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원망 넘어선 나눔의 평화
2000/2000년 12월 :
2000/12/01 00:00
김군자 할머니
한참을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이대로 말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래로, 아래로 침잠해가는 이의 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듯한 민망함이 슬그머니 일었다.‘할머니∼이’ 다시 불렀다. 마침내, 가쁜 숨 사이로 할머니의 말문이 열렸다.
“부끄럽게 대단치 않은 일을 가지고…. 여러분께 죄송하죠. 너무 작아서. 고아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한 것뿐이었는데. 고아로 살아 왔으니까 알지, 그 설움. 또 나는 혼자니까 더 이상 필요도 없어요.”
시민운동가들이 각박한 이 시대에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할머니를 뽑았다는 말에 일흔다섯의 김군자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심장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알 것이다.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콱’ 막혀온다는 사실을.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말 한마디조차 걸러내는 할머니의 삶. 아름다운 모습이라 말해 버리기엔 너무 슬픈 삶.
속이 상했다. 그래서 상처를 헤집듯 심통 맞은 물음을 던졌다. 동생도 살아 있고, 조카도 있는데 전 재산 5,000만 원을 모두 희사하셨단 말이에요?
“그이들은 그 돈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준다고 해도 큰 도움 안 될 거고. 또 능력 있으니까 조금 고생하면서 살면 돼요. 그리고 5,000만 원, 사실 대단치 않아요. 내가 젊어 돈을 안 만져 봤으면 모르겠지만 만져 보았거든요. 만족스럽지 못해요. 그냥 마음만 내놓은 거예요.”
그래도 할머니, 숨도 가쁘시고 다리도 많이 아프신데. 병원도 다녀야 하고, 약값도 필요하잖아요.
“머지 않아 갈 사람인데 뭘. 여기(나눔의 집)서 지내면서 정부에서 돈도 받을 수 있고. 먼길 갈 적에 남의 신세만 안 지고 가면 돼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할머니의 말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반대로 기자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남은 생이 들어 있는 5,000만 원
지난 8월 30일, 막바지 더위로 세상이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날아온 단비 같은 소식을 많은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유산 1% 남기기 운동을 펴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에 전 종군위안부 김군자 할머니가 전 재산 5,000만 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이었다. 할머니의 수중에 남은 것은 장례비용으로 쓰일 500만 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월간 『참여사회』가 시민단체의 젊은 활동가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우리 시대 아름다운 사람’에 할머니가 선정됐다는 결과를 가지고 나눔의 집을 찾았을 때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다. 그 5.000만 원에는 할머니의 남은 생, 살 속을 파고드는 아픔으로 고통스러울 생활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 돈은 여느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나누는 실천이었다.
할머니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이다.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마흔둘에 딸을 얻은 아버지는 맏딸인 할머니에게만은 쌀밥을 먹일 정도로 귀여워했다. 밑으로 세 살씩 터울 지는 여동생 둘이 더 태어나기까지 할머니는 불행을 몰랐다. 그 시절은 누구나 힘겹고, 어렵게 살았으니까.
할머니가 열 살 때 첫 불행이 왔다. 그렇게 당신을 아끼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올망졸망한 딸 셋에 스물여섯인 엄마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몰라. 아무튼 밥도 제대로 못 먹을 형편이 됐어요. 그래서 일곱 살 난 바로 아래 동생이 남의집살이로 보내졌지. 그리고 다시 3년 뒤에 엄마마저 세상을 떴어요. 고아가 된 거야. 그래서 이모집에 있었는데 입 하나라도 덜 양으로 이번엔 막내가 애보기로 남의집살이를 가야 했어요.”
할머니의 기억은 열세 살 나던 그해, 동네 소학교로 돌아갔다. 이모의 성화에 막냇동생의 손을 잡고 나서던 모습, 한사코 안 가겠다며 떨어지지 않던 동생, 억지로 떼놓고 도망치듯 나와 소학교 관목 뒤에 숨어서 보았던 땅을 뒹굴며 울던 동생….
둘째동생이 10년 전에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려 지금 주문진에 살고 있는 동생은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이다. 할머니가 스물아홉 되던 해, 다시 만난 동생은 “동생 버리고 혼자 잘 살겠다고 간 언니년들아, 어디 갔다가 이제서야 왔냐”며 통곡을 했다.
