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은 개인 사정으로 집필하지 못했고, 새로운 필자가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 호엔 명동성당에서 13일간 국가보안법 철폐와 올바른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을 위해 노상 단식농성을 벌인 이창조 『인권하루소식』편집장이 MBC 연보흠 기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집자 주

보흠에게

연말 망년회 때 참석을 못한 탓에 얼굴도 못 본 채 해를 넘겨 무척 섭섭하구나. 너도 알다시피 난 그 다음날부터 열사흘 간 명동성당 들머리를 지켰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가인권위원회법, 부패방지법의 제정 등 3대 개혁입법의 해결을 촉구하는 인권단체 단식농성단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이것만은 해결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지만 지난 3년 간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고, 결국 우리는 그렇게 길바닥에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단다.

국가보안법이야 네가 나보다 먼저 잘 알고 있던 문제였기에 두말 할 필요가 없을 테고,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서 우리가 그토록 의지를 보이는 이유를 지금은 이해하는지 모르겠구나. 2년 전쯤이었던가? 기자와 활동가라는 입장에서 인권위원회에 대해 의견을 나눈 일이 생각난다. 그즈음 법무부의 논리가 맹위(?)를 떨칠 때였고, 너 또한 인권위원회가 민간기구여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에는 법무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인권위원회가 국가기구여야 함을 부인하지 못할 만큼 법무부 논리의 허구성은 속속들이 드러났고, 우리는 실효성과 독립성이 확보된 인권위원회의 설치를 위해 지금까지 애쓰고 있단다. 하지만 대통령과 정치권이 여전히 검찰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주객전도의 현실이다 보니 싸움은 계속 힘겹게 이어지고 있구나.

단식농성 기간에 한 기자를 만났는데, 네 후배라고 소개하더구나. 그런데 어쩜, 넌 마른 몸으로 밥까지 굶고 있는 내가 걱정도 안 되든? 명동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얼굴 한번 안 비쳤냐? 실은 너 개인에 대한 섭섭함보다도 너희 회사, 그리고 주요 언론매체들에게 느낀 섭섭함이 더 컸단다. 이른바 메이저 신문이라고 하는 ‘조중동’ 가운데 『동아일보』를 제외하곤 코빼기도 안 비쳤고, 방송사도 농성 마지막 날에 가까워서야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타났다. 그렇다고 주요 뉴스로 보도된 것도 아니지만.

난 농성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들이 인권개혁 문제에 이처럼 무관심한 것에 또 한번 분노와 절망적인 심정을 느꼈다. 항상 새롭고 이색적이고 쇼킹한 사안에 먼저 시선을 돌리는 언론사의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실로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인권개혁법안이 그렇게 오래되고 식상한(?) 문제가 된 것엔, 벌써 몇 년 전에 처리됐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된 것엔 이러한 언론의 책임도 크지 않을까? 인권단체의 활동가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싶겠지만, 기실 인권의 신장을 위해서라면 언론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달려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라고까지 말한다면 너무 일방적인 주장일까?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전망과 진로를 이야기하던 때가 생각난다. 나보다 훨씬 치열했고, 또 선진적이었던 너는 아마 일정한 체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마 전 이름 있는 한 노동운동가가 이런 글을 썼다. “수배자로서 도망다니던 시절, 투신자살한 한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 나의 80년대를 지배했다”고. 그래, 난 80년대의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한 탓에 그 선배운동가만큼의 부채의식을 느껴보진 못했지만, 내 나름의 부채의식을 소중히 간직하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누군가 부채는 ‘털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난 거꾸로 생각한단다. ‘부채의식’이야말로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난 네가 유명한, 능력있는 언론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항상 뒤를 돌아볼 줄 알고, 사회 구석구석의 아픈 자리를 찾아다닐 줄 아는 그런 언론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대학시절 함께 어깨를 걸었던 친구에게 내가 전하고 싶은 새해 덕담이다.

2000년 1월 15일 이창조 보냄
이창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인권하루소식』 편집장
2001/02/01 00:00 2001/02/01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4053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