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엄헌병사령부 관할 민병대 제6지대 대장의 고백
지난 호에서 서술한 신동고개(경북 칠곡군 지천면) 건이 언론을 타고 방방곡곡에 퍼졌다. 『조선』,『중앙』,『동아』 3대 신문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 문제를 밝힌 필자와 범국민위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상치 못했던 성과였다. 그런데 모 언론사에서 신동고개 학살 관련자가 연락을 해 왔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학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군인이 전화를 해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자에게 내가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연락처를 알 수 없는지 물었다.

혹 국방부나 주변사람들이 압력을 가해서 그의 순간의 작심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소재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 나는 지난 7월 초 그를 만났다. 그리고 내가 그를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그를 안심시킨 다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마침 그는 나의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의 형 되시는 분이라서 더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증언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해자로부터 들은 최초의 증언이었다.

군 면제 위해 민병대 선택해

그는 전쟁 발발당시 경북 모처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곧바로 대구의 집으로 향했다. 트럭과 버스, 열차를 갈아타고 전쟁 발발 이틀이 지난 6월 27일, 그는 대구 시민극장 근처(대신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오니 징집 통지서가 와 있었다. 군 입대를 준비하고 있던 차에 동네 정미소 벽에 붙은 벽보를 보았다. 그것은 민병대 모집 광고였다. 내용은 민병대에 들어가면 군대 면제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군 입대가 사실상 전사를 의미할지도 모르는 당시의 위급한 시점에서 살아남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민병대 사무실은 달성공원에서 곧바로 내려오는 사거리 모퉁이 2층에 있었다. 그는 간단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즉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떤 조직인지도 모른 채 일단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책무 때문에 민병대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구지역 계엄헌병사령부가 관할하는 민병대 제6지대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비교적 체구가 크고 신체가 튼튼했기 때문에 6지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민병대 6지대는 32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대구지역 대신동, 내당동 거주자들이었다고 한다. 민병대는 대장과 부대장, 그리고 분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속과 직책을 표시한 완장을 차고 있었다. 그들 민병대 6지대를 지휘한 지대장은 헌병 중위였으며 민병대는 사실상 그의 일방적인 통솔 하에 움직였다. (그는 헌병 중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병대가 하는 일은 주로 보도연맹 가입자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여 헌병사령부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주로 동네를 다니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수소문하였는데, 이웃사람이 밀고하면 본인의 부인이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보도연맹원으로 인정하여 상부에 보고했다. 결국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사람이 상대방을 모함에 보도연맹원이라고 고발하면 본인에게 소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보도연맹원으로 집어넣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런데 이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료 2, 3명이 군에 징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분명히 민병대에 들어오면 군 면제를 해 준다고 했는데 왜 군에 징집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때부터 헌병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전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군 내부의 충분한 조정이나 법률적 근거 없이 헌병이 독자적으로 민병대 조직을 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500명의 민간인을 6일동안 총살시켜

그러던 중 8월 초 어느 날 긴급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아침에 갑자기 트럭 3대가 민병대 사무실 앞에 들이닥쳤다. 위를 덮지 않은 (무개) 트럭이었는데, 그 트럭 안에는 사람들이 묶인 채 빼곡이 앉아 있었다. 대체로 4, 50대의 농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었으며, 더러 학생복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헌병중위는 오늘 특별한 임무가 있는데, 주변사람들에게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되며, 만약 발설할 경우 즉결 총살당할 것이라고 교육했다. 곧바로 헌병과 민병대가 같이 승차했고 차는 팔달교를 지나서 대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민병대와 헌병들은 이들을 실은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차량의 후송책임자 조차도 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가는 도중 그는 묶인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들은 대구형무소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고, 왜관, 칠곡, 구미, 김천 등 대구 서북쪽 거주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왜 잡혀왔는가 물으니 한두 명이 울부짖으면서 "나는 빨갱이 아니다. 잠자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밥해달라 해서 밥해준 것밖에 없다", "아들이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했는데, 아비도 같이 부역자라고 나를 집어넣었다" 등의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나도 밥해준 것밖에 없다", "억울하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트럭은 신동재를 올라가서 지천방향으로 약간 틀어 민둥산이었던 언덕에 정차했다. 보통 트럭은 뒷문을 열고 짐이나 사람들을 하차시키는데, 당시 헌병은 뒷문을 열지 않은 채 이들에게 옆으로 뛰어내리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당시 잡혀온 사람들은 굴비처럼 엮여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뛰어내리면 나머지 모두가 굴비처럼 뒤엉켜서 바닥에 처박히듯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져 안 다치려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헌병들은 무자비하게 군홧발로 걷어찼다. 헌병은 이미 이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는 큰 바위가 옆에 있었고, 바위 뒤에는 2m 높이의 정도의 경사진 비탈이 있었다. 사람들은 묶인 채 일렬로 서게 되었다. 권총을 든 헌병 중위는 뒤에서 지위하고 민병대와 여타 헌병 병사들은 카빈으로 이들을 조준했다. 헌병이 권총으로 신호탄을 울리면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는데, 총을 쏴본 경험이 없는 민병대원들은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해 엉뚱한 곳에 쏘거나 심지어는 공중에 총을 쏘기도 했다. 그때마다 뒤에 선 헌병 중위는 권총으로 이들의 머리를 내리 치면서 "이 개새끼들아, 그것도 제대로 못 하냐"고 소리지르면서 발로 차기도 했다. 당시 헌병들의 언사가 80% 이상은 쌍소리, 욕설일 정도로 이들은 거칠고 험악했으며 민병대는 자신조차 이들에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총살 직전에 끌려온 사람들은 검정고무신, 운동화 등 자신이 신었던 신발을 모두 벗어놓았다. 그것은 나중에 가족들이 와서 시신이라도 확인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그들은 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으며 더러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주로 4, 50대의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그렇게 외친 것은 정말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살려주지 않을까 하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지역의 학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연출되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혹은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은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힘차게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총이 불을 뿜을 때 도열한 대다수는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지만, 일부는 잽싸게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기도 했는데, 그들 중 극소수는 기어서 도망갈 수도 있었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 한국전쟁의 참혹함

