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잘되는 게 있어 한번만 웃어 봤으면 …
늦은 밤, 하루 일과를 끝내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사람들. 연인끼리 사랑을 속삭이거나 핸드폰 통화에 바쁜 이들, 혹은 서리 낀 차창에 머리를 박으며 깊은 잠에 빠진 사람, 내일자 조간을 뒤적이거나 물끄러미 창 밖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 한눈에 들어오는 심야버스 풍경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의사폐업, 국세청 앞 ‘1인 시위’까지 다사다난했던 2000년, 그리고 20세기의 끄트머리. 오늘도 지친 육신을 끌고 심야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 우리시대의 평범한 시민들. 그들의 2001년 새해소망은 어떤 것일까. 단돈 1,300원을 투자해 그들의 미래를 함께 열어본다. 대부분 서울에 직장을 두고 경기도 부근 위성도시에 둥지를 튼 그들과 만나기 위해 지난 12월 초 서울에서 분당, 그리고 일산으로 가는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박한 시민의 꿈

분당으로 가는 1005-1 좌석버스 안. 10시 30분을 막 넘긴 시각엔 15명이 각자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모두들 부족한 잠을 청하기 바쁘다. 그중 막 핸드폰 통화를 마친 제법 ‘쌩쌩한’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회사원 최씨(28세). 그는 현재 학습지 회사에서 출판 관련 업무를 담당 중이다. 말을 붙이자 그는 처음부터 어려운 경제사정을 토로했다.

“아직 초보직장인에 불과하지만 제 눈에도 경제가 어렵다는 게 느껴져요. 저희 회사 학습지 판매량이 줄어드는 것이나 회원수가 감소하는 걸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착잡함이 밀려온다. 세밑 밑바닥 민심은 이렇듯 경제문제로 숨통이 조이고 있는데, 경제관료들은 국민세금 퍼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여기저기 틀어 막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일관한다. 이런 상황이기에 그는 경제민주화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 요구하는 바가 있었다.

“사실 신문만 보면 누구 말이 맞는 지 모르겠어요. 특히 한전의 경우 노조 말이 옳은지 정부 말이 옳은지…. 또 시민단체가 공기업 민영화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도 궁금해요. 참여연대 같은 데가 왜 아무런 말이 없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나서서 어떤 게 옳은 지 말해 줘야 시민들도 제대로 알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밖에서 보는 시민운동은 언제나 기대가 크다. 그러나 운동진영 내부에도 고민은 있는 법. 구구절절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직 사회생활이 몸에 익지 않은 1년차 초보직장인 최씨는 솔직히 아직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빠르게 급변하는 세상, 개인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리는 현실…, 그 속에서의 아귀다툼…. 하지만 내년에도 회사가 잘 운영되고 경제도 지금보다는 나아져야 한다면서 정부가 진짜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수많은 번민 속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말하는 최씨는 우리시대 진정한 ‘보통사람’이었다.

건너편 창가에 앉아 있던 50대 아저씨. 그는 현재 종로에서 의류판매업을 하는 자영업자다. 말을 붙이니 요즘 세상 형편에 대해 성토한다.

“아파트가 너무 삭막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최소한 윗층, 아래층, 좌우 이웃은 서로 인사도 하고 아는 체도 하면서 사는 게 사람 사는 것 아니야? 그런데 경제가 얼어붙어서 그런지 다들 얼굴이 굳어 있어.” 가끔은 아파트 사람들끼리 저녁에 소주 한 잔 걸치고 따뜻한 국물도 권하고 싶다는 그는 2001년 새해소망에 대해 물으니 인상부터 찌푸린다.

“내년엔 큰일이야. 사람들이 옷을 사면서 예전보다 더 메이커만 따져. 속상해. 어떤 옷을 들여놔야 할지 막막해.” 젊은 세대에 대한 불만도 대단했다. “우리 나이 되는 사람들이야 절약정신이 있지.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게 없어. 게다가 배고픔도 모르잖아?” 신문을 보면서 제일 갑갑한 것 중 하나는 정치라고 한다. 어느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정치판으로 넘어갔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준비가 안된 대통령인 것 같아. 그리고 여론정치가 문제야. 줏대도 없고 … 소신있게 개혁을 밀어붙이지도 못 하잖아. 말을 내뱉으면 책임을 져야지. 우리는 그네들 말이라면 다 믿는데, 사실 제대로 되는 게 없잖아. 이러니 더 이상 뭘 믿겠어?”

가슴을 저미는 말이었다. 믿음의 후과가 배신이라면 더 이상의 신뢰는 없는 것. 국민들이 믿고 바라보는 만큼 대통령이 임기말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그의 당부는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푸른 기와를 울릴 만큼 장엄했다.

노벨상도 좋지만 진정한 개혁을

종점에 도착한 후 강남 역으로 되돌아가는 910번 심야버스. 방금 전 시민들을 만나면서 타고 온 좌석버스 운전기사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며 함께 탔다. 운수업에서 일한 지 경력 10년이라는 김씨(31세). 하루 노동시간이 18시간이라고 한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살다보니 금방 노총각이 되네요. 내년엔 꼭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으면 해요. 힘든 직장이라 제게 올 사람이 있겠나 싶지만 말이죠.” 버스를 타는 손님들에게 ‘수고하신다’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힘이 난다는 그. 내년엔 꼭 꿈꾸는 일이 정말 이뤄지길 바란다.

915-1번 좌석버스. 일산에서 출퇴근하는 은행원 유씨(34세)를 만났다. 그는 현재 J은행 남대문지점에서 일하고 있다. 기자가 말을 건네자 쉽게 응해준 그는 시민단체 얘기부터 꺼낸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뭐 난 시민단체가 좋고 더 많아져야 한다고 여겨요. 구성원들의 전문성도 더 높아졌으면 해요.”

구조조정으로 은행 체질이 바뀌고 있다는 유씨는 최근 은행사정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현재의 모습이 낫다고 여겨요. 개인적으로는 뭐 보너스가 나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전까지 병폐라고 여겼던 수직적 명령체계, 연공서열 강조 등이 없어지고 개인의 능력,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주어지고 있어요.”

나라가 다시 어려워진 것은 경제인들보다는 정치인들 때문일 거라는 그는 현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정치인들이 기득권만 유지하려고 하니까 경제가 이렇게 되죠. 난 개인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정말 존경해요. 그러나 노벨상도 좋지만 뭔가 국민들을 위한 개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느새 버스는 그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내년에는 아무 근심없이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는 유씨. 그의 소박한 소망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1시. 버스는 끊겼고 택시를 잡아탔다. 서울로 되돌아오면서 택시기사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 “나라가 너무 뒤숭숭해요. 이제 올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저 막막하고 내일은 뭐가 또 일어날지 두렵기만 합니다. 뭐라도 하나 잘 되는 게 있어서 한 번 웃어봤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동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고 한다.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이 밝아오는 새해에는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년엔 자기 삶의 현장에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하기를 고대해본다.
최경석(참여사회 기자)
2001/01/01 00:00 200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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