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창 열사에게
89년 8월 15일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던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 교정의 담배꽁초를 주우며 학우들과 목례하던 그를 사랑했던 후배, 김성희. 10년이 넘도록 의문의 죽음을 풀기 위해 애썼던 많은 사람들과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 이제 후배 김성희 씨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의문사특위 활동을 바라본다고 말한다. 편집자 주

내창이 형.

벌써 11년이나 지났군요. 형보다 두 살 아래인 제가 벌써 서른여섯이 되었으니까요. 저는 후배 선미와 결혼해 딸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정신 없이 살다가도 이렇게 과거를 돌아볼 계기가 생길 때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합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건 아마 막연한 착각일 겁니다. 11년 전의 그 사건으로부터 훌쩍 이 시점으로 날아온 게 아닌 만큼 그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요. 형이 죽고 난 다음에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권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이에 항의하면서 죽었던가요. 91년, 92년 무렵은 아예 돌이키기도 끔찍합니다.

형을 떠올릴 때마다 망월동 묘지 앞에 놓고 온 영정사진 속의 검은 뿔테 안경이 떠오릅니다. 89년 10월에 형을 묻으면서 관 위에 함께 묻었던 그 안경 말입니다. 형은 참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불과 스물예닐곱에 죽었으니 지금 제가 생각하면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웅숭 깊고 다정할 수 있었는지. 전국의 어느 학생회장이 그처럼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봤을까 싶습니다. 교정에서 눈길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에게 형은 빠짐없이 목례를 하곤 했지요.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정말 한 번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일일이 줍기도 했고요. 형과 동행하면서 저는 부끄럽게도 학생회장이 되면 참 피곤하고 귀찮겠구나. 이런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형은 단지 학생회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생활에 철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은 군대에 갔다와 뒤늦게 우리 학교에 입학했었지요. 학생회장이 되기 전에는 밤새 작업실에서 판화와 조각에 매달리던, 예술적 정열이 넘치는 치열한 미술학도였고요. 저는 낫을 들고 절규하는 농민을 새긴 종이판화와 허공을 향해 솟구친 팔뚝에서 느껴지던 한 조소작품의 어떤 예민한 메시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물론 학생회장이 된 뒤로는 작품에 매달릴 여유가 없었지요. 밤새 환하게 불을 밝힌 채 학과 동료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조소학과 건물을 지날 때 왠지 쓸쓸한 표정이 되던 형의 얼굴이 생각나는군요. 학생회장이 되지 않았다면… 형은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을 거예요. 제 동기 운성이 부부나 여주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원주 형처럼 말예요. 아, 이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때 총학생회장 선거에만 나가지 않았더라면 형은 죽지 않았을 텐데. 아니 형을 죽인 자들의 요구를 그냥 들어주었더라면 목숨을 부지했을까.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했던 운동의 대의는 무엇인가. 개개인의 목숨 건 분투를 사람들은 기억이나 할까. 늘 형을 떠올리면 복잡한 심경이 됩니다.

형의 죽음은 정말 너무도 느닷없이 제게 통고되었습니다. 89년 8월 16일 새벽, 학교에서 후배들이 울면서 전화를 했더군요. 그 당시 학생회 간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농촌 봉사활동이며 소그룹별 합숙으로 학기중보다 더 정신없는 방학 일정을 보내다 불과 사나흘 주어진 휴가를 맞아 형과 헤어진 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채 동이 트기도 전에 그 전화를 받고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앉지도 도로 눕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면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이 정말 벌어지는구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잘못 알려졌을 거야.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말자. 정신을 수습해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해볼 수 있는 온갖 상상을 다 해 보았습니다. 라디오 뉴스에서 형이 저 남쪽 바다 외딴 거문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들은 당장 학교버스를 타고 거문도로 가기 위해 여수로 내려갔습니다. 다행히 폭풍으로 그 다음날까지 거문도에서 여수항으로 나온 배들은 없었고, 8월 17일에야 첫 배가 여수항으로 들어왔지요. 여수에 내려갔던 우리들 중 일부는 거문도로 들어가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일들을 찾고, 저는 후배들과 여수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형의 행적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상처투성이로 거문도 해수욕장에 쓰러져 있던 시신은 형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시신을 겨우 여수에 있는 전남병원 영안실로 모셨을 때 병원 담 밖에서는 백골단들이 시신을 탈취하겠다고 위협하고 병원 안에 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들고 맞서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너무도 분하고 화가 나서 그런 상황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어린 학생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마저 탈취해 증거를 소멸해야 할 만큼 치졸하고 야비한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면서 우리의 몸을 아무렇게나 던져서라도 저항하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형의 사건은 비교적 세상에 널리 알려진 편입니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시신마저 불에 태워진 의문사 사건들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그때 후배들과 재빨리 꾸린 ‘학생조사단’이 찾아낸 단서들이 형의 느닷없는 죽음의 의문을 푸는 거의 유일한 실마리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동행했던 안기부 인천분실의 직원과 사내들. 그들의 동행을 증언했다가 황급히 말을 바꾼 마을 주민과 다방 종업원. 그리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한 여수경찰서의 담당 형사들. 이제 이들을 불러 다시 진상을 규명해 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겼습니다.

오늘 출근길에 본 조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현판식 사진이 실렸더군요. 앞으로 1년 동안 그 수많은 의문사의 진상을 얼마나 파헤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나마 유가협 어머니들이 일년 넘게 여의도에서 천막 농성을 벌인 끝에 얻어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1년 기한의 한시법이 상징하듯, 형과 같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진전시키려던, 진부한 표현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습니다. 어느 한 쪽도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치중인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공권력의 힘으로 학생과 노동자들을 죽인 자들이 여전히 권력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일부 양심적인 분들이 대통령직속기구인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런 상황 말입니다.

형의 죽음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부도덕한 권력에 맞서야 할 이유가 ‘추상적인 선이나 합리를 위해서’ 정도가 아니라 죽고 사는 절박한 문제며 나태하게 방관하면 선량한 사람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는 걸 가르쳐준 그 사건은 젊은 날의 우리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해마다 형이 죽은 8월 15일이면 우리는 100여 명씩 망월동에 가서 형을 만나왔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그때 겨우 안부를 확인하게 되는 사람들도 많은데, 직장에 취직한 얘기,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오는 후배, 유모차를 끌고 오는 사람, 그리고 저만해도 지난 8월에는 7살이나 된 큰딸아이를 데리고 함께 갔었습니다. 도처에 절망과 탄식뿐이던 90년대 초반에도 우린 다짐했었습니다. 우리들의 평생을 바쳐서라도 꼭 진실을 밝히자. 그런 다짐 때문이었을까요. 유가협 어머니들이 농성중일 때는 가정주부가 된 원옥이나 그 또래 동기 여자 후배들이 천막을 찾아가 밥도 짓도 어머니들의 말벗도 되어 드렸습니다.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올 초에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져 100여 명의 선후배들이 10만 원씩 갹출해 1,000만 원이 넘는 적잖은 기금을 모아 진상규명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다들 기꺼이 모금에 응하더군요. 모두들 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살인의 진상을 밝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 말입니다.

형, 앞으로의 1년 동안 우리들은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응원할 생각입니다. 함께 지켜봐 주세요.

성희가
김성희 참여연대 사무국장
2000/11/01 00:00 2000/11/01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4144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