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불릿' 시나리오 쓰는 소설가 방현석
그가 만나자고 한 곳은 여의도의 한국전력 건물이었다. 한전 건물이라. 혹시 그는 한전과 무슨 관계가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인가? 낮에는 은행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썼던 시인 엘리어트처럼 낮에는 전신주에 올라가 전선을 다듬고 퇴근 후 덤덤한 얼굴로 소설을 쓰는 주경야독형 인물인가? 현실과 이상을 균형 있게 지켜나가는 무서운 인물이 아닐까 하면서 난 긴장상태로 갔다. 빌딩 8층으로 가니 한 영화사 사무실이었다. 한전에서 사무실 임대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전은 별걸로도 돈을 버는구나, 하면서 순간 안심이 되었다. 그도 나처럼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 현실과 이상 어느 한 쪽에만 발 담그는 것에도 힘겨워하는 사람일 것 같은 사실에 안도한 것이다.

그는 올해 말에 크랭크인할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슬로우 불릿’. 소설가 이대환 씨의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다룬 기존의 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와는 아주 다르게 되겠지요.”

그는 웃으면 덧니가 드러난다. 지금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렸을 적에는 저 덧니 때문에 ‘귀여운 녀석’이라는 말을 꽤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의리의 사나이 돌쇠’ 같은 모습도 보인다. 듣자니 학교시절 수많은 후배들로부터 좋은 형님으로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시절 총학생회장을 맡았단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고생스런 운동을.

왜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제가 속한 ‘베트남을 사랑하는 젊은 작가 모임’은 80년대 운동을 경험하고 90년대 운동의 전반적인 퇴조기에 사회가 썰물의 분위기를 보일 때 역사를 겸허한 태도로 성찰하자는 의도로 만들어졌지요. 활동방식도 무엇을 섣불리 단정하고 규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베트남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공부, 현지답사를 하면서 우리가 글 쓰는 사람들이니 우선은 베트남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돕는 글을 쓰는 일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베트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겸허하게 역사를 바라보자, 베트남과 한국 간의 고통스런 과거역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자는 것이지요.”

그가 베트남 전문인물로 유명해진 것은, 94년 ‘호치민의 나라 베트남을 가다’ 르포를 발표한 이후부터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 사과하는 자세는 보편적인 시각을 가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위해서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 동안 반쪽 사회에서 살아왔지 않습니까?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이지요. 베트남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은 그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는 ‘베트남을 사랑하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 동안 베트남 사회와의 연대와 교류를 위한 행사, 언어와 역사 공부, 답사와 단체기행 등 많은 일들을 해 왔다. 베트남에 다녀온 횟수만 하더라도 ‘여남은 번’은 된다. 두루 여러 곳을 다녔다. 다음 달 초에도 베트남에 간다. ‘젊은 작가모임’ 회원들뿐 아니라 비회원들도 함께 하는 이번 여행에서도 그는 베트남을 양껏 보여주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할 것이다. 베트남의 문화인들, 문학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기회도 마련한다. 하노이, 메콩 델타, 사이공…. 희디흰 아오자이 자락이 벌써 눈앞에 나부낀다.

베트남에 다녀온 사람들은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하게 된다고들 말하는데 사실 그런가요?

“그 속도는 이미 넘어섰지요. 지금은 가속도가 붙어서 아주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처음 갔을 때에는 자전거 속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전거가 도로의 주인이었죠. 그런데 작년에 가니 오토바이가 주인이더군요. 많은 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있었지요. 그런데 올해는 차량의 속도예요. 속도에 탄력이 붙어서 예정보다 훨씬 더 빨리 앞으로 나가고 있어요.”

한국이 베트남에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해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를 연관지어 얘기하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본과 우리와의 관계, 우리와 베트남과의 관계를 같은 등식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관계지요. 그런 관점에는 함정이 있다고 보는데 일본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지요. 베트남에 전쟁범죄 박물관이란 게 있습니다. 주로 미군들의 범죄에 관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인데 지난번에 가서 보니 없던 것이 생겨나 있고 주위가 더욱 깔끔해져 있더라고요. 일본인들이 평화의 돌을 가져다가 세워두면서 지원을 한 것이죠. 히로시마 원폭 당시의 돌이라고 합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인들이, 미국에 의해 일본의 평화가 유린당했듯이, 베트남인들도 자신들처럼 미국에 의해서 평화를 유린당했다며 베트남과 일본이 함께 세계 평화에의 의지를 드높이자는 취지로 그 돌을 가져다 놓았다고 하더군요.

