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정동

2001/2001년 08월 : 2001/08/01 00:00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첫사랑의 돌담길’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아시는지? 혜은이 씨가 예전에 불렀던 예쁜 노래다. 나는 이 노래가 정동에 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상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정동은 슬프다. 가슴에 새겨야 할 역사는 사라지고 어설프게 급조된 낭만만이 우리를 현혹하기에.

정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정릉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정릉이 미아리 고개 너머 북한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지만, 본래는 경복궁에서 지척인 이곳에 있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로서 지금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으나, 첫 번째 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그녀를 미워해서 미아리 밖으로 옮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릉의 신장석은 광통교의 기단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태종은 신덕왕후가 낳은 두 이복형제인 방향과 방석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능을 아예 없애버리지 않은 것만도 신덕왕후로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정동이라는 지명 자체가 이렇게 처참한 역사의 산물이다.

정동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그 언저리의 동네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정동이 슬픈 까닭은 무참히 파괴되고 이장된 정릉의 슬픔 때문이 아니다. 정동의 슬픔은 바로 덕수궁의 슬픔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빚어진 슬픔이다. 그러므로 정동의 슬픔은 역사적인 슬픔이다. 그것은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데서, 아니 기억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데서 비롯된 슬픔이다.

식민지적 근대화의 상징, 정동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진다. 이 진기한 행사를 보려고 사람들이 대한문 앞으로 모여든다. 그 건너에는 호텔들 사이로 대한제국의 성립을 하늘에 알렸던 원구단의 흔적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다. 설마 황제가 이 큰길을 건너 하늘에 고사를 지냈을까? 밤낮 없이 차들로 북적이는 그 앞의 큰길은 일제가 침략로로 뚫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원구단과 덕수궁 사이에 고압적이기 짝이 없는 경성부 청사를 떡 하니 들어 앉혔다. 그러니 부디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의식만 보지는 마시라. 저 건너편에 작은 숲 속으로 보이는 원구단 황우궁과 그 사이에 쇠감투를 쓰고 잔뜩 무게를 잡고 있는 서울시 청사를 꼭 함께 보시라.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1907년에 일제의 강압으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의 궁호가 ‘덕수’로 정해지면서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에 일제 침략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물론 바뀐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경운궁은 본래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동으로 부르는 지역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서대문으로 나가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경운궁은 경희궁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문 옆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정동의 복판에 이르게 된다. 덕수궁이 아니더라도 이 주위에는 역사적 자취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일제 때부터 대법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이곳에 있었다. 본래 조선의 의정부 건물이 있었던 곳에 일제는 식민지의 대법원을 세웠던 것이다. 이곳에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서고 있는데, 대법원 건물은 그 앞면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그 서쪽으로는 ‘근대 교육의 산실’인 배재학당이 있었다. 이곳도 지금은 온통 재개발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조금 북쪽으로 오면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그 뒤쪽으로 또 다른 ‘근대 교육의 산실’인 이화여고가 있다. 정동은 한국의 근대와 관련하여 각별한 공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는 제국주의의 침략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정동은 단순한 ‘근대의 공간’이 아니라 이를테면 ‘식민지 근대의 공간’이다. 경운궁의 변천사,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경운궁의 파괴사는 정동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던 1880년대부터 경운궁은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했다. 사실 ‘덕수궁의 돌담길’은 이러한 침략과 파괴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길이다. 일제가 멋대로 경운궁을 파괴해서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 ‘덕수궁의 돌담길’이기 때문이다. 그 우아한 정취를 즐기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 역사를 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일 것이다.

‘덕수궁의 돌담길’은 사실 그렇게 우아한 길도 아니다. 이 길은 정동의 복판에서 오른쪽으로 휘어 들어가며 고개를 넘어 신문로로 나가게 된다. ‘덕수궁의 뒷담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길의 오른쪽에는 덕수궁보다 더 높은 담이 이어져 있다. 도대체 안에 뭐가 있길래 저토록 높은 담장을 쌓았을까? 커다란 나무들로 울창한 그 담 안에 바로 미국 대사관저가 있다. 미국의 대사와 부대사가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위에는 경찰들이 늘 보초를 서거나 순찰을 돌고 있다.

