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을 덮어두고 분단을 넘어설 순 없습니다.
2000/2000년 10월 :
2000/10/01 00:00
암울했던 50년전 한국전쟁의 상처. 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상흔은 여전하다. 참여사회는 두회에 걸쳐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의 현장을 찾아나선다. 참여사회는 두회에 걸쳐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의 현장을 찾아나선다. <편집자 주>
20세기의 학살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민간인에 대한 살상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구조화된 폭력형태로서 다른 국민이나 주민에게 집단의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상호 증오와 살상의 동기는 그것들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존재 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역사적 증오와 살상의 동기들이 실제로 엄청난 비극을 실행에 옮기도록 동원하는 데에 있다. 집단적 증오를 영속화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제도들을 통한 사회화라는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의 이념이 집단적 기억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살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 현대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 후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가해자에 따라 국군과 미군, 그리고 경찰과 사적 보복을 포함한 우익청년단에 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피학살자의 성격에 따라서는 산간벽촌의 무지렁이 주민에서부터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재소자와 해방 후 좌익활동가에 대한 정부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들 수 있다.
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전쟁발발 후 남한주민들은 낙동강 이남의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이 북한의 점령지가 됨에 따라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 수복 이후 피해를 입게 된다. 국군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주민들을 학살하게 되었고,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태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된 공비를 소탕하는 작전과정에서 역시 무고한 주민을 죽이게 된다.
전남 함평군에서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2일 사이에 주민 524명이(월야면 350명,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중대본부가 있는 함평군 해보면 문장에서 장성군 삼서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군하다가 월야면 정산리 장교와 동촌마을 입구에서 공비의 습격을 받아 국군 3명이 피해를 당했다. 현장 목격자인 동촌마을의 곽상일 씨(당시 16세)에 의하면 그날 밤에 공비들이 ‘승전축하잔치’를 하며 인근마을 주민을 강제로 모아놓고 봉화를 피우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국군을 조롱하자 이에 격분한 20연대 5중대 군인들이 다음날인 12월 6일 장교와 동촌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 7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5중대장의 인솔하에 중대 병력이 7개 부락─지변, 내동, 동산, 순촌, 송계, 괴정, 성주─주민 700여 명을 “도로공사 하러 가니 나이에 관계없이 모이도록” 하고 15세 미만의 아이들은 마을로 가서 가옥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한편 주민들 중에서 15세부터 45세 사이의 청·장년을 별도로 분리하여 그들을 사살하였다. 죽지 않은 자를 확인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자들은 불을 끄러 가라”고 하여 일어선 이를 다시 사살하고, 또 그렇게 외치면 일어선 자를 3번이나 사살 하였다. 끝내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확인 사살을 하여 200여 명을 학살하였다. 5중대장 연락병이었던 김일호 씨에 의해 현장에서 살아난 정일웅 씨(당시 학생)는 함평사건 희생자유족회의 주선으로 김일호 씨와 재회하였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 다음날인 12월 9일은 월야면 외치부락 주민이 공비를 도와 광주-영광간 도로를 야간에 굴착하여 군작전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며 동조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주민 22명을 가려내어 현장에서 1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동조자가 색출되지 않자 월야 초등학교 뒤와 해보면 금덕리 두리샘 언덕에서 그들 중 17명을 사살하였다. 생존자 윤경중 씨와 주민들에 의하면 1950년 12월 31일에는 해보면 대창리 쌍구령에서, 1951년 1월 12일에는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5중대 군인들이 마을을 소개하며 소재지로 피난을 가는 주민을 무조건 총으로 사살하여 70여 명을 학살하였고, 인근에 있는 나산면 우치리의 경우도 같은 이유로 50여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군인들은 영광군과 함평군의 불갑산 공비토벌을 위해 해보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양민을 학살한 수를 공비토벌의 혁혁한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던 것이다. 월야리의 김용택 씨(당시 45세)에 의하면 5중대는 하루에 공비 300명과 건물 50동을 사살 또는 소각시키는 전과를 올리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락민을 학살하고 집을 불살라 이를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고, 밭에서 일하다 끌려왔던 농민들을 죽이고 그 손에 쥐어진 농구(農具)들을 사살한 공비에게서 얻은 노획물이라 하여 압수해 갔다는 것이었다.
