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학원강사노조 결성한 대성학원노조 법규부장 채건희
아침 8시 20분, 수업은 하지 못하지만 그는 꼬박꼬박 출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온몸으로 막던 경비들도 이제는 수굿해졌다. 출근은 해도 수업을 하지 못하는 그는 수업이 없는 동료강사와 장기를 두기도 한다. 덕분에 장기 실력이 많이 늘었다. 그는 얼결에 얻은 이런 자유(?)의 날들을 안식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든든하게 밀어 주는 노조 동지들이 있고,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식구들이 있어 힘겹지 않다.

2000년 12월, 그는 입시학원에서는 처음으로 대성학원 노조를 만들었고 대신 직장을 잃었다. 직장을 잃으면서 더 바빠진 그 사람. 서른세 살부터 오십을 앞둔 지금까지 청춘을 다 바쳐 일한 학원에서 해고당한 뒤 출근투쟁을 벌이고 있는 참여연대 회원 채건희 씨를 만났다.

학원강사로 일한 지 17년 만에 돌아온 건 해고통지

“저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요. 작년 6월인가, 후배강사들이 학원에 문제가 많다고, 뭔가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선배된 도리로 가만 있을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나섰던 게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장기적으로 학원도 좋은 일이니 원장도 좋아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봉급 인상과 퇴직금 정산 방식의 현실화,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요구하며 건의서를 만들었고 강사 103명 중에서 99명이 서명을 했다. 일은 자꾸만 커져서 6월 22일에는 수업 거부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그들의 요구는 관철됐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소위 말하는 ‘찍힌 사람’이 됐고, 12월에는 해고 통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미운털이 박힌 것.

“그래도 같이 보낸 세월이 있으니까 이 학원에 애정이 크거든요. 그런데 바른소리 한다는 이유로 찍혀서 해고를 당하고 보니, 이것 참 학원 앞날이 보입디다. 그 애정까지 위태로워지고 말았지 뭐.”

그를 비롯한 11명의 강사가 ‘근태 및 학생지도 불량’을 이유로 해고 대상자에 올랐다. 처음엔 그저 학원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보자던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명백한 탄압이었다. 징계위원회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해고는 무효라고 주장해 해고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1명의 해고 대상자 중에서 10명은 사표를 내고 학원을 떠났다. 올해 2월, 달랑 혼자 남아 해고 통지를 받았다.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그의 책상도 없어졌다. 노조회의가 있는 날에도 학원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출입증을 가져와야 한다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원래 나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에요. 별 끼도 없고,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랬는데, 어찌된 게 작년부터 달라졌어요. 뭔가 저기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게 있거든. 노조 활동도 그렇게 한 것 같아요.”

부당해고구제신청을 해서 5월에 승소하고도 그는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6월 30일에 학원으로 복직 통지서가 왔는데도 학원에서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셈인지, 끝까지 가 보겠다는 기세란다. 실질적으로 학원 일을 맡고 있는 원장의 아들이 “노조나 만드는 당신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 대법원까지 가 보자”고 그러더란다. 그래서 출근 투쟁을 시작했다. 비상투쟁본부를 만들고 날마다 지도부 회의도 하고 있다. 그는 결단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다. 끝까지 가 보자는 건, 학원만이 아니다.

“제 딸이 여기 대성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어요. 녀석도 나를 믿고 지지해 주지요.”

아버지를 해고한 학원에서 그의 딸은 공부를 한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전혀 거칠 것이 없는 그의 상황. 당당한 아버지를 보면 그의 딸도 자랑스러울 게다.

그의 아들은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어쩔 수 없는 보통 아빠다. PC방에서 밤새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며 기가 막혀 하는 그런.

“저는 제가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그런데, 제 아들한테 하는 거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부모가 나한테 했던 행동들 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만 골라서 하고 있더군요.”

매맞으며 큰 아이는 자기 아이한테도 꼭 매를 들게 된다는 말이 있다. 크면서 부모에게 보고 배운 것을 자기도 모르게 자식에게 풀어놓게 되는 일은 허다하다. 그러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그의 아들도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테고, 아이가 어른이 된 뒤에는 그런 아버지를 꼭 닮은 사람이 될 테니까.

세상 전부를 자기 강의실로 삼아버린 이

그는 대성학원에서 17년 동안 지구과학을 가르쳤다. 학교 다닐 때도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고, 얌전히 공부만 했다. 사범대를 졸업한 뒤 발령을 기다리며 잠시 무역회사에 다닌 것말고는 지금껏 분필 가루만 마시며 살아왔다. 학교 다닐 때도 자기 짝말고는 반에 어떤 친구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담배에 교육세가 붙기 시작하자 그런 식으로 간접세 내는 게 싫어져서 하루 일곱 개비 정도 피던 담배를 끊어 버렸다는, 조금은 엉뚱하기도 한 사람. 그러던 그가 작년부터 확 달라졌다.

“지구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마그마가 폭발한 정도에 비유할 수 있겠죠. 이제야 끼가 발현된 거예요. 저도 요즘 저 자신을 보면 가끔 놀라요. 너무 즐겁거든요.”

2000년 한 해는 그에게 화산 폭발과도 같은 해였다. 노조를 만들면서 지금껏 자기 생활만 돌보고 산 일을 반성하게 됐고, 그래서 참여연대 회원이 됐다. 아내가 다니던 교회에도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날마다 새로운 일의 연속이었고, 삶이 풍성해졌다.

덕분에 그를 만나기 위해 꽤나 고생해야 했다. 화요일은 아카데미 강의 듣느라, 목요일은 회원 한마당 때문에, 혹은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에…. 계속 시간이 엇갈리는 바람에 결국은 점심시간에 겨우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것도 그의 선약을 깨면서까지…. 강의를 안 하는 대신 세상 전부를 자기 강의실로 삼아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는 바쁜 사람이 됐다.

“참여연대 신입회원 한마당에는 꼭 참석하려고 해요. 원래 그런 자리는 간사가 아니라 선배회원이 채워 줘야 하는 법이거든요. 시민로비단 청년팀에도 오라고 좀 꼬시려구요(웃음). 제가 거기 총무거든요. 하여튼 즐거워요.”

2월 이래 시민로비단 청년팀이 무려 24명이나 늘었다고 그는 자랑한다. 그도 그럴 것 같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도 아주 즐거웠으니까. 강의를 잘 하려면 학생의 눈높이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강의실 안에서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학생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고 거기에 맞게 강의할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강사라고 했다. 앞으로도 참여연대 신입회원 한마당에는 오래도록 그의 얼굴이 불쑥불쑥 나타날 거고, 청년팀 회원도 부쩍부쩍 늘겠단 생각을 해 본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뒤늦게 불어온 그의 폭풍은 막을 길이 없어 보인다. 에너지로 충만해서 신나게 얘기하는 그와 마주앉으니 나까지 덩달아 힘이 넘치는 것 같다. 그는 오늘도 참여연대로, 노조로 바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김은주 본지 객원기자
2001/08/01 00:00 200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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