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세대와 책읽기
책맹사회. 글자를 앞에 놓고도 읽지 못하는 문맹처럼 책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책맹'을 양산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늘고 있다.

'지성의 요람' 속에 있다는 대학생들도 책맹의 대열에서 예외는 아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논술교육으로 읽기, 쓰기 교육이 강화됐다고 하지만, '모범답안에 가깝게 외워쓰기'와 같은 또 하나의 암기과목이 된 지 오래다. 게다가 인터넷시대의 본격적인 수혜자층인 이들은 채팅 등에서 주어, 서술어도 생략되기 일쑤인 단문 위주의 표현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친숙해진 만화나 영상물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대화체 문장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행간의 뜻'을 찾아내야 하는 진지한 주제의 책읽기는 이들에겐 수수께끼 풀기 보다 어렵고 재미없는 일일뿐이다.

ㅅ대 사회과학부 2년 조진호 씨는 "입학 초 리포트를 쓰려고 참고 교재들을 봐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며 짜증을 내는 동기들을 많이 봤다"고 했다. 입학 직후 잠시 충실한 리포트 쓰기를 시도하다가 이내 포기해버리고 남의 것 베껴쓰기나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짜집기, 영화나 술 등을 미끼로 다른 친구에게 대필 부탁하기 등으로 레포트를 처리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고육지책으로 '문헌 (손으로) 옮겨적기'와 같은 레포트를 내줬다는 모 교수도 있다. 옮겨 적는 그 시간만이라도 교재를 들여다보라는 뜻에서 말이다.

토익, 토플, 컴퓨터자격증 그리고 졸업인증제

그러나 지성인으로서 교양서적을 많이 읽고 진지한 학문탐구에 임해달라는 기성세대의 주문은 이들에겐 '세상물정 모르는 한가한 소리'일 뿐이다. 성균관대의 삼품제를 비롯, 각 대학에서 경쟁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졸업인증제 때문. 모 대학은 영어, 컴퓨터 등에 있어 기본 실력을 갖춘 학생들만 졸업시키겠다고 나서기도 했는데, 다른 대학 학생들도 하루라도 빨리 영어, 컴퓨터 공부에 나서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일찌감치 각종 고시준비를 시작한 학생들에게도 시험과목과 상관없는 책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다. 최근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서울대생(석·박사 포함)들의 지난 1년 동안 1인당 대출권수는 평균 14권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대출해간 책의 절반 이상이 주로 무협이나 판타지소설이었다.

ㅇ여대 허자은 씨는 "1학년초부터 영어학원은 기본이고, 컴퓨터 강좌도 많이 듣는다"며, "주위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복수전공을 선택해 모자라는 학점 보충하느라 방학 때 더 바쁘다"고 말했다. 한국교원대 기획실 이창노 계장은 "졸업인증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제도 적용 이전의 학번 학생들까지 자청해서 인증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조금이라도 취업할 때 도움이 될까 해서다.

학생들은 취업에 대한 대비를 위해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보다는 출석체크 잘 안 하고, 학점 잘 주는 것으로 알려진 강의만 찾아 듣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책 읽고 레포트 써내라고 하는 선생님의 강의는 기피대상으로 입소문에 오른다.

당연히 각 과마다 있는 학술동아리 활동도 미미하다. K대 수의과대 학생회장 전인탁 씨도 "학술동아리가 있지만 친목모임 수준"이라고 털어놓았다. "각종 학생회 모임에서도 자신의 전공과 관련되지 않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화는 극도로 기피된다"는 것이다. ㅅ대 조진호 씨가 동기들에게 책읽기를 통한 지적 호기심 충족, 지적 유희로서의 책읽기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자 "다른 재미있는 것이 널려 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렇게 허름한 과방에서 사회과학 관련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며 이념논쟁을 벌이던 이전 세대의 자취가 사라진 대학가에는 '취업'이 지상과제가 된지 오래다. 지난 4월 동의대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52.6%가 바람직한 대학의 기능이 '전문직업인 양성'이라고 답했듯, 이제 대학은 하나의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자조섞인 하소연이 교수들 사이에 공공연히 오가고 있다. 당장의 취업에 급급한 대학가 풍경과 대학생들의 천박한 책읽기 실태는 호서대의 철학과 폐과조치 등으로 대변되듯 인문학 등 국내 기초학문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이렇게 변화된 학생들의 학문 태도에 몇몇 교수들은 "제자들에게 애정을 갖기가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인문학 등 국내 기초학문의 위기에 기인하는 것이며, 대학 담장을 넘어선 신자유주의 경향이 그 뒷배경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책을 멀리하게 만드는 사회'도 문제다

이러한 가운데 문화개혁 시민연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한국도서관협회,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8개 단체가 참여한 '도서관 콘텐츠 확충과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본부'가 지난 6월 2일 공식 출범했다. 운동본부는 대학생을 비롯한 사회 전 성원들이 책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은 사회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국내에 공공 도서관 400여 개, 대학 도서관 400여 개, 학교 도서관 8000여 개가 있지만, 공공도서관의 책 구입비로 배정된 1년 정부 예산(2000년 50억 원)을 모두 합쳐도 미국 하버드 대학 도서관 예산의 20%에도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방 사립대의 경우 대학도서관이 외국의 학급문고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 등에 진정한 양서를 확충하고 시설이나 도서관 자체의 사회적 기능 강화를 위한 예산 확보를 정부에 요청하는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운동본부 노최영숙 국장은 "사실 대학생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의 책읽기 문화는 총체적 문제를 안고 있다"며 "부모의 독서습관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이어지게 마련인데 이들이 성장해서 부모가 됐을 때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노최 국장은 말한다. ㄱ대에 출강하고 있다는 그는 매주 적어도 한 편 이상의 단편 등을 보고 레포트를 써서 내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책읽기 자체를 무척 고통스러워하던 학생들이 차차 독서의 즐거움을 알아가더라는 것이다.