‘뒷담길’의 입구에는 돌담에 기대어 가건물을 세워 놓았다. 공사장에서 가리개로 사용하는 철판을 가져다가 이어 붙여 놓은 것이다. 그 철판이 흉측해 보이는 건 알았던지 큰 사진으로 적당히 치장을 해 놓았다. 그런데 그 사진이 정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옛날 농촌 풍경을 찍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돌담길’에는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겠지. 바로 그 맞은편에는 빨간색의 유럽풍 공중전화 부스가 놓여 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모습의 부조화라니.

가건물 옆에는 ‘닭장차’가 서 있고 차단목이 쳐 있다. 작은 체크무늬 상의를 입고 까맣게 탄 앳된 얼굴의 전경들이 차단목 앞에서 통과차량을 감시한다. 차단목 바로 안쪽으로는 대사관저의 정문이 있다. 그 앞에는 따로 경비병 구실을 하는 전경들이 서 있다. 그 모습을 찍으려 하니 순찰을 돌던 전경들이 다가와 그 방향으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왜 안 되냐는 물음에는 그저 위에서 안 된다고 했다는 대답뿐이다. 참으로 희한한 ‘자유민주국가’가 아닐 수 없다.

열강의 침탈은 계속되는가?

‘뒷담길’을 지나쳐서 큰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정동극장이 있다.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온통 흰색으로 칠해놓은 허름한 근대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중명전이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곳이다. 물론 이 건물도 경운궁의 한 부속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골목에 숨어서 일반 상업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건물을 보러 가는 길에도 우리는 감시병들을 만나게 된다. 미 대사관저의 담장이 대중에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빠져 나와 다시 조금 더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고갯길이 있다. 이 길 초입에는 나무와 풀만 무성한 빈 집터가 있다. 이 땅이 정동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이 땅은 캐나다 대사관이 새로 들어설 곳이다. 문제는 캐나다 대사관측의 건축계획과 서울시의 도시계획 조례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시의 조례에 따르면 이곳은 용적률 300%의 일반주거지역으로 7층까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캐나다 대사관측은 9층까지 지어야 하니 용적률 400%의 준주거지역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해 왔다. 서울시는 결국 캐나다 대사관 측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여기서 사용된 논리는 ‘상호주의’다. “1997년 한국대사관을 캐나다 오타와에 지을 때 캐나다 쪽이 조례까지 바꿔가며 편의를 봐준 만큼 용도변경을 해주는 것이 외교적 갈등도 없애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캐나다 측이 ‘문화적 파괴’를 감수하고 한국 대사관의 신축을 도와줬으니, 우리도 ‘문화적 파괴’를 감수하고 캐나다 대사관의 신축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인가? 이런 것이 외교적 상호주의라면 그것은 사실상 ‘문화적 파괴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미국이 형평성을 내세우며 미 대사관저의 고밀도 신축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용산 미군기지의 불법 호텔 건축을 적극 지지한 데 이어서 외통부는 왜 또 이런 ‘외통수’를 주장하는 것일까? 서울시는 왜 외통부의 ‘외통수’를 거부하지 못하는가? 이런 외통부라면 없애는 편이 시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까?

고갯길을 계속 오르면 멋진 공원을 만나게 된다. 그 입구의 오른쪽 언덕 위에 우리 눈에 익숙한 근대 건축물인 ‘러시아 공사관’의 탑이 보인다. 아담하니 보기 좋은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수직으로 크게 금이 간 것이 꼭 머지않아 무너질 것만 같다.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알고도 그냥 둔 것인지. 그 아래 울창한 나무 사이로 지친 듯 늘어져 있는 성조기가 보인다. 미 대사관저다. 당연히 이곳에도 감시병들이 있다. 아예 문 앞에 ‘닭장차’를 세워 놓고 주위를 감시한다.

명성황후를 악랄하게 살해한 일제를 피해 고종이 의지한 곳이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러니까 덕수궁에서 바로 이 언덕바지 부근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러시아 공사관’이 사실 경운궁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수궁의 뒷문을 통해 은밀하게 이곳으로 옮겨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문과 길의 자취를 이종학 선생께서 어렵게 모은 사진에서 볼 수 있다(『한겨레신문』, 2001년 7월 9일치).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바지에서 잠시 100년 전의 참담함을 생각해 본다.