형무소의 재소자 집단학살
형무소의 재소자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쟁 초기 북한이 남한지역을 급속하게 점령함으로써 재소자를 미처 남쪽으로 이동시키지 못해서 발생하게 된다. 이미 이승만 정권이 손쓸 수 없었던 서울과 경기지역의 북한군 점령지에서 인민군이 형무소의 재소자를 석방하자 이승만 정권은 수원 이남의 형무소에서 미군의 입회하에 미결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재소자를 학살하게 된다. 여기에는 대전형무소와 대구형무소, 부산형무소, 전주형무소, 진주형무소 등이 있으며, 당시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의 형무소 수감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와 제주4·3 구속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전형무소의 집단학살은 1950년 7월 여순사건, 제주 4·3 관련자 등의 정치범들로 형무소의 재소자가 꽉 찬 상태에서 발생했다. 당시 형무소에는 일반수를 합쳐 정원 1,200명 시설에 3배가 많은 3∼4,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사상범들은 약 2,000여 명으로 4?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에서도 재소자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 조병천 씨(63세)에 의하면 그의 부친 조용안 씨(당시 39세)는 전쟁발발 이전인 49년 7월에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50년 4월까지 그의 모친이 면회를 가서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발발 이후 전주교도소에서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어 사망신고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조병천 씨는 70년대 후반부터 선친의 죽음에 대해 영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전쟁발발 당시 전주교도소 교도관이었던 박태준 씨를 우연히 만나 그로부터 전주시 효자동 근처에서 교도소 수감자 2,000여 명 이상이 피살당했다는 증언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교도소의 재소자에 대한 학살은 상층부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집단학살이었던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학살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이후 평택이남의 남한 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은 그 실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그 조직과 결성배경, 연맹가입 과정과 통제수단, 인원과 처리문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보도연맹 가입은 이전에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수가 정부로부터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뤄졌고, 당시 정부가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1949년 6월 5일 서울시 중앙본부의 결성을 시작으로 1950년 3월 1단계 조직작업이 끝날 때까지 남한 전역에 걸쳐 그 지역의 검찰과 경찰이 주도하고 행정기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대대적으로 조직 결성이 진행되었다.(한지희, 「국민보도연맹의 결성과 성격」숙명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5, 23∼29쪽)
결성 당시 이승만 정부는 좌익활동을 했거나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 등을 보호하고 지도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다시 말해 “사상전향을 통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상범들을 보호·지도하여 반공국민으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전국적 조직이었던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특히 경상도 전 지역과 전라도에서 빈발하게 된다. 서부경남의 진주, 진양, 산청에서부터 마산, 거제, 남해를 거쳐 삼천포, 사천, 창녕, 창원, 김해, 밀양, 양산에서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전쟁 당시 가장 안전한 후방이었던 부산에서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오제도 씨는 국민보도연맹의 결성과정 중 사상전향자의 보도방침에서 “자발적인 전향동지들이 자기 창의로써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눈부신 국민운동을 전개해서 선험적 역할을 해오던 바…”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80% 이상은 사상과 이념은 물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민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정부는 정권 유지를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잠정적인 내부의 적을 없애는 동시에 인민군이 진주할 경우를 대비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의 수는 약 33만 명, 이 중 80% 정도에 해당하는 25만∼30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우익청년단에 의한 학살
