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성 없는 독립유공자 포상기준'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문제제기가 나왔다. 최근에는 이것이 행정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에서는 "행정소송의 요건이 안 된다"고 일축했다. 이 사건을 통해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를 재점검해보기로 하자.

해결되지 않은 역사는 끊임없이 모순을 낳는다. 우리에겐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 분단이 있다. 그 이전에 식민지의 역사가 있다. 식민지가 분단을 낳고, 분단은 또 다른 분단을 낳고, 왜곡된 삶을 낳았다. 왜곡의 시간은 일그러진 우리의 얼굴을 낳았다. 식민지와 분단의 멍에를 한 몸에 안고 뒤뚱대는 우리의 삶의 한켠, 틀어막고 숨죽이던 시간의 뚜껑을 열어보려 한다.

2000년 10월 16일, 진주시 칠암동

“자기 평생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 공무원들이 종이 한 장으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좌파독립운동가 후손인 박기진 씨(70세). 그가 들고 있는 종이는 국가보훈처장의 직인이 찍힌 ‘2000년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서’였다. 박씨의 부친 박태홍 선생에 대한 2000년도 공적심사 결과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하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 박태홍은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제7권) ‘독립운동 참여자명단’에도 포함된 독립운동가였다.

“진주에서 독립운동가 하면 당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사회주의 활동의 독립운동적 성격에 대한 평가문제’라니, 다른 행적은 평가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라고 낙인 찍고 포상 못하겠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박기진 씨는 억울하다고 연거푸 말했다. 94년 이전까지 그는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94년도부터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매번 “사회주의적 활동내용에 대한 문제”로 포상탈락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제야 그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가 열 살을 갓 넘겼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일본 경찰에 의한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사망한 것이다. “아버님은 서울로, 진주로 항상 밖으로 다니고 어쩌다가 아버님이 계셔 방에 들어가보면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해방되고 난 후에 남북이 분단된 겁니다. 일제에 대항한 활동인데 그것을 두고, 보훈처는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국민정서를 고려하여 포상할 수 없다’고 해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니, 답답한 노릇 아닙니까?”

그로서는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뜻을 늦게 알게 된 것이 송구스럽다. 그 동안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던가? 진주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던 부자가 바깥 일에 돈을 다 쓰고,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남의집일을 해주며, 어린아이들을 돌봤고, 두 형은 돈을 벌러 만주로 떠났다. 그는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부산으로 가서 허드렛일로 끼니를 해결하며 타향에서 밤을 보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만날 시간도 없었죠. 만나도 아버지 얘기는 거의 안 했습니다. 큰형은 아버지 살아계실 그 당시 진주고등학교에 다녔는데 2학년 때 퇴학당했어요. 매일 선생님이 형을 불러 ‘아버지가 누구를 만나느냐’며 조사하면서 때리기도 했답디다. 나중에는 학교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집안엔 아버지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족보도 없다. 일본경찰은 수시로 집에 들어와 아버지를 체포해갔고, 가택수사를 하고, 거주제한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일본 경찰은 집안에 있는 족보를 비롯하여 아버지가 보던 책, 자료를 죄다 가져가 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마저도 사라졌다. 지금은 그만 남았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 채로 세상을 등졌다. 현재 셋째 형이 생존해 있지만 치매로 인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힘든 상태이다.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숨죽이며 흐느끼다가 끝내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시간이 흘렀다. 일그러진 얼굴을 들고 목이 메인 채로 대답하려고 하다가, 70세의 노인은 다시 손수건 속에 얼굴을 묻는다.

일제시대(1919∼44년), 진주

죽은자는 말이 없기에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들어볼 순 없다. 그러나 당시 신문을 포함한 문헌을 통해 현재 시점에서 그 시간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고 박태홍의 활동은 『동아일보』에도 자주 기사화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9년 3월 1일, 그는 진주에 있는 천도교 교인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1년에는 진주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연설문을 낭독했고, 애국계몽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그는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일신여고(현 진주여고)를 건립하기 위해 몸소 터를 고르는 일부터 건립까지 헌신했다. 그런데 이들이 일군 터를 일경들이 헌병대 본부로 쓰기로 결정하여 일경들과 마찰이 있었다는 기사는 당시 『동아일보』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은 크게 정리하면 노동운동과 신간회 활동이다.

노동운동부터 살펴보자. 일제시대 때 일본은 조선 내 민족자본의 성장을 철저하게 탄압해 일본인 소유의 공장을 계속 늘리는 정책을 실행한다. 일본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 수가 늘어나면서 수탈은 더욱 심화되는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12∼13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해고의 위협, 불안전한 시설에서의 사고의 위험, 감독의 횡포와 학대, 차별을 받으면서 견딜 수 없게 된 조선인들은 1920년대 노동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박태홍은 노동단체인 진주노동공제 대표와 조선노동총동맹의 간부로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운동, 학교설립, 문자보급, 애국계몽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신간회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해 일제에 단일한 전선으로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1928년 말에는 일제하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로 성장한다. 박태홍은 신간회 진주위원장 겸 대표위원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후에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독립을 한 해 앞두고 끝내 눈을 감았다.

2000년 10월 19일, 광주

국가보훈처에서 ‘사회주의 활동적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라는 이유를 들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탈락시킨 경우는 정확한 수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박태홍 외에도 많다.

