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 묻을 수 없었던 유가족의 한과 소망
2000/2000년 11월 :
2000/11/01 00:00
저승에서 아들 만나도 부끄럽지 않게 싸웠다
의문사는 피해자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론 종종 그들의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유가협 등 민간단체가 ‘의문사’로 파악하고 있는 사건은 모두 44건. 대부분 유가족은 진상 조사를 요구하거나 개인적으로 조사에 나섰을 때 관련 기관으로부터 여러 유형의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이런 협박과 회유는 이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것이다.
86년 사망한 고(故) 신호수 씨의 아버지 신정학 씨(64세). 여수에서 건어물을 팔았던 신씨는 아들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해 지금까지 싸워왔다.
“처음엔 협박도 많이 받았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정은 돌볼 수 없었지요. 그나마 모아둔 돈도 탕진했고. 그런데 어려울수록 이런 생각이 들데요. 시신도 제대로 못 거둬 준 내 아들놈 저승가서 부끄럽지 않게 보려면 끝까지 싸워야겠다….”
진정, 탄원, 고소, 재정신청 등 법적인 대응은 물론이고 유가협의 진상규명 투쟁에도 빠지지 않았던 신씨는 최근 건강까지 악화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그의 10여 년에 걸친 노력 덕분에 신호수사건은 의문사 가운데 비교적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진상조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87년 의문사한 정경식 씨의 어머니 김을선 씨(67세) 역시 ‘진상규명에 인생을 건 어머니’로 불린다. 정씨는 대우중공업 노동자로 민주노조 건설 과정에서 실종, 9개월 만에 유골로 발견되었다. 수사 결과는 역시 ‘자살’.
경남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생선을 파는 김씨는 아들의 죽음으로 집안의 생계를 떠맡게 되었다. 척추가 불편한 남편, 고령의 시어머니에 큰아들까지 동생 경식 씨의 죽음으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김씨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직접 관련자들을 만나고, 아들이 발견된 현장에서 자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하기도 했다. 서울과 집을 오르내리며 집회와 농성에도 참여했다. 이런 과정에서 김씨는 업무집행방해, 법정소란, 폭행 등 ‘전과’기록을 얻기도 했다.
김씨는 10여 년 동안 시위를 쫓아다니며 경찰에게 맞은 후유증으로 최근 허리와 다리가 불편하다. 그나마 병원에 다니게 된 것도 최근이라는데 그것도 ‘세상이 변한 덕분’이라고 한다. 예전엔 김씨가 대학생, 노동자와 어울려 ‘빨갱이 짓을 하고 다닌다’고 곱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서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대통령께서 조금만 더 노력해주면 좋겠다”는 김씨는 진상규명의 소망을 이렇게 말한다.
“경식이가 그렇게 되기 전에는 먹고사는 데 바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지예. 야당, 여당 구분도 못했거든. 우리 경식이가 무식한 애미 깨우치려고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듭니더. 어서 억울한 사람들 누명벗고, 우리 학생들, 노동자들 평범하게 살아도 되는 세상이 됐으믄 좋겠어예.”
아들의 뒤를 따른 어머니, 아버지
한편, 87년 발생한 군 의문사인 최우혁 사건과 이이동 사건은 의문사가 초래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당시 서울대와 전남대 학생이었던 이들의 죽음은 각각 ‘분신자살’과 ‘총기자살’로 발표되었다.
최씨는 입대 전 학생운동에 참여해 수차례 연행, 구류를 살았다. 86년 시위중에 최루탄을 맞아 전치 10주의 상처를 입는 일이 생기자, 그의 어머니는 더 큰일 일어나기 전에 군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들을 강제 입대시키게 된다. 그런데 ‘안전’을 위해 군에 보낸 아들이 4개월여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충격을 받아 실어증까지 보이던 최씨의 어머니는 결국 91년 한강에 몸을 던졌다. 현재 최씨의 아버지 최봉규 씨(70세)는 아들에 이어 아내까지 잃는 슬픔을 딛고 13년 동안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이동의 아버지 이춘원 씨 역시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싸웠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던 이씨는 막노동을 하면서도 아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이이동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대학에 들어갔고 2학년을 마친 후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는 아버지 권유에 따라 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5개월여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군 당군은 ‘자살’ 동기를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가정불화’라고 주장했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불화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의 주장은 이춘원 씨에게 ‘당신 때문에 아들이 자살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큰 충격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춘원 씨는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진상규명을 위해 가산을 바쳤고 결국 재혼한 아내와도 헤어졌다. 그러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의 노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고,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근무한 부대의 중대장으로부터 무고죄로 고발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90년 11월 이씨는 “더 이상 힘이 없어 먼저 갑니다. 남은 사람들이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위해 힘써 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내가 죽었다면 형님은 어떻게 했을까?”
김상모 씨(45세) 역시 형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는 86년 사망한 김상원 씨의 동생으로, 형 상원 씨는 경찰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연행, 파출소에서 식물인간이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한 후 행려병자로 위장되어 시립병원으로 이송돼 두 달여 만에 사망했다. 김씨는 형이 실종된 후 34일 만에 식물인간이 된 형을 찾아냈다. 건장하던 형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후 김씨는 진상을 밝히려는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공권력의 조직적인 은폐를 파헤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증인들이 입을 열지 않았고, 변호사들은 대강의 사건 내용을 들으면 상담조차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너무 외로웠다”고 표현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여기저기 조사 다니면서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끼니를 거르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면서 심한 위장병을 앓게 됐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노모는 심장병이 악화되었고 아내가 김씨를 대신해 공장에 나가 생계를 유지했다.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잊겠다고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산에 다니기 시작했죠. 어느날 산에 오르다 문득, 만약 내가 형님처럼 억울하게 죽었다면 형님은 어떻게 했을까…. 다시 싸우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는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결국 김씨는 형님의 죽음이 경찰의 폭행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말았다. 모두 자살 또는 사고로 처리된 의문사 사건들 가운데 유일한 타살 규명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민사소송에서 승소했을 뿐 사건의 모든 진상과 가해자들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김씨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법이나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억울하게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구제해 줄 수 있는 제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힘없는 개인이 억울한 사연을 밝히려고 뛰어다닐 때 감수해야 하는 고통과 좌절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의문사는 한 사람의 생명권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의 ‘행복추구권’마저 박탈해왔다. 그래서 의문사의 진상 규명은 피해자의 명예 회복인 동시에 유가족의 행복추구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가 인간에게 부여한 기본권이라고 배워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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