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처럼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2001/2001년 08월 :
2001/08/01 00:00
265일 간의 파업대장정 마친 민경중 CBS 노조위원장
기독교 방송국(CBS) 노동조합 민경준 위원장(39세)은 파업 265일을 끝내고 오랜만에 옷장 속에서 양복을 꺼내 입었다. 작년 10월 이후 노조 사무실에서 야전침대 생활을 한 그가 줄곧 입은 옷은 일명 공포의 ‘주황조끼’였다.
33일 파업과 단식, 265일 파업, 8일 단식으로 27kg의 몸무게가 줄어든 지금, 그의 몸에 맞는 양복은 하나도 없다. 인터뷰를 위해 노조사무실에 만난 그를 내가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자, 고등학교 때의 몸무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내 1층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앉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는지 그의 얼굴에 순간 어두운 빛이 지나갔다.
2시간 후면 열릴 제2차 노사협의회를 회사측에서 일방적으로 미루었다는 사무국장의 연락이었다.
“파업 이후가 더 어렵네요. 내일부터 넥타이를 다시 풀어야 하지 않을지 걱정이 밀려옵니다. 이번 합의문은 재단이사회측의 전권대표로 협상에 나선 김상근 목사님과 저 개인의 합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권 사장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정말 답답합니다. 99년 3월에도 재단개혁을 요구하며 33일 간 파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사회에서는 정관을 고쳐서 재단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합의문에 서명도 했으며, 두 번의 공청회와 노사간 협의를 거쳐 2000년 4월 재단이사회와 노사간 정관개정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재단 이사회가 현재까지 통과시키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파업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교계 일부에서 말하듯 노조가 회사를 말아먹기 위해 작정하고 뛰어든 파업이었는지 그리고 임금 등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싸운 것인지.
“96년부터 CBS 지배구조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내부에서 있었습니다. 재단개혁안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팽배했지만 회사측은 무시했죠. 이런 현실이 결국 장기파업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이번 합의 내용에는 교단이 이사진 구성을 안배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사장 청빙위원회’를 구성해 재단 측 이사 4명과 직원대표 3명이 경영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재단구성에 방송관련 전문인 이사를 5명 추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3명은 기존 이사회에서, 나머지 2명은 노사가 추천한 4명 중 이사회가 결정하기로 합의하였지요. 급변하는 변화 속에서 CBS가 전문방송국으로 거듭나고 경영합리성과 투명성을 위해 경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 또한 노동조합의 이해관계만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가장 무능한 위원장이었다”
합의문 내용만으로 보면 대기업과 언론방송계의 독선적 경영방식에서 벗어나 일하는 사람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처음으로 열린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사측과 노조는 견제와 발전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종교기관 소속 언론, 방송사에서 노동조합이 무력화된 이전의 상황에 비교한다면 기독교연합기관들이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차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6월 26일 합의문 체결 이후 노사는 단 한 차례만의 노사협의회를 열었다. 7월 19일 현재 노조는 모든 공식적 회의를 거부하고 나선 권 사장을 만나지 못한 채 정관개정 관련 회사측 이행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상태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조합활동에 참여한 사람이거나 대학시절 운동권 전력이 있는 사람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를 하다 워밍업으로 친 시험에 합격, 입사 이후 현장취재만 해온 평범한 기자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노동조합활동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2년 전, 노조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당시 사무국장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선거에서 위원장으로 출마하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며 저에게 부탁을 해왔지요. 당시 저는 거절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집까지 찾아온 후배는 선배께서 도와주셔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부탁을 하더군요. 그날의 결정이 파업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학내민주화투쟁이 있을 때 짱돌 두 번 정도 던진 착실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지금은 CBS노조 조합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변해 있다. 어떤 힘이 그에게 있는 것일까?
그는 이번 파업을 이끌며 “지금의 노조가 CBS의 모든 것을 개혁하겠다”는 마음을 가장 경계했다고 한다. 설령 생각은 옳아도 오류와 독선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후배들에게 교훈을 남기기 위해 오히려 자신이 쓰러지는 길을 택했다.
그가 큰 틀에서 위원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 있다. 현 집행부의 김준옥 사무국장(39세)이다.
“김 사무국장 역시 기자출신입니다. 노동조합을 이끌어가는 그를 보면 똑똑한 10명의 위원장보다 1명의 훌륭한 사무국장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마다 김 사무국장은 모든 일들이 치밀하게 진행되도록 조직한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김 사무국장과 한번도 의견대립으로 다투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김 사무국장이 활동 전반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할 때 그는 늦깎이 위원장으로서 부족한 면을 헌신성으로 채워 나갔다.
