에 다녀 온 금강산은 지금 얼마나 찬란한 가을을 선사하고 있을까? 민족의 염원, 남과 북에 통일의 물꼬가 뚫려 과분하게 내게도 기회가 왔다. 산을 모르는데 너무 추워 겨울산의 풍광을 과연 감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산악의 흰 등뼈와 얼어 침묵하는 폭포의 골격이 한데 어우러진 금강산은 왜 개골(皆骨)이라는 이름을 얻었는가를 실감케하는 장엄 그 자체가 아닌가!
금강산 초입에서 보는 창전리, 온정리의 얕은 산야는 어디에도 개발의 흔적이 없고 어쩌면 능선이 그리도 곱던지. 지리산의 바리캉으로 민 것같은 자국도 없었으며 흔한 가든도 모텔도 없었다. 옛날의 산야를 보는 듯한 감회에 빠져 있을 때 분승한 현대상선 버스에서 가이드가 설명한다. 저기는 호텔부지, 이쪽은 골프장, 저기는 공연장들. 중단된 공사현장이 보기 싫게 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죽은 나무둥치처럼 서있던 북한의 군인들! 그들의 눈동자는 절망을 지나 차라리 사선에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건설의 모터음이 기쁨으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남이든 북이든 어느 체제든 형평에 맞는 분배가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미 터득한 것일까? 그러나 어떤 당위도 생존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 서해교전 등 얼어 붙었던 남과 북이 재벌기업의 활약으로 다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북한을 살리고 남한 실업인구에 대한 고용의 창출과 확대에 기여하는 바 크다는 것은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우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은 살리되 더 큰 소비를 위해 종말을 앞당기는 무차별적인 개발에 대해. 자본주의의 이마에 걸었던 개발이라는 단어는 진정한 의미의 개발인가?
지난 봄인가? 시화호가 다시 살아났다는 뉴스는 자연은 정말 웬만하면 다시 살아나 인간 앞에 선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신이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기 전에 활동할 정도로만 근근히 먹고 쓰며 정신적 충만을 즐길 줄 아는 새 시대의 정신을 구축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구적 환경이 엄숙히 거론되고 있는 이때 특정 기업에 의해 시작된 북쪽의 개발을 무조건 환영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자본주의의 속성에 의해 아무도 제동을 걸 수 없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재벌 불도저들인데 거기에 딸려 있는 식구들이 몇인가에만 사람들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지구적 차원으로 볼 때 경제를 살린다는 대명제는 바로 개발이며 이는 소비와 같은 선상에 있는 연결고리가 아닌가. 부패한 정치권과 야합하여 남한의 산야를 벌레먹은 잎사귀처럼 만들어 놓고 이제는 북측의 산야에 침을 흘린다고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비약일까? 그러나 그들의 부조리한 속성보다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의 기상 이변 등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사랑의 씨를 뿌리고 생명수를 나누며 살아갈 터이기 때문이다.
겨우 남아 있는 북쪽의 산야, 푸른 하늘, 맑은 물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둘쨋날 산행으로 올랐던 옥류동 계곡은 물이 너무 맑아 플랑크톤이 자라지 못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북한을 먹여 살리고 남한의 경제도 일으킨다는 명분 아래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재벌이라는 아귀들이 다시 한반도의 북쪽에 어떤 거대한 폐쇄회로의 동굴을 만들지 의혹이 앞서는 건 기우일까? 만물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겨울 마른나무 사이의 바람을 타고 내 원초를 깨우던 딱따구리의 타력, “닥다르르르르!!” 그것은 저 조선곡, 마록(馬鹿)의 관을 두드리는 소리!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의 실체란 회귀 불가능한 자연의 훼손과 극단적인 부의 편재라는생각을 하며 저물어가는 장전항에 날개를 접었다.
금강산 초입에서 보는 창전리, 온정리의 얕은 산야는 어디에도 개발의 흔적이 없고 어쩌면 능선이 그리도 곱던지. 지리산의 바리캉으로 민 것같은 자국도 없었으며 흔한 가든도 모텔도 없었다. 옛날의 산야를 보는 듯한 감회에 빠져 있을 때 분승한 현대상선 버스에서 가이드가 설명한다. 저기는 호텔부지, 이쪽은 골프장, 저기는 공연장들. 중단된 공사현장이 보기 싫게 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죽은 나무둥치처럼 서있던 북한의 군인들! 그들의 눈동자는 절망을 지나 차라리 사선에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건설의 모터음이 기쁨으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남이든 북이든 어느 체제든 형평에 맞는 분배가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이미 터득한 것일까? 그러나 어떤 당위도 생존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 서해교전 등 얼어 붙었던 남과 북이 재벌기업의 활약으로 다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북한을 살리고 남한 실업인구에 대한 고용의 창출과 확대에 기여하는 바 크다는 것은 모두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우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은 살리되 더 큰 소비를 위해 종말을 앞당기는 무차별적인 개발에 대해. 자본주의의 이마에 걸었던 개발이라는 단어는 진정한 의미의 개발인가?
지난 봄인가? 시화호가 다시 살아났다는 뉴스는 자연은 정말 웬만하면 다시 살아나 인간 앞에 선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신이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기 전에 활동할 정도로만 근근히 먹고 쓰며 정신적 충만을 즐길 줄 아는 새 시대의 정신을 구축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구적 환경이 엄숙히 거론되고 있는 이때 특정 기업에 의해 시작된 북쪽의 개발을 무조건 환영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자본주의의 속성에 의해 아무도 제동을 걸 수 없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재벌 불도저들인데 거기에 딸려 있는 식구들이 몇인가에만 사람들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지구적 차원으로 볼 때 경제를 살린다는 대명제는 바로 개발이며 이는 소비와 같은 선상에 있는 연결고리가 아닌가. 부패한 정치권과 야합하여 남한의 산야를 벌레먹은 잎사귀처럼 만들어 놓고 이제는 북측의 산야에 침을 흘린다고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비약일까? 그러나 그들의 부조리한 속성보다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의 기상 이변 등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사랑의 씨를 뿌리고 생명수를 나누며 살아갈 터이기 때문이다.
겨우 남아 있는 북쪽의 산야, 푸른 하늘, 맑은 물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둘쨋날 산행으로 올랐던 옥류동 계곡은 물이 너무 맑아 플랑크톤이 자라지 못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북한을 먹여 살리고 남한의 경제도 일으킨다는 명분 아래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재벌이라는 아귀들이 다시 한반도의 북쪽에 어떤 거대한 폐쇄회로의 동굴을 만들지 의혹이 앞서는 건 기우일까? 만물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겨울 마른나무 사이의 바람을 타고 내 원초를 깨우던 딱따구리의 타력, “닥다르르르르!!” 그것은 저 조선곡, 마록(馬鹿)의 관을 두드리는 소리!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지배의 실체란 회귀 불가능한 자연의 훼손과 극단적인 부의 편재라는생각을 하며 저물어가는 장전항에 날개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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