일단 총살이 끝나면 중위가 민병대원을 끌고 시체를 밟고 다니면서 확인사살을 했다고 한다. 숨이 붙어있는 사람, 신음소리 등을 찾아서 확인사살을 했는데, 민병대원들이 확인사살 명령을 받고 그 장면을 눈을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하늘을 보고 총을 쏘면 역시 쌍소리를 하면서 두들겨 팼다고 한다. 증언자는 이 확인사살의 총부리가 자신에게 향해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살기를 느꼈다고 실토하고 있다. 일단 확인사살을 한 다음 헌병중위는 병력을 바위 위에 집합을 시킨 다음 재차 이들에게 경고했는데, 그 내용은 여기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가족에게라도 알릴 경우 즉결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목격한 그는 "무슨 이런 나라가 있나, 학교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극도의 회의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하여 6일 동안 총살이 계속되었다. 하루 2, 3대의 차량이 사람들을 싣고 와서 학살이 계속되었는데, 한 차에 30명 정도 탑승한 것으로 추산해 보면 대략 400명에서 500명 정도가 여기서 학살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신을 수습한 동네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증언자 역시 500명 정도가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는 모두가 삽을 들고 와서 총살을 한 다음 시체를 묻었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날이라 이틀만 지나도 이미 시체가 썩어 들어갔는데 마치 갈치를 굽는 듯한 냄새와 유사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고 한다. 이미 핏물은 흐르다가 주변의 바위나 돌에 자국을 남기면서 응고되었고, 겹겹이 쌓인 상당수의 시체는 썩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주변의 모래나 나뭇가지 등으로 대충 시체를 덮었다. 시체 옆에는 이들이 벗어놓은 주인 없는 신발들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검정고무신이 대부분이었고, 운동화, 구두도 일부 있었다. 그는 이 신발들을 비닐 종이에 싸두었다가 가족들이 찾으면 넘겨줄 생각도 했지만, 당시의 분

위기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다음 이승만정권에 대해 극도의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공산국가도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텐데, 이웃의 증언 한마디에 근거해 일방적으로 보도연맹원으로 몰아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개, 돼지처럼 도살할 수 있는가, 그는 차마 짐승들에게도 못할 짓을 이승만 정권과 대한민국 군인들이 자행했다고 분노하였다. 학살 당시로부터 50년 지난 지금,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그 일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심지어는 꿈에서도 나타나 그를 괴롭힌 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사건 직후 동료들끼리 술잔이라도 나눌 때면 트럭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귓속말로 주고받으며,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불가항력적인 전쟁상황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민병대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50년 9월 초 전투경찰에 입대했다. 거기서 제대한 이후 그는 그날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직접 현장에 가보지는 못하고, 동네에 찾아가 사람들에게 그곳의 시신가 수습됐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모두 쉬쉬하면서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는 지금도 갈치를 먹지 않는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그가 왜 갈치를 먹지 않는지 알고 있다. 50년 전의 지긋지긋했던 일이 지금까지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과거 일을 털어놓은 그는 약간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명령에 의해서였지만, 학살의 공포로부터 처음 그는 해방된 것이다. 그는 지금 6지대 동료들을 찾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함께 이 사건을 공개할 마음으로.
김동춘 성공회대 NGO학과 교수·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01/08/01 00:00 200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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