해방 후 우익청년단에 의한 주민들의 학살은 정부수립 이전의 테러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민간인에 대한 우익청년단의 학살과 보복은 반공을 외피로 한 이승만 정권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 특히 제주 4·3에서 보여준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청년단원이 이북출신이라는 점이 결합되어 그 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9·28수복을 계기로 인민군이 물러간 후 국군과 경찰의 통제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우익청년단은 부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찾아 보복을 시작한다. 그런데 각 지역에서 치안유지를 위한 청년단의 활동 내용이나 보복·학살의 형태가 전국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조직적인 학살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 무장대에 의한 학살 중에서 강화지역의 갑곶 나루터와 옥계갯벌에서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학살은 1951년 1월 6~8일 3일간 강화 구대교 옆 갑곶 나루터와 옥림리(옥계) 갯벌에서 발생했다. 학살이 일어난 당시는 9·28 수복 후 민간청년 반공단체인 치안대원과 대한정의단 단원들이 부역한 사람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고문하고 취조하던 시기였다. 1951년 1·4후퇴 당시 그들 중 약 22명이 향토방위 특공대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강화 신문지에 있는 양조장 자리에 본부를 두고 남아 있는 부역자나 월북자 가족들을 연행해 갔다. 서영선 씨의 집에도 12월 27일경 저녁 무렵에 특공대 소속 3명의 기동대원이 복면을 하고 들어와 이곳 저곳을 뒤지다가 아이를 업고 마루에 서 있는 그의 어머니를 끌고 갔다. 그들은 서영선 씨의 어머니 등 부녀자 15명을 포함해 모두 60명 가량을 양조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에 관청리 옛 곡물검사소 건물로 옮겨 가두었다. 그곳에서 향토방위 특공대는 간판을 걸고 일했는데 경찰이 1951년 1월 1,2일 후퇴하게 되자 대신 경찰서를 장악하고 유치장에 사람들을 가두었다가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약 10여 명씩 저녁시간에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 끌고 나와 바다를 향해 세워놓고 뒤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
그 후 특공대는 1월부터 2월말에 걸쳐 갑곶 해안에서 약 300명을 웃도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먼저 학살된 60명은 노인, 부녀자, 갓난아이로 모두 민간인이었고, 그 후의 피해자는 부역을 하고 피난 갔다가 다시 들어온 강화 주민들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향토방위 특공대의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며,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고 서영선 씨는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할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창립배경
특별법 제정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야
올해 2월, 제주에서 있었던 인권학술회의(한국인권재단 주최)에서 몇몇 연구자와 유족들에 의해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중요한 테제로 떠올랐고, 지난 4월부터 민간인 할살에 대한 연구조사와 진상규명 작업의 필요성이 학계와 언론계, 변호사, 인권운동가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 후 수차례의 모임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대표 강정구)'이 구성됐고,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제4회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전남 례 5.19)에서 이 문제의 전문가와 지역의 유족 그리고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직적인 활동과 유족들의 연대사업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연구자와 유족, 관련단체 활동가의 의견수렴과 지원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협의회(준)'가 만들어졌고, 연구자 모임을 중심으로 지난 6월 21일 프레스센터에서 「전쟁과 인권」이라는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게 되었다.
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강정규 교수, 김동춘 교수, 강금실 변호사의 원고가 이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특히 학살문제의 법률적인 검토를 위해 공동변호인단이 법무법인 덕수 · 지평 · 한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집단소송, 입법청원, 헌법소원 제출 등을 통해 유족들을 지원했다. 토론자로 나선 서중석 · 이장희 교수는 주제발표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했다. 물론 이날 피학살자의 유형에 따라 유족회 간 이해관계가 얽혀 중지를 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이 때문에 대구와 경산 유족회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강화, 전남 나주, 화순 그리고 고창 유족회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도 파주와 남양주, 전주교도소의 학살사건이 새롭게 밝혀지거나 유족이 나타나기도 했다.
심포지엄 이후 각계 전문가와 유족들의 논의를 거쳐 전국규모의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창립준비위원회'(위원장 강정구)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구, 대전, 익산, 부산 등지에서 전국의 유족회와 사회운동가, 전문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조직확동과 준비작업을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준비위원회에서는 세부적인 인선작업과 회칙마련을 위한 워크숍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계획과 활동방향 등을 논의하였고 마침내 창립대회를 가졌다.
범국민위원회는 앞으로 민간인 대량학살(genocide)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전국적인 피해실태를 조사, 연구하고 정보의 공유를 통한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 특별법 제정을 한국정부와 미국에 촉구할 예정이다.
범국민위원회는 또 정부가 나서서 유족과 관련 전문가를 포함하는 진상규명기구를 발족시키도록 하고,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피해 유족과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유족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실시하도록 촉구할 계획이다.
