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시를 쓰는 낙타
2001/2001년 02월 :
2001/02/01 00:00
시인 김진경
그와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안동의 한 서점에 들러 그의 시집을 찾았다(난 안동에서 며칠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최근에 낸 『슬픔의 힘』을 보고 싶었다. 창 밖으로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원은 그 시집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 시집이 오는 시간도 많이 걸리는구나 싶었다. 점원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다른 제목의 책은 있다면서 시집 코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점원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건 시집이 아닐 거예요. 값이 이렇게 비싼 걸 보면.”
시집은 여전히 비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든 시인은 가난하다는 생각이 내게는 있다. 아니 가난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특히 시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김진경 시인을 만나기로 한 날은 눈과 비와 얼음이 지층처럼 쌓이고 그 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모퉁이 작은 찻집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날이었다. 만약 시집이나 책에서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그의 쌍꺼풀진 큰 눈과 윤기 나는 약간 긴 머리가 아주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직접 만나보면 순한 눈빛에 아마 말문이 막힐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욱 순한 그의 어투. 그는 지난 15년간 해직 교사였다가 작년 3월에 복직이 되었다.
참 많은 것들이 변했을 터인데요?
“학교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어요. 특히 교과내용은 변한 게 없어요. 교육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교과서이거든요. 교과서 제도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국정교과서라는 게 일제 때 제도거든요. 이걸 뒤엎고 가르쳐라, 하면 길은 있어요. 현실은 지식정보화 사회로 가는데 그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교과서로 가르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지금의 내용은 학문권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거든요. 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궁극적으로 전수해야 할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 생활환경에 맞게끔 고쳐져야 하는 거지요. 요즘 아이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달라요. 지금 학교는 내부적으로 무너져내렸어요. 학교기능이 공동화되어 버린 것이지요. 시간제 보호감옥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교육적 기능은 아니에요. 그냥 친구 만나는 공간이지요.”
15년 간의 황야생활 후 돌아간 학교모습에 실망하지 않으셨나요? 그 세월과 맞바꾼 것이 고작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분노하지 않으셨나요?
“밖에서 이미 충분히 예상한 거였기 때문에 새삼 그렇진 않았어요. 난 사는 것이란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과정 자체를 얼마나 자기가 충만하게 보냈는가 그것이지, 결과적으로 뭘 이뤘는가, 그걸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해직기간 15년. 다른 이들에겐 굉장히 힘들어 보였을 것이지만, 사실 저한테는 그리 불행한 시기가 아니었어요. 80년대는 굉장히 충만한 시간이었지요. 한 인간이 사회를 체험하면서 어떤 것에 자기의 전부를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의 아내도 해직 교사였다. 지금은 복직이 되었지만. 그들 모두 해직당하고 겪었을 괴로움을 “그야 뭐,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라며 허허 순하게 웃어버린다. 그는 요즘 땅 일구는 재미에 계절 가는 줄 모른다. ‘그냥 걸어서’ 그에게로 온 그 땅은 하루에 두 번 들어가는 버스에서 내려 2킬로를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골마을이다. 화전민이 버리고 간 집터를 돋우어 불을 지피면 따스해지는 방도 한 칸 만들었다. 그 곳에 가면 그리 즐거울 수가 없단다.
“처음에는 왜 그리 좋은지 몰랐는데 일년 넘게 다녀보니 알게 되더라구요. 자연이 주는 맛도 있지만, 최소공간, 그러니까 가장 필요한 것만 있는 공간이라서 좋은 거예요. 난방도 장작으로 해요. 핸드폰도 안 터지는 곳이거든요. 그 곳에 가면 우리를 옥죄는 모든 것을 떠날 수 있어서 좋은 것이지요. 며칠 전에도 갔다 왔어요. 눈이 너무 와서 그냥 일찍 왔어요. 갇혀버리고 싶었지만 학교 일직이라서 올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특히 장작을 잘 팬다고 자랑했다. 이웃에 살던 일흔 넘은 할아버지께 수지침을 놓기도 하며 말벗이 되어드렸는데 얼마 전 돌아가셨단다. 그 노인은 그를 ‘김씨’ 라고 불러주었다.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 순간 난 김씨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요. 홀가분해지는 거지요. 최소 공간에 갇힌다는 게 시를 쓰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얻는 대신 잃어가고 있는 게 너무 많아요. 그 중 제일 중요한 자신을 잃어버리지요.”
‘시인과 음악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영감을 가진 이들이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말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시인. 얼마나 아름답고 시적인 말인가(당연히!) 그래서 시인 서정주가 죽었을 때 한 시대의 시 정신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훈장이 추서된 민족시인인가, 아니면 친일과 반민주 정권에 혼을 판 실망스런 존재인가?
