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일 그리고 이웃

퇴출기업, 부도…. 이 추워지는 겨울 날씨에 밖으로 내몰려야 할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는 얘기다. 추울수록 그리운 것이 훈훈한 얘기들인데 어찌 세상이 이리 되어 가는가 싶어 겨울옷을 챙기는 마음이 몹시 스산해진다. 바로 몇 해 전 겨울, 환율이 두배 세배로 뛰어 생활비가 하루아침에 반 이상 줄었던 때가 생각난다. 참으로 막막하고 눈물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과 함께 문득 그때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돼주었던 마틴 도어 씨가 생각난다.

영국 살 무렵부터 알게 된 사이로 이웃에 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가장 믿음직한 의논상대가 돼준 분이었다. 예순을 넘긴 마틴 도어 씨는 얼마 전까지 올튼대학 예비학교의 영문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2년 전인가 영국의 교육부 예산감축으로 감원바람이 불 때 그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진해서 명예퇴직을 했다. 그 결정을 하기까지 그의 고민은 대단했다. 주위에서 많이 말리기도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남다른 애정과 열성을 가지고 있던 그였기에 스스로 아주 힘들었던 것이다. 퇴직 직후 만나 뵈었을 때 그의 외로워 보이는 표정에서 난 세상을 너무 순하게 사는 사람이 가지는 바보스런 모습을 보고 혼자 속이 상했었다.

“…난 요즘 일주일에 세 번씩 기독교연대사업팀에 나가 일을 합니다. 거기에서 네팔에 있는 기독교 학교를 위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지요. 지난 2월에는 동티모르를 방문했고, 3월에는 나이지리아에 다녀왔고 7월에는 네팔에 갔다왔어요. 동티모르에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 있었는데 내가 4년 전부터 그쪽 연대팀 일을 하면서 편지를 주고받던 프란시스코 가족을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이죠. 그의 아내와 일곱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어요. 그 부부가 이번 달에 앰네스티 총회에 참석하러 런던에 와요. 이렇게 일을 하다보니 일년이란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리는군요.”

지난 주 보내온 편지로 본 최근 그의 동향이다. 이 활동 전에 그는 지난 코소보 사태 때 영국으로 피난 온 동유럽 난민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서 일했다. 그때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 때문에 도버해협에 접속한 켄트 주의 주민들은 정부에 항의까지 했을 정도였다. 수많은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사람들이 모두가 한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집은 잉글랜드 남서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도버항구까지 차로 다니며 난민캠프에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언어를 가르치거나 난민신청 등 상담활동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 틈틈이 런던의 앰네스티 본부에 가서 자원활동을 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는 아들만 넷이었는데 맏아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아 할아버지가 됐다. 늦둥이 아들은 이제 우리 나이로 중학생인데 아들과 함께 컴퓨터 공부를 같이 한다. 종종 우리는 가족끼리 만났는데 한번도 식당 같은 데 가본 적이 없었다. 강가나 공원에 앉아 각자가 싸온 샌드위치를 먹고 산책을 하면서 그 동안의 회포를 풀다 해가 지거나 바람이 차가워지면 헤어지곤 했다. 마틴 도어 씨를 부인 메리 여사를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목사의 딸인 메리 여사는 생활 자체가 봉사활동이었다. 그래도 빵은 당연히 집에서 구워먹는 것이고, 잼이란 여름철 들에 나가 열매를 따서 만드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천하는 다소 구식 부인이었다. 가끔 서레이 지방에 있는 그 댁으로 초대를 받아 갈 적마다 ‘세인트 앤드류’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정원이 아름다운 그 집에는 늘 묵어 가는 손님이 있었다. 어려운 사정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손님에게 그 댁 가족들은 마치 친한 친구나 이웃처럼 마음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을 당연히 이웃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나에게는 ‘정도가 높은’ 성품을 지닌 분들이었다. 그 부부는 헤어질 때마다 포옹을 해주며 “May God bless you!”라고 인사를 한다. 난 그 인사말을 들을 적마다 축복을 내리는 분은 신이 아니라 바로 그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웃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 남을 돕는 일이 누구에게나 ‘늘 하는 당연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겨울, 딱 한번만이라도 ‘축복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권은정
2000/12/01 00:00 2000/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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