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 5년 사이에 한국 여성의 지위는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남녀 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의 시행은 ‘성희롱’문제를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직장 내에서도 관행적으로 자행되던 성희롱에 대해 제재가 가해지기 시작하였고, 고위공직자들이 이런 문제로 사임하거나, 직무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 사례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성차별에 대해 무지하거나 애써 무감한 채 하던 남성들은 이런 급격한 변화에 불평하면서도, 이제 그 진도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6개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이 생겨났고, 올해 들어와 여성부가 출범한 것도 큰 성과이다. 여성부의 영어 명칭이 ‘Ministry of Gender Equality’로 명명된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정책도 성차별 철폐에서 한 걸음 나아가, 양성 모두가 민주적으로,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남성들 사이에서도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성(Gender)를 둘러싼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한국남성학연구회>,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좋은 남편이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등은 성과 관련된 남성들의 자각과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보기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의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토론과 병행하여 진행된 시청자 여론조사에서도 폐지 찬성론자가 존속론자의 3배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식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성들의 불평과 페미니스트의 비판 사이에 접점은 없는가

그러나 운동 내의 가부장제와 관련하여 여성운동의 행보나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도전에 대해,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시민·사회운동 내 남성들의 불편한 심사가 없지 않다. 장원 사건과 혜진 사건 그리고 운동권 내 성차별을 뿌리뽑는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100인위원회의 명단공개를 둘러싸고 일어난 미묘한 갈등들이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객관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고, 그럴 경우 피해자인 여성의 감정을 존중하여야할 것인가를 놓고 여성운동 내에서조차 토론이 종결되지 못한,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이다. 또한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해자의 인권이 마구 짓밟히는 것이 용납될 수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런 문제제기의 배후에는 ‘가해남성이 저지른 행동에 비해서, 그를 매도하는 방식이 지나치다’는 불만일 수도 있고, ‘아직은 성차별이나 성희롱에 대한 남성들의 감수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하에서, 성과 관련된 경거망동 행위를 흉악한 범죄로 매도하는 게 아니냐’는 불평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썩은 정치인이나 기업가에 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관대하고, 도덕성을 내세우는 직업집단이나 운동권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독특한 집단심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부패하고 염치없는 정치가와 기업인, 아류 NGO운동단체들은 어이없이 용납되는 데 비해, 시민·사회운동가들에게는 지나친 비판이 가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또한 여성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입장이나 세대 차가 존재하고, 그래서 일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방식은 운동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속류 급진주의의 일 형태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과거의 첨예한 투쟁의 시절에, 해결과제의 급박성에 비추어 제기하지 못했던 ‘내부민주주의 문제’가 여전히 적극적으로 토론되지 못하는 현실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크게 봐서 성차별문제는 결국 인권문제의 일부이기도 한데, 우리 사회가 섬세한 ‘인권개념’을 발전시키고 내면화할 역사적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어서, 이런 각도에서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 결여를 변명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앞서서 민주주의를 개화시킨 서구 국가들의 노동운동이나 사회민주당 운동에서도 반(反)페미니즘(antifeminism)은 지속적으로 나타나 고 문제시되었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운동과의 차이는 진보적인 정당이나 사회운동은 여성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는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노동운동은 오늘날까지도 쟁점이 되고 있는 ‘낙태금지법 폐지’나 ‘피임’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새로운 성도덕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의 지도부나 저변에서 여성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

나는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저절로 얻어지기보다는 ‘학습’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사회가 지속 가능한 경제개발, 자연환경이 아름답게 보존된, 빈곤·전쟁·폭력이 사라진 동시에 남녀평등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우리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끊임없이 거론되고 ‘학습’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로서 서구 시민사회의 역사적 행로를 뒤쫓다 보면, 역시 서구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혹독한 ‘훈육’의 과정에서 얻은 결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성평등을 향한 감수성의 학습도 시민운동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평등을 향한 감수성 학습이 과제

그러나 여성인 내가 느끼는 불만은 남성운동가들이 이 문제를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내 할 일도 많고, 시민운동은 매일매일 해결해야 할 문제로 차고 넘치고, 여성들을 상대로 싸워 보았자 얻을 게 없고, 성평등의 대의명분을 무시하는 것도 이제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저 넘기고 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는 ‘여성들이 시끄럽게 굴면, 그냥 대충 들어주고 넘어가는 게 피차에 좋다’는 계산법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런 현실은 서구의 경우, 시민·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의 분리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지금 두 운동 모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은 마지못한 협력, 그래서 결국에는 ‘적과의 동침’으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여성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이 진정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여성운동에 대한 남성들의 비판도 필요하다. 비판이 없는 운동은 외롭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성평등을 위한 담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시민운동과 시민운동가들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운동의 성과에 못지않게 자본주의적 상업화의 파고를 타고 ‘페미니즘 담론’은 무성하나, 여성의 경제적 현실은 ‘지구화(globalization)’의 급류에 밀려 더욱 열악해지고 있는 이 모순된 현실에서 여성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단결은 더욱 절실하다.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2001/07/01 00:00 2001/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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