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에서 의료 · 육아 · 교육까지
최근 중소단위 지방에서는 '협동'과 '조합원 자치'이념을 중심으로 생협운동이 활발하다. 이는 단순 매매를 넘어 주민자치 활동의 기본이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전국 생협운동의 현황과 전망을 소개하며 21세기 새로운 대안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세계에서 가장 큰 NGO가 국제협동조합연맹(이하 ICA)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 조합원 7억5000여 만 명을 거느린 ICA의 총회가 올해 10월 12일부터 17일까지 한국에서 열린다. ‘세계화시대에서의 협동과 평화’를 주제로 2000명이 넘는 각국의 협동조합 대표들이 서울 아셈컨벤션센터에 모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1963년 농협중앙회가 ICA에 준회원으로 가입한 뒤(1972년 정회원으로 인정) 여러 협동조합 전국조직들이 가입했다. 그러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전국연합회(이하 생협전국연합·co-op.or.kr)를 비롯한 국내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관련 단체들은 비용 등의 이유로 아직 가입하지 못한 상태. 국내 생협계의 열악한 현실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생협이라고 하면 흔히 유기농산물을 공동구매하는 소비자조직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생협은 생활 문제에 대해 공동의 목적과 필요를 느낀 생활인들이 ‘협동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조합원 단체로 실제 활동 범위와 내용은 매우 폭넓다. 일반적으로 지역생협, 단체생협, 대학생협, 직장생협 등으로 나뉘지만, 다루는 문제에 따라 의료생협, 교육생협, 공동육아협동조합 등의 형태로도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생협 조직은 1998년 말 현재 전국에 약 74개가 있으며, 7만1000여 명이 가입해 있다. 이들 조합에서 취급하는 사업액은 연간 385억 원. 아직 많은 생협들이 적자에 허덕이는 등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2000년에는 전해에 비해 다루는 물량이나 조합원 수가 30%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생협 관계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먹을거리에서 교육까지’ 활발한 자치활동

특히 지난 2년 간 한해 월 평균 188%의 성장률을 보인 21C생협연대(이하 21C연대·coop.co.kr) 직원들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인천, 서울 강서·양천, 경기 안산 등 경인지역 9개 생협의 연대체로 1997년 시작된 이곳은 ‘협동’과 ‘조합원 자치’의 원칙을 충실하게 살린 제도들을 뿌리내려 이 같은 성과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더 눈길이 간다.

다른 조합들이 대개 생산지-조합-조합원 순으로 유통단계를 거치는데 비해 이곳은 광주, 음성, 제주 등 3곳의 생산자조합에서 출하된 생산물이 시흥과 대전의 물류센터에 모였다가 조합을 거치지 않고 각 조합원들에게 곧바로 배달된다. 대신 조합원들이 내는 월 2만 원 가량의 회비로 조합 운영비를 충당한다. 21C연대 오항식 부장은 “조합원들이 회비를 낸다고 해도 유통단계를 줄인 만큼 훨씬 싼 가격으로 생산물을 공급받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평균 구매액이 다른 조합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 월 20만 원을 넘어섰고, 활발한 소비는 생산체계도 안정화해 전반적인 이윤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에서 올린 이윤을 필요한 조합에 적절하게 지원함으로써 이전처럼 개개 조합이 악전고투를 하다 무너질 우려도 없어졌다. 현재 6개의 신설 생협이 비회원으로 등록돼 있기도 한데, 차량 구입비 등 초기 투자비 부담 없이 20명 정도만 모이면 조합 설립이 가능해져 가입 문의도 더 잦아졌다.

‘조합원 자치’ 원칙을 살리기 위해 초기부터 활동해온 실무자들은 센터나 사무국으로 자리를 옮기고 9개 중 6개 조합은 조합원이 직접 조합을 운영하고 있다. 업무 부담을 줄여 생협 고유의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조합들을 지원하는 일에 21C연대가 중점을 둔 결과다.