“저는 장인어른이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언제 한번 그 어른에 대한 자료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정인규 씨(70세)는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난 다음 부인과 함께 부산 문서보관소에 가서 장인어른의 판결문을 찾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고 장순기. 당시 『조선일보』 광주 주재기자였다. 1931년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35년 사망. 장순기 역시 염원이었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다. 몇십 년이 흐른 후, 맨 처음 자식들이 부모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판결문이었다. 판결문에는 치안유지법 위반·토지제도 반대로 죄명이 적혀 있었다. 추경화(향토사학자·독립운동자료수집가) 씨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치안유지법이나 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으면 거의 애국지사로 봐야 한다. 이것은 국가보훈처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고 밝혔다.

“아버지 얼굴도 못 봤지요.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가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어요. 바느질도 하고, 친척집에 부탁해서 논 서너 마지기 소작을 붙여 연명했죠.”

형편은 날로 어려워져 소작도 오래가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장순기의 유일한 혈육인 장경금 씨(66세)는 어머니로부터 부친의 활동을 듣고 자랐다. 유복자로 태어난 딸이 안타까워 지극한 정성을 다해 키우고 싶었지만 없는 살림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못다한 사랑을 주신다고 끔찍하게 저를 키웠죠. 그래도 여자 혼자 힘으로 힘들 때가 많았겠죠. 어느날 어머니가 아버님 사진을 다 태워버렸어요.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순간 원망스런 생각이 들어서 그랬나봐요.”

이제와서는 어머니의 행동을 말렸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던 증거들이 지독한 생활고로 인해 불타 버린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최한영 씨를 만났다. 그는 “그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활동하던 사람을 이제야 찾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

1995년 지난 자료들을 뒤져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냈지만 진주의 박기진 씨의 경우와 똑같은 사유로,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사회주의 활동이 이유’가 되어 포상탈락 되었다. 이에 대해 정인규 씨는 이렇게 항변했다.

“그때는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신간회을 만들었잖습니까? 독립운동이 최우선의 과제였다고 봐야 타당한 겁니다. 그런데 보훈처에서는 ‘독립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그 여파로 돌아가시게 된 점은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라고 보냈더라구요. 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2000년 10월 17일, 서울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6·25 전쟁 때 소멸돼버린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정권이 들어서고, 분단으로 인해 많은 역사가 일부세력에 의해 왜곡·은폐되기도 했으며, 또 바로 역사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미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사망한 상태이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공적 내용, 활동기간, 독립운동으로 인한 희생,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국가보훈처 김성민 씨(공훈심사과)의 말이었다. 심사기준은 종합적인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박태홍·장순기 씨가 탈락되었다고 밝혔다. 이 말과 달리 탈락의 이유는 ‘사회주의적 독립운동의 성격’이었다.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했다면 마땅히 받아야 한다. 또한 그 동안 보훈처의 포상 기준이 형평성이 없음은 누누이 지적되었다.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이 기록을 왜곡해 받은 경우도 적잖다. 진주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향토사학자 추경화 씨는 “우리가 봤을 때 분명히 친일파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포상받고 떵떵거리면서 살고, 독립운동 한 것이 확실한데도 못 받는 사람도 있죠. 박기진 씨도 마찬가지죠”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보훈처에서도 인정하긴 마찬가지였다. “몇 십년이 지난 사실에 대해서 추적하기도 어렵고, 증거를 과장·왜곡해서 신청하면 확인도 쉽지 않고…. 그래서 한번은 문제가 되어 포상을 줬다가 뺐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가족들의 불명예도 있어서 충분한 소명기회도 줘야하니까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박태홍은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이에 대해서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색인해놓은 것이다. 공훈록에 올라 있다 하더라도 다 포상을 받는 건 아니다”며 “일반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활동자의 인명을 기재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박태홍과 동일하게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같이 투옥되었던 사람 중 일부는 90년, 92년에 포상을 받았다. 그 중에 강달영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내기도 했다. “그렇긴 하지만 강달영 외 나머지 분들은 조선공산당 외에 다른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점이 감안된 것”이라는 게 보훈처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한 것이다. 감옥에 갔냐, 안 갔냐, 또 얼마동안 활동했냐 등으로 평가했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최근 보훈처가 박기진 씨와의 행정소송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기본방향과 대치되는 것이다.

“포상기준의 형평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지난 역사를 현시점에서 평가하기에 정확할 순 없습니다. 저희도 북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전향적으로 바뀌면 보류시켜두었던 사람들을 포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담당자도 포상기준에 대해서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포상은 보훈처에서 자체적으로 발굴하기도 하고, 개인이 신청할 수도 있다. 그것을 토대로 공적심사위원회에서 3차례나 심사를 한다. 박태홍의 경우는 학계 인사와 생존 애국지사, 보훈처 관계자 등 24명이 모여 심사를 했다. 공적심사에서 포상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심사위원회의 전원이 만장일치해야 통과된다. 보훈처에서 이 만장일치제가 객관적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포상의 원칙이나 기준없이 24명의 심사위원들의 의견에만 의존하여 결정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1명이라도 어떤 이유로 이의를 제기한다면 탈락되는 것이다. 보훈처는 포상의 기본적인 방향만 있을 뿐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심사위원들의 자의적인 결정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24명이 가지는 역사와 사회를 평가하는 시각차가 있을 수도 있고, 단 한명이라도 자의적으로 평가해 반대한다면 탈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의 정서를 감안해서…, 남북이 통일되면…” 등의 애매모호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올해 8월에 박기진 씨가 제기했던 소송에서 법은 보훈처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학계의 의견은 “일제시대에 했던 사회주의계열의 운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이다. 현재 그는 다시 항소한 상태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보상금과 혜택이 지급되는 포상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리해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역사에 책임을 다한 사람들은 핍박받고, 그 책임을 회피한 사람들이 전자의 희생을 앗아서 육신의 안일함을 보장받는 것은 여기에서,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이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2000/11/01 00:00 200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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