“그때 막내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열여섯이나 위인 평양 사람하고 결혼해서 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동생 남편, 그러니까 매제가 동생을 데리고 갈까봐 그런지 잔뜩 겁을 먹는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내가 ‘늙은이 버리고 같이 가자’ 하지 않더냐고 묻더래요. 이틀인가 동생집에서 묵고 서울로 나서는데 동생이 배웅을 나왔어요. 바쁘다길래 들어가라 해놓고 차를 탔는데 모퉁이를 돌면서 보니까 애가 길에 서서 엉엉 울고 있는 거야. 내가 저걸 데리고 타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서울 도착할 때까지 울었어요.”
수양딸로 갔다가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그러나 두 동생을 남의집살이로 보낸 후 열일곱 살 되던 해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심부름을 가는 줄 알았던 할머니는 홍계에 도착해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가을에 혼인이 잡혀 있었다.
“참 독했지, 민며느리로 들어간 집에서 죽으려고 아편을 먹은 거야. 한데 운도 없이(?) 닷새를 잠에 빠졌다가 살아난 거예요. 칠월 스무나흗날 새벽 두 시가 넘어 캄캄한 대관령고개를 넘어 주문진 어머니 친구집으로 갔지.”
그런데 며칠 뒤 어떻게 알았는지 시아버지 될 어른이 거기까지 찾아왔다. 할머니는 그래도 버텼다. 마침내 경찰서까지 개입해서야 할머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남의집살이를 찾던 할머니에게 어느 순경의 소실댁 수양딸 제의가 들어왔다. 가리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길이 할머니의 생 자체를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순경이 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는데 위안부로 가는 길인지는 몰랐지. 스무 살 되던 해 중국 훈춘이 해방될 때까지 위안부로 살았어요. 어느 날 모르는 사람이 오더니 무작정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는 거야. 허둥대며 열몇 날을 걸어 백두산을 넘어서야 해방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위안부 사실은 숨기고 2년인가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술집엔가를 나갔지, 아마.”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좋아 웃는 걸까?
막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6ㆍ25가 터졌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 중앙시장 밥장사를 시작으로 미제물건장사,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돈도 꽤 모았다. 서른 둘부터 서른아홉 정도까지, 당시 돈으로 300만 원이었으니 그것만 잘 관리했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터였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이자놀이를 하면서 나가는 돈만 있고, 불쌍한 사람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달라고 할 엄두를 못내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 떼 먹히고 저기서 뜯기고, 그래도 그때가 가장 좋았어요. 돈 걱정도 없었고. 그런데 외로움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 내 삶이 너무 기구한 거야. 힘들어서 죽을 작정으로 약을 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지.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약 먹고 누워 있으면 약 기운이 퍼지는 게 느껴지는 거야. 그런데 나도 기가 막힌 건 눈을 떠보면 병원인 거예요. 그 때는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저 사람들은 정말로 좋아서 웃는 걸까 하는 생각 많이 했지.”
그렇게 사는 게 힘들고 외로워 찾게 된 것이 종교였다. 할머니는 지금도 기도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단다. 기구한 팔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나만 힘든 건지 깨달아 보려고 절엘 다니기 시작했어요. 충청도에 있는 명암사라는 절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그렇게 잘 되는 거야. 공양주도 했는데 조금만 더 닦으면 도를 깨칠 것 같은 느낌이 올 정도였어요. 그런데 스님이 그러는 거야. 집에 부처님을 모시라고. 내가 여기서도 그렇지만 입바른 소리를 잘 해요. 그래서 사람들과 쉬 친해지지 못하고. 아무튼 부처를 모시란 말에 난 그런 것 못해요, 조카딸이 알면 중영감 얻었다고 할 것 같소, 그래 버린 거야. 그 소리에 스님이 주문을 외는데 갑자기 앞이 캄캄해져요. 그 길로 끝난 거지.”
