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16일 문경에서도 300명 학살
2001/2001년 07월 :
2001/07/01 00:00
최초 발굴 - 51년만에 말문 연 한 보도연맹원의 증언
이승만정부 시절 좌익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 당시 스물한 살의 나이로 보도연맹원으로 참여했던 문경 출신의 서모 씨. 그가 직접 경험한 학살을 51년 만에 『참여사회』에 털어놓았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민간인학살진상규명에 도움을 주고싶어 육성고백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증언자의 사정상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한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결성된다. 그 전해인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됨으로써 좌익의 합법적 공간이 사라지게 되었고 따라서 좌익은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으로 무장투쟁을 하던가 지하로 숨어 생활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렸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이승만정부는 좌익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섭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오제도 같은 반공검사들이 주도한 이 단체에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전국에서 33만 여명이 가입했다.
예비검속 후 이동시켜 집단학살
올해 72세의 서모 씨. 그는 51년전 고향인 경북 문경 마성면에서 있었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았다. 서씨는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하려던 국대안(국립대학설립방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하다 2년간 옥살이를 하고 1950년 5월 20일경 보석으로 석방됐다. 출소하자마자 마성면 지서는 그를 의무적으로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켰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보도연맹원은 해방공간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그 후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받거나 훈방된 사람들"이라며 "일제시대부터 소작운동을 하던 순수한 농민들도 많았다"고 전한다. 그의 선친도 마을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자작농이었고 소작문제로 감옥을 몇 번 왔다갔다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고 한다.
1950년 7월, 군은 각 지역 경찰들에게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도록 했다. 소위 불법행동을 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구금하던 '예비검속'의 일종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모처로 데려가 학살을 했다.
철사에 친친 감긴 채로 학살당해
1950년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서씨는 논에서 일하다 말고 마성면 지서로 모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창 모를 심고 있었어. 아마 1950년 7월 16일일 거야. 왜 오라는 건지도 모르고 갔지. 집에서 1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말이야."
오후 4시쯤 마성면에 모인 보도연맹원은 40명, 그 중 그가 살던 마을인 금곡리(현 외어 3리) 주민은 9명으로 모인 사람 중에 가장 많았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 지서 주임은 갑자기 그들에게 다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단, 그중 지도급의 3∼4명은 붙잡아 뒀다. 거기에 서씨의 선친도 포함됐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아버지를 쳐다봤어. 그랬더니 아버지가 눈짓으로 얼른 가라는 거야. 내심 걸렸지만 여하튼 집으로 왔어. 그런데 그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거였지." 어느새 서씨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다.
집으로 되돌아 온 후 저녁을 먹고 있던 서씨에게 다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또 한번 지서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지금 가면 죽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단다. 그 길로 아프다며 약을 지으러 간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는 급히 몸을 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밥을 먹다말고 갔지. 한 7시쯤 됐어. 지금 문경시 경찰서에서 트럭을 보내 각 지서에 모아놓은 사람들을 실어갔지. 그 날 300명이나 되는 보도연맹원을 두 패로 나눠 죽였어. 문경의 동부 사람들은 호서남면(현 점촌동) 유곡리 계곡에서 죽였고, 서부 사람들은 농암면 산꼭대기 몽우리 재에서 죽였지. 아버지는 동부쪽 사람이라 유곡리에서 죽었지."
1950년 7월 16일 밤, 경찰은 문경시 보도연맹원 300명을 학살하고 모두 후퇴했다. 다음날 1시까지 이어진 행정공백. 오후가 되자 인민군 15사단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퇴각하는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마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나선 것은 25일, 인민군 15사단이 완전히 문경을 장악한 시점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선친의 시신을 찾아갔어.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흙을 살짝 덮었더라고. 2cm정도로 얕게 엉성하게 덮었는데 파리가 얼마나 들끓던지…. 게다가 농사짓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름 베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하겠더라고."
유족들이 시신을 찾았다 싶어도 다리를 잡아끌면 시체더미에 눌려 다리만 쑥 빠져나왔다. 어떤 사람은 팔다리 두개만 건진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다행히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목은 굵은 철사로 친친 감겨 있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해줬어. 밤 12시쯤 차에서 내리게 한 후 100m 이상 걸어갔는데 모두 철사로 묶어 끌고 갔대. 어둔 밤길에 개처럼 끌려가 총살당한 거야."
3대에 걸친 빨갱이 멍에
그후 그의 인생은 이 땅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힌 사람이 살기가 얼마나 팍팍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삶 그 자체였다. 국군의 반격이 있던 9월 22일까지 그는 문경시 마성면 민주청년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곧 국군이 올라왔고 그는 또다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문경시와 충청북도 경계에 있는 한 산에 빨치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시점에서 그는 체력의 한계로 산에 오르지 못하고 인근 외가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그는 죽은 듯이 3년을 살았단다. 1953년, 그는 자수를 했다. 그러나 자수 후의 삶 또한 고통이었다. 그는 그후 도망쳐 대구에서 모 대학 농과대로 들어갔다. 학교 졸업 후 그는 좌익경력으로 군대도 못 가고 직장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로 출신 대학의 직원이 된 서씨. 거기서 10년 동안 일한 후 다른 직장을 다니다 이제는 정년퇴임한 상태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다. 모두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이지만 예전엔 두 딸 때문에 괴롭던 때도 있었다. "첫째가 대학 다니면서 영어연수를 하러 나가고 싶다는데 여권이 안 나오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애먹었던 게 그때야. 내가 애 먹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자식까지 그 업보를 써야 한다니, 나 원…."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둘째딸에게서 문제가 생겼다. 대학에 간 딸은 학생운동을 했고 징역까지 살았다. 빨갱이라는 멍에를 3대에 걸쳐 써야 했던 그. 지금 그가 제일 알고 싶은 일은 당시 보도연맹원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도록 최종 명령한 인물이 누구냐는 것이다.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한 모 방송프로그램을 봤어. 그런데 누가 지령을 내렸는지 안 나오잖아. 이승만이나 김창룡(당시 육본 특무대)까지 잠깐 등장해도 과연 그들이 직접 명령했다는 증거는 없잖아. 답답해."
51년 만에 털어놓은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어두운 우리 현대사가 암흑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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