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 앵무새 과카마야를 아시나요?

“한 마리의 새가 저렇게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마르코스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신들이 밤은 검정, 낮은 하양, 새벽과 오후는 잿빛… 하는 식으로 세상을 칠하고 난 뒤 그 색깔을 잊지 않기 위해 과카마야를 잡아 칠해 놓아서)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가 색깔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 곳곳을 날아다니게 되었다네. 여자들과 남자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과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모든 색깔과 모든 생각들이 적절한 곳을 찾으면 세상이 평화롭고 살 만한 곳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말일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사파티스타민족해방전선. 1994년 1월 1일 0시 0분 멕시코 치아파스주 라칸도라 정글에서 당시 막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해 “이제 그만!”이라며 저항의 무기를 든 뒤 지금껏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마야의 후예들. 그리고 마르코스 부사령관.

과카마야 이야기는 바로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쓴 동화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박정훈 옮김, 다빈치 펴냄, 2001)의 환상이 가득한 지혜창고를 여는 삽화다. 동화가 거듭 환기하고 있듯이, 적어도 ‘마야의 지혜로운 후예’의 상징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한, 사람들의 피부색의 차이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것은 높낮이를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채로움, 서로 다름 속의 조화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마야의 후예가 현대사를 바꾼다?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고 칭송했던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영원한 반란자’ 마르코스 부사령관(사파티스타의 지도자인 그가 부사령관인 것은 ‘저항하는 멕시코 원주민과 농민’의 꿈의 결집체이기도 한 멕시코 혁명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영원한 총사령관이기 때문이다)이 자신들의 대의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체 교육용으로 작성한 이 동화는 온 가족이 돌려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범용성이 높다.

신들도 토론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주장하는 이 범상치 않은 동화는 ‘불온한 반란세력의 수괴’가 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온유하면서도 깊고 넓은 울림을 주는 잠언으로 그득하다.

몇 가지만 잠깐 되새겨보자.

“굴복이란 단어는 진실한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각을 두려워한다. 고통과 피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작아지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크다.”, “가장 위대한 신들, 최초의 신들은 기억이 미래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

“칼 나무 바위들과 맞선 물처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가 물이 되어야 할 때이다.”

“언제 길이 끝날지 물으면서 지치고 피로해지지 말게나. 미래와 과거가 만나는 곳, 바로 거기서 끝날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내일이라고 부르는 빵을 요리하기 위해선 재료가 아주 많이 들어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통일세.”

‘일자리·토지·집·음식·건강·교육·자율·자유·민주주의·정의·평화’를 요구하는 그들은 세상을 돈의 지배 아래 가둬두기를 바라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자뿐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 세계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존재다. 아무려면 ‘박물관의 골동품’(?!)에 불과했던 고대 마야(문명)의 후예들이 인터넷을 타고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현대사를 바꾸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기가 쉽겠나. 어쨌든 그들에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인터넷을 쓰는 원주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총으로 폭격기에 맞서며 세상의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그들의 끝없는 ‘고통 속의 저항’에 있다.

전쟁이 아닌 희망을 가리키는 사람들

그 ‘저항’의 사회과학적 번안은 이렇다.

계간 『당대비평』 여름호에 실린 노벨 평화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백년동안의 고독』의 지은이)와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나눈 대화의 일부를 보자.

“당신과 사파티스타들은 군인들이 맞습니까? 당신은 그 동안 싸워 온 전쟁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마르께스)

“우리는 군대를 만들고 군인이 되었습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그러나 우리 군대는 아주 독특한 군대입니다. 이 군대가 지금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군대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어리석고 맹목적인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예요. 군인들은 늘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운동의 미래가 군대가 되는 것이라면 그 운동에는 미래가 없지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계속 군사조직 형태를 고수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 세계에 맞서는 사상적 대안 가운데 하나이자, 실천적 입장 가운데 하나로서는 실패하고 말겠지요. 바꿔 말하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에게 벌어질 최악의 상황은 권력을 장악해서 혁명군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도한 것하고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출현한 1960년대, 1970년대의 군사정치조직들에게는 분명 성공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실패를 뜻합니다. 우리는 지난 연대의 그 승리들이 결국은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 시민사회, 민중이 서 있을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누가 방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는 세상을 다시 건설할 수도 없을 뿐더러 사회를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망가진 국가들을 재건할 수가 없어요. 이 세계, 구체적으로 멕시코 사회는 다양한 차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차이들 속에서 서로간의 존중과 관용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은 1960년대나 1970년대 정치군사조직들의 언술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현실은 언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마르코스)

마르코스는 ‘멕시코가 자기 가면을 벗으면 부사령관도 가면을 벗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분노의 그림자』,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삼인 펴냄, 1999)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혁명의) 결과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기획을 가진 당이나 조직, 또는 제휴 조직들의 승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 제안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적 공간의 창출일 것입니다. 이런 민주적인 공간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이미 역사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이 증명된 세 가지 기본전제들이 이뤄져야 할 것인데, 그것은 바로 가장 유력한 사회적 기획을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인 권리와, 이런저런 기획에 찬동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모든 기획이 지향하는 것은 반드시 정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침략 이후 500여 년을 쉼 없이 저항해온 이들 ‘근본주의자’이면서도 현실의 변화를 놓치지 않는 마야의 후예들한테서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참고로 『분노의 그림자』 후기(‘마르코스의 전문은 전쟁이 아니라 희망’)를 쓴 프랑크 바르다케는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가 미국의 진보세력에 주는 교훈을 이렇게 정리했다. “문제는 희망의 전문가인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들처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정치적 행동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르코스는 절대 ‘지식에 대한 비관주의와 의지에 대한 낙관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가지라도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무하고 격려하는 것, 그것이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사령관(마르코스)을 무조건 따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훈 『한겨레』기자
2001/07/01 00:00 2001/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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