그는 서정주의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꼭 생각해야 하나요? 서정주 시인 자체에 대해 정리하는 것은 간단하다고 보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런 극단적인 다른 평가가 나오는 우리 사회의 배경을 들여다보는 거지요. 보세요.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주류가 뭔데요, 가장 잘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이에요. 일제 때는 친일 하고 해방되어 미국의 힘이 세면 그 센 데 붙어서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주류잖아요. 그러니 서정주는 민족시인일 수밖에 없지요. 시인 서정주요? 언어세공에서 인간문화재 같은 존재다, 그거죠. 그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큰 시인이나 위대한 시인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 언어 세공에 상당히 뛰어난, 대단한 역량을 발휘한 것이지만 그 사람이 한 시인으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의 뛰어나다는 건 아니지요. 전 서정주 시인 하면 떠오르는 게 있어요. 한국전쟁 때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한 노인이 한 손에는 인공기, 다른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다가 군인이 들어왔는데 이 군인이 어느 쪽인지 몰라서 쩔쩔매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굉장히 인상 깊었지요. 서정주는 그런 수준의 사람인 거지요.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상당한 격동의 시기였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살아남는다는 것,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간절한 게 아니었을까요? 그럴 수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의 시는 우리 동양의 전통이나 불교·도교사상을 굉장히 왜곡시킨 부분이 있지요. 그런 측면에서는 얘기되어야 하는 게 많지요.
우리는 누구든지 시를 외우고 끄적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특히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한번쯤 시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시인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시란 것은 이런 것 같아요. 며칠 전 산에서 내려오는데 눈이 엄청 쌓였거든요. 오는 길 중간에 잣나무가 눈에 덮여 길을 막고 있었어요. 이거 어떻게 지나가야 하나, 비켜서 가나, 밑으로 기어서 가야 하나 막 고민을 하는데 잣나무가 자기 팔을 뚝 꺾어버리는 거예요. 굉장히 옹졸해져 있는 나한테 대담한 농담을 한번 던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던데요. 시란 그런 거지요. 자유로움과의 접목이죠.”
스스로를 부러뜨릴 줄 아는 지혜와 용기. 시인은 그것을 잣나무의 대담한 농담이라고 부른다. 그 정신을 닮아야 하는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고 그 시 정신을 일반인들에게 옮겨가도록 해야 할까?
“일반인들의 생각 속에 있는 시의 본질이란 게 이런 거지요. 시는 굉장히 욕심 없고 자유로운 자리에서 얘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시들은 자꾸 옹졸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이 자기 것을 너무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소규모 집단도 권력화되어 가고 있고… 자신을 던져버리고 대담하게 농담을 하는 이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서정주 같은 시인이 주류로 평가받는 사회니 사람들이 옹졸하게 사는 게 정상이죠. 옹졸한 데서는 창조적인 게 안나오지요. 그걸 전복시키는 자유로움 속에서야 창조력이 발휘되는 거지요.”
우리 앞에서 가장 대담한 농담을 던진 시인이 있었다면 누구일까요?
“허허, 한용운. ‘님의 침묵’도 대담한 농담인 거지요. 그런 역설이야말로 한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는 대담한 농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문학은 전반적으로 너무 옹졸해져서 현실의 농담을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가령 김대중 대통령이 서로 적대적이던 국가의 원수를 만나 포옹하는 건 얼마나 놀라운 세기의 농담입니까.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을 굉장히 자유롭게 뛰어넘어 보겠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어떤 문학작품도 그 정도의 농담을 뛰어넘는 게 없지요, 없어요.”
그는 시를 쓰면서 소설, 산문집, 동화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왕성한 작품활동이다. 충남 당진 출생인 그는 대전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그렇잖아요. 제 위로 형이 넷이었으니 어머니께선 나를 떼어보려고 학질약을 드셨지요. 키니네를 너무 먹어서 기절하시고 그랬대요. 제 출생의 비밀이지요, 하하하… 가난한데다가 사회재건에만 목소리를 돋우던 시절이었으니 예술적 자유란 굉장히 억압당했죠, 그런 욕구 자체를 사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든 시절이어서 글을 안 쓰려고 노력했지요, 굉장히.”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열망은 언제 터져 나온 것일까?
