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병이 2300명을 학살하고 있다
2001/2001년 07월 :
2001/07/01 00:00
경북 칠곡 민간인 학살 기록한 미 제1기갑사단 보고자료
최근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 관련 보고자료가 계속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1960년 당시 제4대국회의 양민학살특위 활동을 소개하며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충격적 보고를 터뜨리기도 했다. 51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아물지 않는 우리 안의 상흔.『참여사회』는 첫 번째 증언채록으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벌어진 칠곡의 민간인학살을 다룬다. 이런 노력으로 진정한 의미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해본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전후 제주, 거창, 노근리 등지에서 발생한 국군과 경찰, 미군에 의한 집단학살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대규모의 학살은 1950년 7월 초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을 향해오던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보도연맹원, 혹은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학살이다(대전형무소의 좌익 미결수, 예비검속자들 학살 사건은 작년에 이미 알려진 바 있지만). 전황이 더욱 불리해진 7월 말∼8월 중순 무렵 들어서는 사상범,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마구잡이 학살이 진행됐다. 여기서는 최근 『부산일보』의 김기진 기자가 필자에게 전달한 대구주둔 미 제1기갑사단의 보고자료를 통해 대구 근교에서 발생한 학살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구지역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이 발생한 직후 대구는 거의 무법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경찰들이 각 동네마다 돌면서 그 동안 경찰서에 보관 중이던 주민들의 신원확인 자료를 토대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은 물론, 시위에 가담한 경력이 있는 사람, 그 가족 친척까지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4·19 직후 피학살자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족회 조사부장이었던 이복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거의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끌려간 사람들은 가창, 월배, 경산 코발트 광산, 본리동, 성서 등지에서 학살되었다. 그런데 최근 비밀해제된 자료를 보면 대구 북쪽 8마일 정도 지역에서 한국 헌병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국군 헌병대
이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950년 8월 10일 오후 3시에서 3시 반경에 순찰중 골짜기에서 큰 총성이 들려는데 가까이 가보니 한국의 헌병들이 2300명의 한국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학살자 중에서는 여성과 12, 3세 정도의 소녀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전하는 학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들은 20명 정도 일렬로 서 있었다. 군인들은 피의자 정면에 서 있었고, 주변에는 카빈으로 무장한 다른 군인들이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정면의 군인들이 총을 피의자 머리에 대고 쏘았다. 한번에 죽지 않은 경우 수 차례 발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살 후 3시간이 지나고서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골짜기의 시체 더미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체더미로부터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경우도 발견되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은 사람들은 뒤편에 서서 사슬로 손이 단단히 묶인 채 있었다. 죄수들은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는 울음을 뱉어냈다. 헌병들은 대단히 잔인했다. 총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발로 차기도 했다. 학살을 명령한 군인은 이 죄수들은 스파이 행동을 했다고 말했는데, 다른 정보는 없다. 시체는 제대로 묻히지 않았으며, 오물이나 나무 잔가지에 반쯤 덮여 있다."
미군의 암묵적 동의 잇따라
미군 측은 분명히 한국 헌병이 자행한 학살을 방관, 혹은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자세하게 보고하는지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 지역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갈 경우 남겨진 모든 증거가 한국군이 아닌 미군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시체들의 옷이 벗겨 있어서 희생자들이 민간인인지 북한군 요원들인지 판별하기는 어렵게 될지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보고서의 다른 면에는 헬멧에 흰줄이 있는 군인들이라고 밝혀놓아 이들은 분명 대한민국 헌병임을 알 수 있다. 학살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나 예비검속자 학살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동일한 명령권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대전에서 그러하였듯이 미군 측은 학살의 전 과정에 입회했고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자는 4·19 직후 대구 『매일신문』에서 연재한 대구부근의 학살 증언 중에서 이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추정되는 자료를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칠곡군 지천면 신동고개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이었다. 기록은 당시 동네 이장이던 구자승 씨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의 증언은 음력 6월 27일 3시 경 신동 고개의 골짜기에서 학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미국 측의 보고서에 나온 8월 10일이며 시간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증언자는 약 500명 가량의 사람들이 20대 이상의 트럭에 실려와 이곳에서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산에서 기어 내려와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8월 10일 경은 이 지역 주민들이 피난을 가던 시점이었다. 주민들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피난을 갔는데, 국군이 북상을 하면서 동네에 돌아와 보니 개천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두 지역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9월 말 이전까지 수습했는데, 그 중 동국대학교 배지를 단 학생과 여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시체의 상당수는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일부는 흰 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대구와 군산에서 유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몇 명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사상범에 대한 무차별 학살 추정
증언을 종합해 보면 칠곡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인근 지역주민들은 아니며 대구 혹은 인근의 대도시에서 실려온 사람들이 분명하다. 지난 해 산청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학살인데, 복장이 양복이 많았고 학생들, 그리고 젊은 여학생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대구 혹은 여타 대도시 지역의 예비검속자, 혹은 보도연맹원들일 가능성이 많다. 특히 대구지역의 피학살자들이 주로 월배, 가창, 경산 등지에서 학살되었으며 신동고개에 관한 증언들이 드물기 때문에 피학살자들은 대구가 아닌 지역의 사람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8월 10일 경이면 아군이 인민군측에 계속 밀리면서 남하하던 시점이고 대한민국과 이승만정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도연맹원이나 예비검속자, 사상범 등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속과 학살이 자행되었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증언자들은 두 곳의 시체 더미 중 한 곳은 1960년 당시 이미 도로가 개설되어 자취가 없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나머지 한 곳도 지금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 지역의 학살 사건은 지역주민의 증언과 미국 측의 문건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에 차후에 지점을 확인한 다음 발굴작업과 함께 사망자의 신원을 밝히는 과정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감추어진 역사가 이제 하나씩 들추어지고 있다. 장차 땅속에 50년 동안 묻혀 있었던 유골들이 발굴되고, 옷자락, 배지, 명찰 등의 조그만 단서라도 발견된다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이 어디에서 와서 왜 죽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유가족이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국군 유해발굴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 유해발굴 작업도 빨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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