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월급쟁이 뛰어넘는 기개를
2001/2001년 08월 :
2001/08/01 00:00
돌아본 한 세대 전 두 언론인, 천관우·예용해 선생
술을 모르고 살아온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할 수 있었던 선배 언론인이 있었다면 아마 두 분을 꼽을 수 있다. 천관우(千寬宇·1925∼1991) 선생과 예용해(芮庸海·1929∼1995) 선생 두 분이다. 두 분은 모두 6·25 전쟁 중인 1950년대 초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6·25세대'였다. 그 뒤 근 40년 동안 언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두 분은 대조적인 각자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민주투사 천관우 선생
충북 제천 태생인 천관우 선생은 서울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후, 6·25때 부산에서 1년 9개월 동안 『대한통신』 기자로 일했다. 또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 신문학과에서 8개월간 수학하고 돌아와 『한국일보』 창간(1954년)에 합류했다. 선생은 그뒤 『조선일보』, 『민국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1966년 『동아일보』 주필이 됐다. 나이 42세 때였다.
유난히 체구가 큰 선생은 술을 좋아하는 호걸형이었다. 선생은 소주를 큰 유리컵으로 물 마시듯 했다. 점심을 먹을 때에도 소주 한 병은 꼭 있어야 했다. 선생은 가끔 술자리가 파하면 조간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에 나타나 사장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면서 전화기를 집어던져 박살내기 일쑤였다.
4·19 전후 선생이 쓰는 단평 '메아리'는 『한국일보』의 명성을 끌어올리는 기관차 역할을 했다. 해박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선생은 격동하는 4·19 전후 정국을 비판하고 경고했다.
선생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은 1970년대 유신독재치하에서였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선생은 사표를 써야했다. 1년 2개월 뒤 상근이사로 복직한 뒤 선생은 박정희 독재와 싸우는 민주회복운동의 큰 기둥이 됐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1971),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1974)로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회복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는 동안 선생의 집이 있는 서울 불광동 골목 입구에는 중앙정보부의 감시 초소가 세워져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통제했다. 사실상의 연금상태였다.
선생은 신문사의 바쁜 일에 쫓기면서도 꾸준히 한국사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 왔었다. 특히 박정희 독재와 싸웠던 1970년대에 선생은 모든 공적활동이 봉쇄된 상태에서 『기자고(箕子考)』 등 학계에 새로운 충격을 준 논문 10여 편을 내놨다.
고난에 찬 1970년대는 선생이 고독한 불굴의 민주투사이자 학자로서 우뚝 선 시대였다.
1970년대 말 박정희의 죽음으로 선생은 10년 동안의 핍박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12·12 쿠데타 이후 선생은 전두환정권의 재정지원을 받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그리고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선생은 다시 『한국일보』 고문으로 언론계에 복귀했지만, 신군부를 의식하는 선생의 글은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나마 선생이 『한국일보』를 떠나 집에 칩거하면서, 그동안 선생을 따랐던 언론계 후배들과 민주회복운동권 사람들도 선생 곁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이 고군분투하면서 감당했던 그 무거운 짐을 그 누구도 "더 감당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선생은 거의 완전히 고립된 채 1991년 쓸쓸히 눈을 감았다. 선생은 1970년대 태풍의 중심에 섰던 민주투사요, 언론인이었다. 1980년대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좌절 속에 눈을 감은 인간적인 약점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길이 기억해야될 언론계의 선배임엔 틀림없다.
전통 문화에 헌신한 예용해 선생
경북 청도군 태생인 예용해 선생은 경북고를 나와 경북대 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때가 6·25전쟁의 포화가 낙동강 일대에까지 소연한 시기여서 선생은 『대구일보』종군기자로 전선을 누볐다(1950∼1954).
『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선생은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고, 짜임새 있고 운치 있는 필치가 특히 장기영 사장의 눈에 띄면서 촉망받게 됐다.
36년 동안 『한국일보』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업적은 1960년 7월 10일부터 1962년 11월 30일까지 연재됐던 <인간문화재> 시리즈였다. 선생은 이 연재물에서 공예를 중심으로 해서 건축, 연희(演戱) 등에 이르기까지 잊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의 맥을 발굴, 정리했다. 이로써 이 나라에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라는 개념이 뿌리내리고, 사라져가던 전통을 보존하는 역사적 기틀이 마련됐다. 만일 선생의 이 작업이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럽게 보존하고 있는 '무형문화재'는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선생이 이룩한 업적은 신문기자의 영역을 뛰어넘어 길이 기억될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성품이 소탈했지만, 우아한 멋쟁이였다. 고급파이프에 향기높은 시가를 즐겼고, 런던의 상류사회 신사처럼 패션감각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 반면 선생은 교양인으로서의 규범과 예의범절을 존중하고 지키는 선비의 절도가 있었다. 또 전형적인 'TK'로, 권력중심부에 접근할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평생 권력정치를 외면하고 전통문화의 보존·발전에만 헌신했다.
5·16쿠데타 이후 『한국일보』에 필화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장기영 사장이 정보부에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선생은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은사가 서울에 왔다는 사실, 그리고 숙소의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한다. 선생은 박 대통령의 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당신이 제자를 어떻게 가르쳤길래 쿠데타를 일으키고, 신문사 사장을 구속까지 하는가"라고 따졌다. 그 전화를 건지 며칠 뒤 장기영 사장은 중앙정보부에서 풀려 나왔지만, 선생은 끝내 그 일을 장기영 사장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얘기는 선생이 『한국일보』를 정년 퇴직한 뒤 필자에게 들려준 얘기다.
선생은 평생 언론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전통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이라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일에만 전념했다.
선생은 6년 전인 1995년 4월 10일 눈을 감았다. 평생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남긴 글들은 선생이 조용히 눈을 감은지 2년여 뒤인 1997년 6월 6권의 전집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 땅에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문화의 맥을 남겼다.
지금 우리는 '언론'을 사이에 두고 기득권 집단과 개혁·변화를 요구하는 집단이 사생결단의 대결상태에 있다. 언론개혁과 언론사 세무조사 그리고 공정거래위 조사라는 쟁점은 언론의 울타리를 넘어 이 나라를 두 집단으로 양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해야 될 사람은 결국 언론 현장에 있는 기자=언론인들이다.
오늘의 기자들, 용기있는 결단을
필자는 오늘날 젊은 기자=언론인들이 직업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것처럼, 기자=언론인들도 소명의식과 사명감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더 민감한 샐러리맨화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 적은 한 세대 전 두 선배 언론인의 삶 속에서 우리는 개인적 이해관계보다는 국가적 공공이익을 위해 헌신했던 한 세대전의 기자=언론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언론개혁문제에 대해 오늘의 기자=언론인들도 월급쟁이를 뛰어 넘는 기개로 각자가 속해 있는 언론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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