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체청 앞 1인시위 전말기
prologue : 오랜 기다림

2000년 4월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세청에 탈세 제보를 했다. 삼성 3세 이재용 씨의 재산증식 과정, 특히 1999년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구입이 시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는 ‘증여’에 해당하며 따라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보의 요지였다. 참여연대의 경제민주화위원회에서 진행하던 소송과정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를 ‘세법’의 관점에서 새로 읽어낸 것이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제보자 신분이기 때문에 조사의 시작여부, 진행과정 등에 대해 묻고 들을 수 있었지만 국세청의 대답은 한결같이 “시작했으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7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결단, 우연 그리고 돌입

더 이상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욱이 2000년도 국정감사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조사진척사항에 대해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정치인들은 묻지도 않았고 국세청장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훌쩍 한 해를 넘길 것만 같았고 그저 유야무야될 것만 같았다.

참여연대 조세개혁팀 내부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급박하게 계속되었다. 무슨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그 ‘특단의 조치’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다들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우선 본격적인 시민행동에 돌입할 것을 선언하고 연속공개편지(‘국세청은 답하라’)를 보내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지속적인 집회와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신문을 활용하자는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2000년 11월 21일 시민행동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세청의 과세를 촉구하였다. 그 순간 윤종훈 조세팀장의 돌발발언이 있었다.

단식투쟁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결단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그게 ‘개인의 결단’일 이유는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결론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집시법 11조 때문에 국세청 앞에서는 집회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여론을 확산시키고 국세청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인가?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이때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정 안 되면 혼자서라도 국세청 앞에 서 있으면 어떨까요? 어차피 집회는 안되지만 혼자서 하면 집회가 아니잖아요? 피켓 들고 매일 서 있으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다들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법전을 한번 뒤져보니 집시법 2조에 집회및시위의 개념을 ‘다수인’이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다수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주간의 연속공개편지가 끝나는 시점에 국세청 앞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다만, 하루종일 하기보다는 국세청 직원들이 출근하는 아침시간에 맞춰 여러 날 하는 것으로 방식을 정했다. 이렇게 ‘국세청 앞 1인시위’는 우연히 그리고 갑작스레 시작됐다.

확대와 확산

2000년 12월 4일,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춥게 느껴졌다. 이제껏 단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1인시위’가 국세청 정문 앞에서 시작됐다. 종로서 정보과 형사도, 국세청 직원들도, 삼성에스원의 직원들도 다들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한 시간 동안 피켓을 들고 서 있어야 하니 보통 피켓과는 다른 모양이어야 했는데, 마침 사무실에 있던 나무막대와 피켓을 조합하여 들고 서 있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2주 동안 윤종훈 회계사가 혼자 국세청 앞을 지켰지만, 당연히(?) 국세청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냥 그렇게 끝을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소 모험이라고 생각했지만 ‘릴레이 시위’를 시도하기로 하였다. 우선 100일 정도는 지속할 것과 가능한 일반 시민들이 많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일단 참여연대의 임원과 간부들, 그리고 회원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 참가자 모집을 위한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벌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캠페인 사이트를 만들고 『오마이뉴스』와 함께 시위참가 신청을 접수받았다. 솔직히 내심 불안했다. ‘만약 참가신청자가 너무 적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이런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杞憂)’였다. 신청이 쇄도한 것이다! 기성 언론들의 철저한 침묵 속에서 인터넷신문과 참여연대 홈페이지만이 유일한 홍보수단이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정말 놀라운 결과였다. 신청자가 너무 많아 결국에는 2월부터 하루에 두 사람이 번갈아 서는 식으로 변경하였다. ‘1인시위 아닌 1인시위’가 또다시 개발된 것이다. 매일매일 국세청 앞을 지킨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목소리가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었고 그들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새 ‘1인시위’ 자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대사관 앞, 서울시청 앞, 광화문 앞에서.

그동안 집회 및 시위 금지지역으로 받아들여졌던 공간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순식간이었고 ‘1인시위’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처럼 확산됐다. 물론 최근 경찰들이 이마저 억압하려 하고 있으나 그것은 ‘1인시위’의 위력을 반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1인 시위는 누구나, 어디서든,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epilogue : 1인시위란 1인시위일 뿐이다

1인시위란 어차피 ‘상징을 둘러싼 싸움’이다. 국세청의 과세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기에 ‘국세청 앞’이라는 공간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고, 조세정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보통 납세자’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설득력 있었다. 그리고 3월부터 시작된 현직 언론인들의 1인시위처럼 단계적으로 이 문제를 ‘전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내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1인 시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1인시위’만이 아니라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면서 이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쨌든 ‘국세청 앞 1인시위’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국세청이 이재용 씨 등에게 증여세를 과세했다는 내용적 성과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이들의 직접적인 참가와 지지를 이끌어냈고 1인시위 자체가 새로운 시위 방식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1인시위‘를’ 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1인 시위‘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2000년 4월 26일 시작된 이 싸움은 2001년 4월 16일, 거의 1년 만에 끝이 나게 된 것이다.
홍일표 참여연대 조세개혁팀 간사
2001/08/01 00:00 200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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