후원을 위한 계좌번호 : 국민은행 367-01-0050-121
예금주 : 민간인학살규명범국민위
20세기의 학살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민간인에 대한 살상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구조화된 폭력형태로서 다른 국민이나 주민에게 집단의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상호 증오와 살상의 동기는 그것들 자체가 이미 사회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존재 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역사적 증오와 살상의 동기들이 실제로 엄청난 비극을 실행에 옮기도록 동원하는 데에 있다. 집단적 증오를 영속화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제도들을 통한 사회화라는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의 이념이 집단적 기억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살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 현대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해방 후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가해자에 따라 국군과 미군, 그리고 경찰과 사적 보복을 포함한 우익청년단에 의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피학살자의 성격에 따라서는 산간벽촌의 무지렁이 주민에서부터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재소자와 해방 후 좌익활동가에 대한 정부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들 수 있다.
국군에 의한 집단학살
전쟁발발 후 남한주민들은 낙동강 이남의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이 북한의 점령지가 됨에 따라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 수복 이후 피해를 입게 된다. 국군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주민들을 학살하게 되었고,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태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된 공비를 소탕하는 작전과정에서 역시 무고한 주민을 죽이게 된다.
전남 함평군에서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2일 사이에 주민 524명이(월야면 350명,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중대본부가 있는 함평군 해보면 문장에서 장성군 삼서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군하다가 월야면 정산리 장교와 동촌마을 입구에서 공비의 습격을 받아 국군 3명이 피해를 당했다. 현장 목격자인 동촌마을의 곽상일 씨(당시 16세)에 의하면 그날 밤에 공비들이 ‘승전축하잔치’를 하며 인근마을 주민을 강제로 모아놓고 봉화를 피우고 징과 꽹과리를 치며 국군을 조롱하자 이에 격분한 20연대 5중대 군인들이 다음날인 12월 6일 장교와 동촌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모이게 한 후 주민 7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5중대장의 인솔하에 중대 병력이 7개 부락─지변, 내동, 동산, 순촌, 송계, 괴정, 성주─주민 700여 명을 “도로공사 하러 가니 나이에 관계없이 모이도록” 하고 15세 미만의 아이들은 마을로 가서 가옥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한편 주민들 중에서 15세부터 45세 사이의 청·장년을 별도로 분리하여 그들을 사살하였다. 죽지 않은 자를 확인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자들은 불을 끄러 가라”고 하여 일어선 이를 다시 사살하고, 또 그렇게 외치면 일어선 자를 3번이나 사살 하였다. 끝내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확인 사살을 하여 200여 명을 학살하였다. 5중대장 연락병이었던 김일호 씨에 의해 현장에서 살아난 정일웅 씨(당시 학생)는 함평사건 희생자유족회의 주선으로 김일호 씨와 재회하였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증언하였다.
그 다음날인 12월 9일은 월야면 외치부락 주민이 공비를 도와 광주-영광간 도로를 야간에 굴착하여 군작전 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며 동조자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주민 22명을 가려내어 현장에서 1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동조자가 색출되지 않자 월야 초등학교 뒤와 해보면 금덕리 두리샘 언덕에서 그들 중 17명을 사살하였다. 생존자 윤경중 씨와 주민들에 의하면 1950년 12월 31일에는 해보면 대창리 쌍구령에서, 1951년 1월 12일에는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5중대 군인들이 마을을 소개하며 소재지로 피난을 가는 주민을 무조건 총으로 사살하여 70여 명을 학살하였고, 인근에 있는 나산면 우치리의 경우도 같은 이유로 50여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군인들은 영광군과 함평군의 불갑산 공비토벌을 위해 해보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양민을 학살한 수를 공비토벌의 혁혁한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던 것이다. 월야리의 김용택 씨(당시 45세)에 의하면 5중대는 하루에 공비 300명과 건물 50동을 사살 또는 소각시키는 전과를 올리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락민을 학살하고 집을 불살라 이를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고, 밭에서 일하다 끌려왔던 농민들을 죽이고 그 손에 쥐어진 농구(農具)들을 사살한 공비에게서 얻은 노획물이라 하여 압수해 갔다는 것이었다.