자치운영에 자신감을 얻은 조합원들은 각종 소모임 활동도 하며 자치의 참맛을 한껏 즐기고 있다. 조합원들이 주로 주부들인지라 먹을거리 다음으로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각종 교육 관련 활동도 활발하다.

인천생협의 경우 생산자를 초청해 아이들과 함께 한과도 만들고, 주부 대상으로 박물관 모임이나 천연염색 등을 배우는 생태모임, 슬라이드 모임 등을 진행하고 있다. 생산지 견학을 자주 가고, 필요할 때는 일손 돕기에도 나서 생산자들과의 연대감을 다지고 있으며 봄철 오리 입식 행사나 가을걷이 때는 다 함께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서울 강서·양천생협에서는 조합원들끼리 산행을 가기도 하고 올 어린이날에는 160여 명이 모여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다. 21C연대 정찬율 차장은 “다양한 조합활동으로 조합원들의 삶이 더 풍요롭게 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가격 낮추기가 생협운동의 관건

단순히 안전한 먹을거리를 보장받기 위해 조합에 가입한 사람들도 생산자들과 자주 만나고 조합원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의 농업 현실과 유기농산물의 생태환경적 의미에 눈뜨게 된다는 점도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운동 차원에서라도 생협에 가입해 유기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게 무슨 운동이냐”는 비아냥도 돌아온다. 유기농산물의 값이 일반 농산물에 비해 평균 30% 정도 비싼 현실 탓에 생협 가입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항식 부장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 생협 운동의 관건”이라고 인정하며 “유기농산물 생산에는 높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지만 산지 직거래와 소비의 안정화를 통해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가격을 점차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직은 국내 생협 조합원들이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수가 늘어난다면 지역운동의 중요한 구심체 노릇도 기대할 수 있다. 한 예로 서울동북여성민우회 생협에서는 조합원들끼리 계란껍질, 말린 푸성귀 찌꺼기 등을 생산자에게 보내는 음식물 찌꺼기 퇴비만들기 운동을 벌이면서 점차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 결과 노원구의 아파트 2만2000세대가 참여할 정도로 호응을 얻음으로써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다양한 교육사업과 내실있는 조합원 자치의 경험을 통해 생협이 저력있는 지역활동가를 키워내는 훌륭한 교육장이 되고 있음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장종익 소장은 “생협을 농업, 농촌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다양한 생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자조 조직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지역 주민들 가운데 동일한 욕구를 지닌 사람들을 동참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고령화 시대에 따른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령자생협이 생겨 간호보험사업이나 간호사업 등을 활발히 펼쳐나가고 있다. 현재 열악한 육아, 노인간병 현실 등 공공서비스의 빈틈을 개개인이 값비싼 사설기관을 통해 메울 수밖에 없지만, 생협은 조합내의 다양한 인적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훨씬 낮은 비용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밖에 주택, 보험, 자동차, 여가 등 다양한 부문에 생협이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대부분의 국내 생협들은 재정 불안으로 살림살이를 안정시키는 데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조합원의 요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실무자들의 구상만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할 경우,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사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실정 때문에 생협의 전망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조금씩 갈린다. 한 관계자는 “현재 전체 생협 가운데 협동조합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생협은 20여 개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그만큼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운영의 어려움에 빠져 있는 생협들이 많다는 것이다. 1998년 말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제정되어 지난해까지 31개의 생협이 법인등록을 마쳤지만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협동조합 간 연대와 자조의 원칙에 따라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생협계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도 실무자들은 최근 광우병, 유전자조작식품 등 식탁에 대한 위협이 나날이 높아지는 상황이므로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들의 갈망은 매우 높다며 생협의 앞날을 낙관하고 있다. 생협운동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자본의 고리를 끊어내는 21세기 대안운동의 발상지가 될 것이라는 거시적인 전망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말이다.
한혜영 본지 객원기자
2001/06/01 00:00 2001/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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