은결같은 파업을 통해 얻은 인생공부
그의 헌신성은 이번 파업 기간 동안 조합원들이 이탈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민 위원장에 대한 조합원들의 생각은 남다르다. 힘들고 지쳐 방송생활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우리는 집에서 잠자면서 싸우지만, 위원장은 야전침대에서 잠자며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데”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렸다고 한다. 민 위원장은 자신의 시간만 조합에 바치지 않았다. 조합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형제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꾸고 형제들의 집과 자신의 집까지 담보로 내놓아 3억 원의 조합원 대출금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가계는 마이너스 9000만 원의 통장으로 꾸려지고 있었다. 올초 해고 공식통보를 받으며 받은 퇴직금 5000만 원도 조합에 반납했다.
세상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요즘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운동의 가장 큰 덕목은 ‘헌신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첫 단식으로 병원에 실려가 지방간이 악화되고 십이지장이 출혈단계까지 왔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도 두 달이 못 되어 조직이 결정한 단식에 또 돌입하였다. 이런 그에 대해 투쟁적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운동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섬세한 마음으로 노동조합활동과 지금의 노동운동이 많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노동운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파업도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하였다. 그가 개발한 ‘재택파업’ 과 ‘사이버파업’이 그 예이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이 가장 무능한 위원장이라고 고해성사하듯 말할까? 그 이유는 200명이 넘는 조합원들과 그 가족 1000여 명이 270여 일 동안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 때문이다. “능력있는 노조위원장이라면 이렇게 힘든 길을 가지 않는 지혜까지 지녔겠지요. 저는 지금도 조합원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이 지점에서 그의 목소리가 순간 떨렸다.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추스르게 해준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이었지만 믿음만큼의 미안함 때문일까? 파업기간 조합원들이 겪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잠시 잠시 고이곤 했다.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일과 격리된 생활을 하게 됐을 때 그 하루가 얼마나 긴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처음 한두 달은 괜찮았습니다. 방송에 도움되는 공부도 하고 재충전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지냈죠. 그러나 120일이 지나 다섯 달째가 되던 2월 말, 고비가 찾아오더군요. 자녀들이 신학기 준비를 해야 하는데 대출금도 바닥이 나자 조합원들은 아이들의 학원부터 끊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회사측은 이 때 노조가 깨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한 조합원 PD의 부인이 보낸 한 통의 이메일을 읽었다. 아파트 관리비가 넉 달째 밀려서 독촉장을 받고도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울어야 할 때 너무나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파업 이후 처음으로 “내가 잘못 가는 것은 아닌가? 내가 포기하고 끝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편지의 끝에는 간곡한 당부가 남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 당신들이 포기하면 언젠가 내 남편이 또다시 이런 상황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CBS에서 다시는 파업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싸움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 남편이 제대로 된 직장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 그날 그는 위원장의 이름으로 전 조합원에게 자신이 직접 쓴 편지와 함께 5만 원짜리 쌀 봉투를 보냈다.
가장 생계가 어려웠던 2월 말 조합원들은 그 편지와 쌀을 받고 위원장의 마음을 울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서로 위로가 되어 아름다웠던 사람들”
CBS 조합원들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언론노련에서 지원기금으로 보낸 4000만 원을 20만 원씩 나눠 조합원들에게 전달되었을 때도 이들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는 술값으로 쓰지 않고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렇게 지난 270여 일 동안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공부를 차곡 차곡 쌓아갔다. 대출자금도 바닥이 나자 모교인 서울대 앞에서 50만 원짜리 좌판을 구해 오징어 장사에 나선 조합원, 아파트 야간경비업체에 나가는 조합원, 건축사무소 아르바이트일, 식당 서빙일, 피아노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민 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힘들면 현장에 복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오히려 “집회 현장에 못 나가더라도… 내가 어디 있더라도… 힘들더라도… 노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아달라… ”는 마음을 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6월 28일 협상타결 이후 모처럼 사내 지하에서 조합원 총회가 열렸다. 이날 민 위원장은 집회에 한번도 나오지 않은 조합원들 역시 우수조합원이라며 모두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임금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치밀하고 이성적이라고 소문난 김준옥 사무국장이 조합원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민 위원장이 우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김 사무국장이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투쟁을 이야기하던 조합원 모두가 한마디씩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파업 270여 일을 통해 친형제보다도 더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이다 ”
그는 지난 해부터 언론노련을 비롯, 노동계에서 급부상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주변에서는 민주노총 역사 이래 가장 탁월한 선동가라고 그를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변에서 그를 뛰어난 위원장으로 평가할 때 그가 정작 깨달은 소중한 변화는 다른 데 있다. 자신은 바로 노동자라는 점이다.