가증스럽지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등식을 강조하겠다는 말이지요. 일본은 자신이 주도해서 수행했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한국은 미국을 따라서 (용병이란 표현은 자극적이니 피하는 게 좋겠지요) 미국이 준 무기를 들고 베트남 전쟁을 치른 것인데, 같은 위상에서 같은 성질로 볼 게 아니지요.

한국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사람을 가해하도록 강요당한, 이중의 피해를 입은 것이지요. 자신이 범죄의 주범인 일본과 우리는 질이 다른 것입니다. 일본과 우리가 같다는 것은 크나큰 역사적 혼동을 유발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 실제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일본이거든요.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명손실을 입은 나라로 5000명이 죽었어요.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복구를 완전히 마칠 수 있었던 일본이야말로 제1의 수혜자라 할 것입니다.”

이번 영화 <슬로우 불릿>은 ‘젊은 작가모임’의 그 동안 성과를 집대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영화 얘기를 더 해보자.

“이제까지 나온 할리우드의 베트남 영화는 베트남 쪽에 인격을 부여한다거나 발언권을 주는 일이 없었지요. 전쟁은 당사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싸움인데도 할리우드 영화는 한쪽이 배제된 상태라서 역동적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베트남인들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영혼, 이념을 가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이번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 그리고 전쟁에서 안과 밖에서 겪는 인간 고통을 다루고, 21세기에서 20세기를 조망한다는 겁니다. 20세기가 전쟁에 의해 일그러지고 파괴된 인간을 그려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스러지지 않고 통과해온 인간의 사랑과 삶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반레 시인이 ‘그림자처럼 사랑했고 바람처럼 살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오늘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았으니까요. 전쟁으로 베트남인 260만 명이 죽었습니다. 전 국민의 10퍼센트이지요.”

그는 진짜 베트남 게릴라들을 만나 인터뷰하였다.

“반레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 된 이유는 함께 싸우다가 죽어간 친구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전투 사이사이 시를 읊던 소년병은 자신의 꿈을 꽃피우는 대신 결국 전쟁터에서 죽음의 꽃으로 지고 말았지요. 베트남 전쟁에서도 존엄한 사랑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한 베트남 여전사를 만났어요. 1개 조로 한국군 1개 중대와 교전하여 승리한 조장이었지요. 당시 그는18세의 처녀였어요. 아직도 눈빛이 형형했지요. 총명한 여성이었지만 전쟁으로 교육의 기회나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놓치고 말았지요. 삶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그런 인생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는 폭격 없는 베트남에서 살게 되지 않았느냐고 대답하더군요.”

그는 현재 작업중에 있는 시나리오 내용을 잠시 소개해주었다.

“디엔이라는 친구는 ‘베트남 전은 본래적인 것과 본래적이지 않은 것과의 전쟁이었다. 모든 숭고한 것들은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다’고 했지요. 징기스칸이 결국 점령하지 못한 땅, 프랑스가 결국 그냥 물러간 땅, 간단하게 6개월을 잡고 대들었다가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미국이 물러간 땅, 그 땅은 본래대로 지금 베트남인들의 품안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한겨레21』의 양민학살 보도에 대해 불만을 가진 참전단체 일부가 신문사에 쳐들어가는 등의 사건이 있었지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현재 참전군인들의 수가 무려 32만 명입니다. 각자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겠지요. 회한을 느끼시는 분, 보람을 느끼시는 분, 그 중에는 병으로 고통 속에 지내는 분들도 있지요. 그들 중 일부가 의견을 표출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 가지 태도와 견해를 가진 분들이 있으니 그걸로 모두의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참전용사들이 ‘베트남에게 사과하자’는 등의 캠페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을 일리 있다고 보시는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요. 그분들의 오해도 있고 한국사회 내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참전의 책임을 개인한테로 돌릴 것은 아니지요. 특히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고통을 얘기할 때 그것이 참전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될 반성의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파월 장병으로 간 사람들은 여러 가지 동기와 형식으로 갔지요, 지원한 사람, 차출되어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간 사람, 인류평화 구현을 위한다고 간 사람, 먹고 살기 위해 간 사람,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베트남 전쟁터로 간 것이지요.”