“대학 들어가서지요. 제가 서울사대 국어교육과를 나왔잖아요. 사람들이 제가 한 일에 선입견을 갖고 ‘문학과 교사, 일찍이 큰 뜻을 품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제가 성장한 환경에서 교사와 글쓰기는 두 가지 금기사항이었지요. 교사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무지무지하게 고생하시다 병환으로 돌아가셨어요. 넌 제발 선생 하지 마라고 하셨거든요. 6남1녀였는데 돈 버는 이는 큰형밖에 없었으니 돈 안 드는 대학을 가야 해서 사대를 간 것이고, 글쓰기는 당시 시대가 금지한 것이었고. 피하다가, 피하다가 한가운데로 아예 폭 빠진 거지요.”
그가 군제대를 하고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당시, 교사는 누구든지 과외나 학원교사를 자유로이 하는 등 교육환경은 실로 ‘가관’이었다. 그런 교육적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민중교육』지 사건은 상당한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아주 괘씸했을 거예요. 박정희 때부터 교사란 중요한 선거 있으면 가정방문 내보내고 했던 그런 대상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이것들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오니 너무 괘씸했겠지요. 그것도 농담이었지요. ‘교사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걸 완전히 뒤집은 거였으니까. 교육적으로 대담한 농담을 한 것이었지요.”
그 농담의 대가로 그는 1년 넘게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동안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교육내용 교과위원장, 참교육실천위원회 등을 맡아 활동했다. 요즘은 평조합원이다.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두루 공평하게 대해주는 선생님’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교행정이나 그 무엇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는데도 교장선생님은 그를 ‘두려워’한다. 이 거물급 선생님께서 너무 먼 거리를 통근하는 게 아닌지 하면서 걱정도 해준단다. 그의 침묵은 무슨 의미일까?
“모르지요. 교육과 관련한 농담을 또 하게 될지, 하하하… 지금 재벌이 대담한 기획을 가지고 교육시장에 접근하고 있어요. 그 기획이 성공적으로 된다면 공교육이 날아가요. 에스케이가 거액을 들여 이미 기획단계를 마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재벌은 교육현장을 거대시장으로 보고 있거든요. 이만한 시장이 없는 거지요. 우리의 교육은 국가중심 교육인데 국가 힘이 약해지면, 받쳐주는 힘이 없으니 어느 순간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거거든요. 지금 공교육이 워낙 취약해져 있으니 바깥에서 큰 힘으로 밀어 붙이면 깨져요. 충분히 깨지는 거지요. 앞으로의 전망요? 국가 중심적인 공교육의 전근대적인 모순에다가 새로운 거대자본이 교육을 장악하는 탈근대적인 모순이 겹쳐서 심각하게 갈 것 같거든요. 그걸 넘어서려면 더 힘이 들겠지요. 그런 점에서는 교육적 전망이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공교육도 버티기가 힘들거든요. 내용적으로는 완전히 공동화되어 있으면서 형식은 유지시켜 가야 하니까요. 사실상 어떤 변화도 어려운 이런 상태가 그냥 지속되기보다는 외부의 변수로 한번 깨져 보는 게 오히려 낫다고 봐요. 문제가 드러나서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거지요.”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 교육은 시민사회와 소통이 안 되어 왔거든요. 그게 내용적 공동화를 가져온 것이기도 한 것이고. 그게 한계가 되어 취약해져 버린 거지요, 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공교육의 모델들을 찾아야 해요. 지역에 기반한, 지역학교운동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거지요. 대안학교는 더 이상 대안이 안 된다는 게 드러났어요. 고급 입시학교로 가버린 곳도 있고, 거창 학교 같은 것이 그렇잖아요. 아니면 프로그램이 한계에 부딪혀 이도 저도 아니게 된 학교들이지요. 최근에 남한산성 부근의 한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했는데 전교조 학부모 90명이 함께 가서 애들 전학을 시키고 교장과 담판을 했지요. 우리와 함께 의논해서 교육정책부터 다시 짜자, 해서 시작한 예가 있거든요. 그런 형태가 커지면서 지자체와 함께 성장하면 지역학교가 되는 거지요.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는 학교가 만들어져야 해요.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의 출현은 권력지향적 운동과 다른 모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여론형성의 힘을 상당히 만들어냈고. 앞으로는 대안적 모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대중은 저것이 옳다고 해서 움직이지는 않아요. 저렇게 될 수 있구나, 하는 데서 움직이는 거지요.”
‘자기 마음의 상처를 예민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시를 쓴다’고 시인 김진경은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상처가 시대의 상처가 되어버린, 사막을 걸어온 낙타이다. 모래바람에도 고개 숙이지 않는 낙타. 그는 신기루 따위는 믿지 않는다. 끝없는 모랫길을 오직 크고 넓은 발로 꾹꾹 밟으며 한결같은 보폭으로 걸어온 이. 그 낙타의 걸음걸음에 시가 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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