이후출판사 정철수 씨도 "각 대학의 몇몇 강의는 수많은 참고문헌 읽히기로 악명이 높지만 매번 계단까지 수강생이 가득 차는 성황이며, 일반 사회교육 단체·기관의 다소 학술적인 강좌에 대학생들의 발길은 여전히 줄을 잇고 있다"며 그렇게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말했다. 전반적인 대학생들의 독서수준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변증법철학이나 정치경제 등에서 여성학이나 영상관련 강의 등으로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진보의 '내용'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는 분석했다. "책을 멀리하는 학생이라도 교수들이 그에 맞게 교과교재를 개발하고 책 읽고 사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이끄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쉽다"고 말한다. "실제로 아무리 진보적인 내용의 강의라 하더라도 매년 동일한 방식과 내용으로 계속된다면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은 취재 과정 중에 느낀 암담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치매에 걸리고 내부로부터 허물어져 '반드시' 망한다. 즐거운 치매에 걸린 사회의 말할 수 없는 자기 천박화와 지성의 사막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이다"라는 도정일 교수(경희대·운동본부 공동대표)의 말이 그래서 더욱 공감되었다.

출판업자들의 고민과 활로

"인문학 위기, 참신한 기획으로 돌파할 터"

한때 40∼50곳 되던 서울시내 사회과학서점은 이제 6∼7곳으로 줄었다. 사회과학의 퇴조와 함께 찾아온 인문학 시대. "90년대는 인문학의 중요성과 아울러 사상적 맹아들을 추적하는 기초학문의 토대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기"라고 도서출판 한길사는 진단했다. 그래서 96년부터 야심차게 기획·출판되기 시작한 것이 동·서양 고전 명저 시리즈인 '한길 그레이트북스'. 상세한 해설자료를 첨부하여 '사상의 대중화'에 최선을 다했다고 출판사측은 나름대로 자부했으나 50권을 돌파한 올해 5월 현재 각 권 평균 2400부라는 예상외의 저조한 판매부수에 당황하고 있다.

주위에서는 "그것이 인문학 출판계의 현실"이라며 "IMF를 전후한 시점부터 출판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예전에는 대중성을 기준으로 판매예상에 따라 3000부, 2000부 기준으로 초판을 발행했으나 이제 각각 1000권씩 줄었다. 일단 700권만 찍어내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한길사 이승우 차장은 "소설책이야 열흘이면 만들 수 있지만 인문학 관련 책들은 번역 외의 교정 및 내용 재검토 등 편집작업만 5∼6개월씩 걸리고, 종이질 등도 고급화해야 해서 투자비용이 더 드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런 책을 1년 내내 걸려 대개 1000부 정도를 팔고 있는 것이다.

한길사 측은 출판사 이름을 걸고 좋은 책을 출판한다는 고집으로 『로마인이야기』나 『혼불』 같은 베스트셀러에서 남은 이윤으로 그레이트북스 출판작업에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목표치인 200종 300권을 출판사 자체의 재정만으로 완간하기는 버거워 대기업에 지원을 요청해봤지만 그들은 대개 당장의 광고효과가 있는 문화공연 쪽에만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문학 출판업자들은 '도서관 콘텐츠확충과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본부'가 벌이는 공공도서관 양서 확충 등을 위한 예산 확대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어느 정도의 현실 개선효과가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현재 각 도서관마다 예산 부족으로 출판사에 도서기증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오는 실정이지만,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쪽은 출판사이다. 예산이 확대돼 1개 도서관이 1권씩이라도 책을 사준다면 초판이 소화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관련서적들이 대부분 고가라서 개개인이 소유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기회에 도서관 직원과 출판업자들의 담합으로 그나마의 예산이 독서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책들로 채워지는 관행까지 바로잡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 출판업자들은 변화하는 독자들의 취향과 기호를 따라잡으려 나름의 대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5만부 이상 팔리며 항간에 체게바라 열풍을 불러온 『체게바라평전』이나『오래된 미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같이 불황 속에서도 뜻밖의 판매호조를 보인 사례도 있어 기획과 사전 시장 분석에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다.

돌베개 한철희 사장(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은 "생태나 동양철학 등 분야별로 소수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독자층의 한 특징"이라고 분석하며, "그들의 관심영역의 지평을 열어주면서 장서 욕구를 유발하도록 기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각적인 안목이 높아짐에 따라 컬러 도판 사용 등 전반적으로 고급화되는 경향인데 수요층이 소수라 어쩔 수 없이 비싼 가격을 감당해야 한다. 실천문학사 이순화 씨는 "현대인들은 자신과 타인·사회 간 괴리감을 느끼고 계속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심리적 불안상태를 보이고 있는 듯 하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출판기획은 "삶의 질이나 내면의 욕구 해소에 관심을 갖는 독자층의 요구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출판사측은 또한 "출판시장도 점차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 위주로 가고 있지만 소규모 출판사들도 참신한 기획으로 끼어들 틈새는 적지 않다"며 게릴라식 대응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입장이다.

인터넷매체의 비중은 높아졌지만 그 곳에는 대개 가벼운 정보나 저작권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싸구려 저작물만 넘친다. 따라서 인터넷을 비롯한 사회 문화계 전반을 풍성한 콘텐츠로 채워내는 기초적 토대는 여전히 인문학 출판계의 몫으로 남겨지고 있다는 문화적 사명감을 밝히는 그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독자나 기업, 정부 가운데 어느 누구도 확실한 뒷심이 되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그들은 암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혜영 본지 객원기자
2001/07/01 00:00 2001/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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