‘러시아 공사관’의 탑을 지나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다. 이 입구에도 감시병이 있다. 길가에 둘러쳐놓은 철책을 넘어서 탑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배치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무너져서 사람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될 테니까. 그러나 그보다는 역시 미 대사관저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것 같다. 미 대사관저의 뒷담장이 이 언덕줄기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온통 감시의 눈길과 발길들이다. 이 청년들이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대신에 주위의 쓰레기나 치우면 훨씬 보기 좋고 쾌적한 공원이 될 텐데.

나무들로 덮인 지저분한 샛길을 따라 내려오면 신문로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떠오른 흥국생명 빌딩의 뒷마당이다. 그 옆으로 기초공사만 끝내고 몇 년째 방치되고 있는 대우빌딩 공사장이 있다. 그 공사장 뒷길은 옛 경기여고의 축대길이기도 하다. 이 학교 터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회화나무는 본래 왕궁이나 왕족의 집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늙은 나무는 이곳이 예전에는 왕궁의 땅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고 사라진 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늙은 나무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우리의 감시병들이 나타나 제지한다. 여기는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 그러더냐고 하니까, 역시 위에서 시켰다는 대답이다. 이 땅은 미 대사관이 새로 들어설 곳이다. 세종로의 미 대사관을 돌려받는 대신에 이 땅을 내준 것이다. 이 땅의 위쪽으로 미 대사관저의 담장이 붙어 있다. 감시병들이 철문을 닫는다. 철문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미 정부의 재산이니 허락 없이 출입하지 말라는 글귀다. 그 경고문이 아니더라도 출입할 수 없다. 바로 그 문안에 늘 ‘닭장차’가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문 앞의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다시 정동의 복판이다. 그러니까 ‘덕수궁의 뒷담길’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 고갯마루에도 미 대사관저의 문이 있다. 이곳에도 역시 감시병들이 배치되어 따분한 감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뒷담길’의 모습은 꽤 근사하다. ‘덕수궁의 돌담길’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길을 지나려면 감시의 눈길을 최소한 두 번을 만나야 한다. 이런 기분 나쁜 길을 뭐 하러 연인과 걷겠는가? 깡패나 강도를 만나 봉변당할 염려야 물론 없겠지만.

역사를 느낄 수 없는 슬픈 자화상

고갯마루에서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영국 대사관의 뒷문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경운궁 내에 19세기 말의 세계를 지배했던 3대국의 외교 공관이 다 들어서 있는 것이다. 특히 영국 대사관은 덕수궁의 담장을 아예 자기네 담장으로 삼아 버렸다. 이렇게 해서 ‘덕수궁의 돌담길’은 막힌 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광복 후에도 이렇게 막힌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영국 대사관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다면, 이렇게 막힌 상태라도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왕궁의 담장에 기대어 선 영국 대사관은 길로 분리된 미 대사관저보다 더욱 더 직접적으로 아픈 역사를 증언해 주는 것 같다.

영국 대사관과 담장을 함께 쓰고 있는 또 다른 건물이 저 유명한 성공회 교회다. 정동의 낭만적 분위기라는 것은 고풍스런 맛과 서구적 향취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덕수궁이 고풍스런 맛을 대표한다면, 아마도 성공회 교회가 서구적 향취를 대표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혜은이 씨의 노래는 이렇게 이어진다. ‘정동 교회 종소리 은은하게 울리면은 가슴이 뭉클해졌어, 눈시울이 뜨거워졌어.’ 이 아름다운 건물은 삭막한 서울에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귀중한 건물임에 틀림없다. 분위기를 먹고사는 청춘들에게 ‘정동 교회’의 아름다움이 발휘하는 힘은 대단하다.

정동은 서울의 도심에서 보기 드물게 멋진 곳이다. 그러나 그 멋은 어설프게 조작된 낭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 이어온 역사에서 배어나오는 멋이다. 19세기 말 이래 그토록 험하게 파괴되었어도 아직도 그 오랜 역사가 남아 있기에 멋있는 곳이 정동이다. 이런 정동이 슬픈 까닭은 그 동네의 어디에서도 파괴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들을 수 없으며, 오히려 파괴된 역사가 우리의 역사 자체로 여겨지고, 심지어 또 다른 파괴가 계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동은 소중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상처를 고치고 아물게 하는 데에는 앞으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마당에 캐나다 대사관측의 ‘문화적 파괴’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시민의 힘으로 이 파괴를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시민의 힘으로 정동을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정동의 역사를 알고 익히는 것은 아마도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
2001/08/01 00:00 200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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