다음에는 세계종교에 귀의했다. 파출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정선군 남전면에 있는 기도처에서 살기까지 했다. 그런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비가 나날이 늘어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거택보호자로 지정받았지만 병원비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선군청엘 찾아갔지요. 상담원이 가톨릭 신자였는데 참 잘해 주었어요. 그래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식복사로 성당에서 살기도 했어요. 세례도 받았어요. 요한나가 세례명이야. 그렇게 지내다 그 사람들이 내 위안부 생활을 안 거야. 그 뒤에 나눔의 집으로 오게 됐어요. 98년이었어요.”
결혼? 삶이 너무 기구해서…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얘기를 나누는 도중 할머니는 단 한번도 결혼이나 남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사진을 힐끗거리며 “할머니 미모라면 인기 많으셨겠는데요?” 속없는 물음을 비치고 말았다.
“결혼? 그러고 싶지 않았어. 삶이 너무 기구해서. 딱 한번 마음을 준 사람이 있긴 있었지. 열여섯이었지 그때가. 이모랑 살 때였는데, 한 총각이 날 좋아했어요. 그러면 뭐해, 처녀공출 때문에 딸 둔 부모들이 서둘러 혼처를 구하는 때라 총각한테도 부모끼리 이미 정한 처녀가 있었던 거야. 해방되고 딱 한번 더 만났는데 징용 가 있으면서 고생을 해서인지 금방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서른둘 즈음, 한창 좋았던 시절에도 인연은 쉬 맺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끌리면 유부남이었고, 총각을 만나기란 마음이 허락치 않았고, 그렇게 할머니는 하루하루 마음을 닫는 연습을 해 왔던 것이다.
주문진에 사는 동생은 아직도 할머니의 훈춘생활을 모른다. 몸만 아프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오래 전 TV에서 정신대 할머니들을 봤어도 드러내지 않았다. 왜 그렇게 혼자만 힘들어 했을까.
“여기 와 보니까 그렇게 나 혼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어디 그런가. 동생이 같이 살자고 해도 그렇게 못했어요. 내가 떳떳하지 못하고 넉넉하지 못하면서 친척들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게 꼿꼿하기만 한 언니를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늘 미안하다. 하지만 연락 한번 자유롭게 못하니 미안한 것도 마음뿐이다.
“밥 먹으러 식당 가는 것도 힘드니 동생 찾아갈 일은 아예 엄두도 못 내요. 동생이나 나나 귀가 안 좋아 연락도 잘 못하고. 훈춘에서 일본군한테 따귀를 맞아 고막이 터졌는데 치료를 못해 한쪽 귀는 안 들려. 동생은 애보기로 워낙 고생을 한 데다 남의집살이 중에 열병을 앓고 나서 양쪽 귀 모두 안들리고. 게다가 글을 모르니 편지도 못하지.”
할머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살아서 일본이 사죄하는 모습 볼 수 있을까?
할머니의 남은 소망은 종군위안부에 대해 일본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사죄와 배상, 교과서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위령비를 세우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일본은 하루빨리 우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돼요. 나도 그렇지만 몸이 성치 않은 할머니들이 많아 시간이 없어요. 이 문제 때문에 12월 초에 아마 일본을 가게 될 것 같은데, 어떨지 몰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 몸으로 갈 수 있을까? 살아 생전에 일이 풀려야 좀 더 좋은 일 할 수 있을 텐데. 좀더 많은 고아들 도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솔직히 할머니는 시민단체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신통치 않다. 무슨 복잡한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할머니들 문제를 제쳐두고 처리해야 할 더 큰 문제들이 무언지 이해하기 어렵다. 떳떳하게 할머니들의 삶이 복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에서도,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찾아오는데 같은 국민이 몰라주는 것이 할머니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섭섭하고 고약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여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정신대라고 하니까 정신병자쯤으로 아나봐. 아는 체를 안 해요. 가끔 오다가다 길에서 만나면 나이 좀 든 아줌마도 그렇고, 애들도 말을 안 해요. 교복 입은 학생도 모른 척 하고, 고개를 돌리는 거야. 섭섭하고 괘씸해요. 머리가 하얗게 센 한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랑 이장은 말을 건네요.”
할머니는 그래도 지금은 말이라도 드러내놓고 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우리의 역사니까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고, 우리의 후세들이 좀더 잘 자라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일흔다섯의 할머니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꿈, 다 꿈 같아요.”
나도 할머니의 이 생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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