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에게 보내는 최후통첩
2001년 새해는 3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처리를 주장하는 인권활동가들의 노상단식농성에서부터 시작됐다. 21세기의 첫 새벽을 깨운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국가인권위원회법·부패방지법의 제정”이라는 구호였다. 박해받던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고, 그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된 나라의 신년 풍경치고는 참으로 어색하고 딱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새 천년의 진정한 시작은 3대 개혁입법으로부터

이들 3대 입법과제가 제기하는 ‘인권유린과 부정부패 문제’는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통해 줄곧 이어져온 해묵은 과제라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남북정상회담에서 국가 최고책임자들끼리 서로를 ‘고무·찬양’하게 된 오늘에 와서도 최소한의 개정조차 없이 실정법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 수십년 간의 경찰국가체제 아래서 과잉 팽창해온 안기부·검찰·경찰 등 공안·사정기구의 반인권적 행태는 또 어떤가? 87년 6월항쟁을 통해 독재권력은 무너졌지만 이들 기구들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의연히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 독재체제와 쌍두마차를 이루는 관치 재벌경제는 87년 군부독재의 붕괴만큼이나 극적으로 97년 무너져 내렸다. 이 급격한 경제위기의 근원이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구조적 병폐 때문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속 시원한 개선책은 제시되지 않았고 정치인, 재벌 등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해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20세기 현대사를 관통해 최근까지 달려온 이 거대한 드라마가 말해주는 바는 의외로 단순하다. 인권이 무시되고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성장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카지노에서 대박을 노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 국민 개개인의 민주적 권리가 보장되고, 성실한 노력이 정당한 보상을 얻는 것이야말로 사회발전의 기본전제이며 이러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철칙을 확고히 관철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3대 입법이 개혁의 출발점이자 그 성공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허송세월로 보낸 IMF 3년

김대중정부가 야당시절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대표적 공약사항이자 집권하자마자 국민 앞에 굳게 약속한 3대 개혁입법은 3∼5년이 지나는 동안 빛 바랜 휴짓조각으로 전락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IMF는 위기이자 곧 기회였다. IMF 경제위기 사태는 정권교체의 배경이 되었고, 우리 모두는 하나의 전환적 계기를 맞이했다. 개혁이 생존이라는 대통령의 선언에 공감했고, 국민들 속에서 고통분담의 합의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3대 입법은 물론 다른 총체적 개혁을 밀고 갈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정부는 국민적 합의로 주어진 개혁의 칼을 사용하는 데 주저했다. 소수정권의 한계였다는 변명은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취한 그간의 태도들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집권 초반기부터 DJ정부는 ‘소수파 콤플렉스’라고 불릴 만큼 정치공학적 다수 확보에 집착했고, 기득권 세력과의 어설픈 타협에 매몰되었다. 개혁의지가 불투명한 타협적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의 구성, 5·6공과의 대타협에 다름 아닌 ‘동진정책’, 새마을운동본부를 축으로 하는 제2건국위원회 구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눈치보기의 정점은 특검제를 포기하고 정치검찰의 기득권과 타협한 것이다. 대전 법조비리, 옷로비 사건, 파업유도 사건 등 굵직한 검찰개혁의 현안이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DJ정부는 지난 3년간 특검제는 물론 어떠한 검찰 개혁조치도 단행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자신의 기득권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냈다. 그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패방지법, 인권위원회법 등 검찰권 남용을 견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3대 입법이 아직까지 통과되지 않고 지루한 당정협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DJ 스스로 공약한 3대 입법에 대해 법무부가 노골적으로 뒤집고 방해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는 걸 보면 법무부를 지휘하는 것인지 법무부(검찰)의 볼모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내리쳐야 한다”던 중국의 문인 루쉰의 질타가 되새겨지는 대목이다.

DJ 취임 3주기, 개혁에 대한 태도 분명히 해야

지난해 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러 출국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개혁 추진을 위한 당정쇄신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당정개편을 보면 집권 초반 ‘보신적 개혁’의 중요한 원인제공자의 하나로 지목되어온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당대표가 되었다. 게다가 자민련과의 공조 회복을 위한 의원 꿔주기에 이르러서는 DJ가 약속했던 당정개편의 실체가 한층 더 분명해졌다. 즉 집권 초기의 보신주의로 회귀한 것이다.

야당의 반발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DJ 대통령은 ‘강한 정부’를 기조로 하는 연두기자회견을 발표했다. 이 ‘강한 정부’가 강력한 개혁추진력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들이다. 실제로 4대 개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경기부양으로 가겠다는 구상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사실상 구조조정 포기 의사’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3대 입법의 진행상황을 보면 한층 확연해진다. 연두회견을 통해 대통령은 3대 입법은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재차 다짐하기는 했다. 그러나 공동정부를 구성한 자민련이 곧바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당론을 밝힘으로써 ‘공조’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어찌되었건, 대통령의 회견내용에 따라 최근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부패방지법과 인권법만은 적어도 2월 내에 처리한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국보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약속 말고는 뚜렷한 일정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여당이 조속히 처리한다는 반부패기본법안은 특별검사제, 떡값 처벌 기준(공직자윤리규정), 내부고발자 신변보장 수단 같은 핵심이 빠져 있는 알맹이 없는 법안이어서 조속한 처리 자체가 개혁적 의미를 가지기는 힘든 형편이다. 다만 여당 내에서 일부 개혁적 의원들이 시민단체안과 근접한 인권위원회법의 성안에 적극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부패방지법, 국가보안법의 당론 재확정 과정에서도 그 같은 역량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나 부패방지법의 경우, 넘어야 할 산은 검찰이나 여당만이 아니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의 개정에 반대하고 있고, 부패방지법에 대해서도 특검제 도입 이외의 세부적인 대책에 대해서는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당의 보수적 색채를 강조하는 방편으로 반민주 악법의 온존을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공당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니다.

3대 입법운동을 주도해온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인권기구공동대책위 등의 시민사회단체 연대기구들은 2월을 3대 입법 쟁취의 최종기점으로 삼아 설 이후 여야 및 정부에게 이들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집중적인 국민 캠페인과 시국선언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다가오는 대통령 취임 3주기는 이 운동의 정점이 될 것이며, 김대중정부 개혁에 대한 시민사회세력의 총체적 판단을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
2001/02/01 00:00 2001/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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