조용조용하게 얘기하던 그가 목소리를 새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전 당시 어느 누구도 그 전쟁이 불의의 전쟁이고, 참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죠. 한국의 지성인들은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동시대와 그 사회의 진실에 대해 말해야 할 책무를 가진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래야만 했던 이들이 모두 침묵했습니다.

우리 모임에도 월남전 참전군이 몇 분 있는데 당시 대학생이었고, 장래 작가를 꿈꾸었던 그들조차 그 전쟁이 불의의 전쟁인지 아닌지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답니다. 온 세계가, 심지어는 당사자인 미국에서까지 그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우리는 자고 있었던 겁니다. 모두가 애국적 결단이고 조국의 경제발전과 자유우방을 수호하기 위한 용단이라고 치켜세웠을 뿐이었지요. 언로를 막고 있었던 당시의 사회적 압력도 대단했죠. 그런데 전쟁터에서 소총수로 목숨을 잃었던 군인들 대다수 평균학력이 중졸도 안 된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빽 없고 돈 없는 이들이 말단 소총수로 나갔던 겁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베트남에 갔다 겨우 살아나 왔는데 이제 와서 아무런 전제도 없이 욕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좀 밝은 분위기로 말을 돌리는 게 나을 듯 했다.

베트남에서 한국은 인기가 그야말로 ‘짱’이다. 그는 베트남인들이 안부를 묻는 바람에 알게 된 가수 이름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얼마 전 하노이에서 한국영화 <찜>이 상영되었는데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이란 제목으로) 그 옆 극장에서 상영된 할리우드 영화는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더라는 것이다.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들의 정서적인 분위기가 비슷해서인 것 같아요. 베트남인들은 우리와 이야기할 때 한국에 대한 감정을 물으면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간다’고 말해요. 공산주의 체제에 사는 사람들답게 한결같이 천편일률적인 대답을 하다가 조금 친하게 되면 ‘우리보다는 너희가 불쌍하다’고 말해요. 한국이 자존심 있고 살 만한 나라였더라면 베트남까지 싸우러 왔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기들보다 우리가 더 불쌍하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베트남 정부의 덕도 있어요.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미래를 위하여 나아가자는 것이 대 국민 프로그램이라서 누구한테 물어봐도 우리는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간다고 하니까요. ‘자유와 독립’이 호치민의 제일 어록인데 그들은 이미 그것을 얻었으니 더 이상 누구를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에 대한 사죄와 화해의 자세를 보이자는 움직임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가 비교적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대체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고 하고, 이미 사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지요. 진실에 대해서 억지로 눈감으려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다고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이 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만 잊는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바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85년 말에서 95년 중반까지 인천지역 노동자 협의회에서 일하며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작품으로 발표했다. 탄탄한 구성과 빛나는 문체로 쓰여진 그의 글을, 사람들은 80년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그의 최근작 『아름다운 저항』을 읽고 한 노동운동가는 ‘이 땅 노동자들의 삶터를 찾아 다리품을 팔며 투쟁의 역사를 가슴으로 적어낸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분명히 역사에 대한 예의의 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 그에게 역사는 반드시 한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어루만짐과 이해는 나아가 미국과 일본에게도 역사는 어떻게 앞으로 나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게 될 것이다.

그의 뒤로 보이는 여의도의 풍경이 문득 베트남의 녹색 들판으로 바뀌는 듯하다. 그가 서 있는 곳, 한국이든 베트남 어느 들판이든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곳, 바로 거기에서 건강하고 푸르른 초여름의 녹음이 솟아 나올 듯하다.
권은정 본지 편집위원
2001/06/01 00:00 2001/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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