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보지만 말고 시민이 직접 만들자
1999/1999년 10월 :
1999/10/01 00:00
시민운동, 이제 퍼블릭 액세스를 활용하라
Don’t just watch TV. Make it.
미국의 대표적인 퍼블릭 액세스 방송사인 딥디쉬 TV(Deep Dish TV)의 슬로건이다. 이 표현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퍼블릭 액세스 방송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해준다. 일반 시민들이 미디어, 특히 방송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바탕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제한되어 있던 제작 부분을 시민들이 직접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액세스권의 기본 취지는 매스 미디어로부터 소외된 일반 대중에게 미디어에 자유로이 접근하고 또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액세스 개념이고 현재 논의가 되고 있는 퍼블릭 액세스 채널 또는 액세스 프로그램은 좀더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 즉 일반 시민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출연하고, 또 그것을 방송함으로써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다른 시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은 단순히 시청자가 참여하는 프로그램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 퍼블릭 액세스에 관한 논의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이나 옴부즈맨 프로그램 등과 관련하여 거론된 적이 있으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최근 통합방송법안 마련과정부터였다. 현재 통합방송법안에는 구체적으로 퍼블릭 액세스라는 표현은 없지만 ‘시청자가 직접 제작한 시청자참여 프로그램’과 ‘시청자가 자체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현안대로 방송법안이 통과되면 각 방송사는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을 일정부분 편성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시청자의 권리 신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는 방송사측도, 또 직접적인 주체가 되어야 할 시청자, 시민단체측도 이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 제작활동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져 오다가 법적으로 채널 할당을 요구하고 이것이 수용되는 형태로 액세스 채널이 정착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와는 반대의 수순을 밟고 있는 셈이다. 즉 법적인 보장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후에 시민 차원의 대응이 준비되는 상황이다. 물론 그동안 미디어 교육운동이나 모니터 활동 등을 통해 방송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되어왔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의 제작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각 시청자단체 및 시민단체들이 자신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된 프로그램들을 제작해낼 역량과 여건이 되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우려로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퍼블릭 액세스에 관한 논의가 짧은 시간 안에 매우 구체적인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법적인 보장의 통로도 준비중에 있다는 점은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년, 또는 몇십 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외국과 비교할 때 우리의 경우는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하는 셈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그 출발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어가는가 하는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퍼블릭 액세스 방송과 관련된 몇 가지 기본인식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시청자참여와 퍼블릭 액세스의 근본적 차이
첫째,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개념정의가 명확해야 한다. 액세스 프로그램은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Participation Program)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참여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참여를 프로그램 구성에 있어서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거나 시청률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해서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보다는 방송사측이 프로그램을 위해서 하나의 구성물로 초대한 것이다. 국제방송협회(IBIC)에서는 액세스와 시청자 참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액세스 : 직접 신청, 직접 통제, 방송시스템의 직접 사용 (You apply, You con-trol, You make use of system)
▷참여 : 방송사의 초청, 방송사의 통제, 방송시스템이 시청자를 사용 (They invite, They control, The system make use of you)
진정한 액세스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프로그램의 내용과 제작 전반에 걸쳐 자주성을 행사하는 프로그램이라 정의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시청자가 직접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모두 액세스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청자가 직접 카메라로 찍은 것이라고 해서 액세스의 요건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액세스 프로그램의 진가는 기존 방송사에서 다루지 않을 내용, 소외된 목소리를 다룬다는 데 있다. 방송이 갖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통로로서의 성격 때문에 소외되어온 소수의 의견, 일반 시민들의 생각, 상이한 주장과 가치관들이 담길 수 있는 새로운 공론의 장이 바로 액세스 프로그램인 것이다. 따라서 기존 방송사의 프로그램과 유사한 프로그램, 그것을 흉내낸 프로그램들을 굳이 액세스 채널을 통해 다시 방송할 필요는 없다. 액세스의 기본정신에 대한 논의 없이 직접 만든 작품만을 강조하는 것은 액세스의 개념을 크게 소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소외된 소수의견 존중하는 채널
둘째, 액세스 프로그램은 작품의 수준이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송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케이블 TV나 지상파 방송에서 액세스 프로그램과 유사한 성격의 프로그램들이 편성된 적이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시청자들의 직접 제작을 기초로 한 액세스 프로그램으로 출발하였으나 수준에 맞는 작품을 공급받지 못해 폐지된 사례들이 대부분이다. 폐지 이유로는 일반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홈비디오 수준, 저녁 시간에 가족들이 함께 보기에 문제가 있는 내용, 매니아적 시각에서 다룬 소재와 주제로 인해 일반 시청자들과의 괴리, 아마추어 수준의 구성, 촬영, 편집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액세스 프로그램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특성들이 액세스 프로그램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액세스 프로그램을 온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가족 프로그램으로 생각한다거나, 특정 이슈나 예술적 취향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액세스 프로그램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액세스 프로그램은 특정 시청자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필요가 없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이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전문제작자들이 만든 일반 프로그램의 수준과 질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셋째, 액세스 프로그램 도입의 현실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현상황에서 각 지역과 시민단체, 관련기관을 연결하는 ‘액세스 센터’의 설립이 선결과제이다. 액세스 채널은 기본적으로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지역민과 지역단체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하는데 현재 지역별로 이를 담당할 역량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시민단체들로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역사회와 시민단체들은 개별적으로 특정 프로그램 제작에 애쓸 것이 아니라 액세스 채널과 프로그램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기본적인 제작훈련과 미디어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공동 액세스 센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퍼블릭 액세스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3,000여 개가 넘는 액세스 센터가 운영 중이고 이를 바탕으로 액세스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 각 지역의 시청자단체와 방송설비를 갖춘 대학 간의 유대, 지역 케이블 TV사와 지역단체간의 유대 등 다양한 컨소시움의 형태를 통해 공동 제작, 공동 방송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미디어 시민운동의 핵심으로서의 퍼블릭 액세스 방송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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