“기자라는 생각만 했지, 노동자라는 인식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기반은 철저하게 노동자였습니다. 올 초 1월, 서류 한 장으로 날아온 해고 통지서를 보며 깨달았지요. 화이트 칼라인 위원장도 이렇게 짤리는데 작은 사업장에서의 노동탄압은 오죽하랴 싶더군요. 민주노총 파업 전야제 날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고등학교 동기를 만났습니다. 노조활동 하면서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났는데 우연히 만나니 정말 반가왔습니다. 아마 나도 결국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나의 시각이 노동자가 아니었을 뿐이지요.”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생각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덕성입니다. 위원장을 비롯해 집행부는 조합원들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투쟁의 과정이든 협상의 과정이든 속이지 말고 토론하고 같이 결정해야 합니다. 집행부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옮기면 조합원들은 상식과 원칙으로 판단해서 긴 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나섭니다.”
그는 단결이 가장 큰 무기라고 이야기하는 노동자로 분명 변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은 노동운동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나이 40이 다 되어 시작한 새내기 노동운동가로서 자신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와 원칙을 하나씩 실천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방송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민 위원장이 CBS 내에서 사회부, 정치부, 경제, 문화체육부, 보도기획부 기자생활을 비롯해 기획조정실 파견근무와 북경 해외특파원 경력까지 지닌 경력 14년의 전문기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공포의 주황조끼로 상징되는 CBS 노동조합 위원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파업을 주도한 현직 노동조합 위원장인 그에게 지금도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방송이다. 그는 노동조합을 통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탓인지 그는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따뜻해지고 눈높이가 낮아졌다고 말한다.
이제는 방송청취율에 앞서 무엇을 방송에 담아야 할지 새내기 기자처럼 고민한다. “투쟁의 과정 속에서 엄청난 자산을 갖게 되었습니다. 파업을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직업의식을 갖게 되었으니 너무나 값비싼 시간이었지요.” 그는 현장으로 내려가 기회가 되면 노동부와 경총을 집중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지방노동위원회의 경우는 상급단체보다 더 심하게 회사측에서 침발라 놓은 걸 다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현장복귀가 결정되자 조합원들은 노동부 장관과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의 면담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동부 장관측에서 거부를 했다. 그 이유는 범법자와 만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조합원들은 이미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산별 상급단체 위원장인데…. 결국 단 위원장 단독 인터뷰로 방송은 성사되었다.
그는 기나긴 파업의 나날중 올 2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한다. CBS 정상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서 손을 맞잡고 사옥을 둘러쌓을 때 그는 성경에서 읽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자신의 거울이 되었던 조합원 가족들을 가장 신뢰한다. 그의 가족 역시 파업을 통해 함께 변화하였다. 위원장으로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대하던 부인은 파업기간 중 가장 든든한 동료였다.
민 위원장이 힘들어하는 내색을 보이면 그의 아내는 “당신이 힘들어하면 모두가 무너진다. 여기서 당신이 포기하면 모두가 쓰러지는 것이다”라며 그를 지켜주었다. CBS를 사랑하기 때문에 금전, 시간, 육체적 고통,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하는 그는, 지난 2년 동안의 마음고생을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자신이 투자한 모든 것이 아깝지 않단다. “투쟁이 오래 갈 수 있었던 것은 회사와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합원 동료들이 술 먹고 싶어하면 술 대신 술값과 카드를 내주며 위로가 되길 바란다.
“마음대로 긁어라” 위원장이 개인 카드를 넘겨줄 때마다 한 말이지만 조합원 동료들은 사용하지 않은 채 번번이 그냥 가져오곤 했다.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위원장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혹의 나이를 앞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바위처럼’과 복음성가 ‘해처럼 달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이다. 자신 스스로를 감성적이라고 말했듯이 그는 지난 270일 동안 ‘정의’를 향한 싸움에서 바위처럼 버틴 그 마음으로 앞으로도 살아가길 원한다.
그는 파업을 통해 여러 갈래 인생길 중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방송인으로, 노동자로, 그리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상식과 도리를 배우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CBS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자신을 비롯한 방송인들의 잘못으로 안티CBS로도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방송 현장에 복귀할 그 날을 준비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