형무소의 재소자 집단학살
형무소의 재소자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쟁 초기 북한이 남한지역을 급속하게 점령함으로써 재소자를 미처 남쪽으로 이동시키지 못해서 발생하게 된다. 이미 이승만 정권이 손쓸 수 없었던 서울과 경기지역의 북한군 점령지에서 인민군이 형무소의 재소자를 석방하자 이승만 정권은 수원 이남의 형무소에서 미군의 입회하에 미결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재소자를 학살하게 된다. 여기에는 대전형무소와 대구형무소, 부산형무소, 전주형무소, 진주형무소 등이 있으며, 당시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의 형무소 수감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와 제주4·3 구속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전형무소의 집단학살은 1950년 7월 여순사건, 제주 4·3 관련자 등의 정치범들로 형무소의 재소자가 꽉 찬 상태에서 발생했다. 당시 형무소에는 일반수를 합쳐 정원 1,200명 시설에 3배가 많은 3∼4,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사상범들은 약 2,000여 명으로 4?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에서도 재소자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 조병천 씨(63세)에 의하면 그의 부친 조용안 씨(당시 39세)는 전쟁발발 이전인 49년 7월에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50년 4월까지 그의 모친이 면회를 가서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발발 이후 전주교도소에서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어 사망신고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조병천 씨는 70년대 후반부터 선친의 죽음에 대해 영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전쟁발발 당시 전주교도소 교도관이었던 박태준 씨를 우연히 만나 그로부터 전주시 효자동 근처에서 교도소 수감자 2,000여 명 이상이 피살당했다는 증언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교도소의 재소자에 대한 학살은 상층부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집단학살이었던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학살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이후 평택이남의 남한 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은 그 실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그 조직과 결성배경, 연맹가입 과정과 통제수단, 인원과 처리문제 등이 밝혀지고 있다. 보도연맹 가입은 이전에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수가 정부로부터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뤄졌고, 당시 정부가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1949년 6월 5일 서울시 중앙본부의 결성을 시작으로 1950년 3월 1단계 조직작업이 끝날 때까지 남한 전역에 걸쳐 그 지역의 검찰과 경찰이 주도하고 행정기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대대적으로 조직 결성이 진행되었다.(한지희, 「국민보도연맹의 결성과 성격」숙명여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5, 23∼29쪽)
결성 당시 이승만 정부는 좌익활동을 했거나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 등을 보호하고 지도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다시 말해 “사상전향을 통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사상범들을 보호·지도하여 반공국민으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전국적 조직이었던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특히 경상도 전 지역과 전라도에서 빈발하게 된다. 서부경남의 진주, 진양, 산청에서부터 마산, 거제, 남해를 거쳐 삼천포, 사천, 창녕, 창원, 김해, 밀양, 양산에서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전쟁 당시 가장 안전한 후방이었던 부산에서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오제도 씨는 국민보도연맹의 결성과정 중 사상전향자의 보도방침에서 “자발적인 전향동지들이 자기 창의로써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눈부신 국민운동을 전개해서 선험적 역할을 해오던 바…”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80% 이상은 사상과 이념은 물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민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정부는 정권 유지를 공고히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잠정적인 내부의 적을 없애는 동시에 인민군이 진주할 경우를 대비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의 수는 약 33만 명, 이 중 80% 정도에 해당하는 25만∼30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우익청년단에 의한 학살
해방 후 우익청년단에 의한 주민들의 학살은 정부수립 이전의 테러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민간인에 대한 우익청년단의 학살과 보복은 반공을 외피로 한 이승만 정권의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 특히 제주 4·3에서 보여준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과 청년단원이 이북출신이라는 점이 결합되어 그 정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9·28수복을 계기로 인민군이 물러간 후 국군과 경찰의 통제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우익청년단은 부역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찾아 보복을 시작한다. 그런데 각 지역에서 치안유지를 위한 청년단의 활동 내용이나 보복·학살의 형태가 전국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조직적인 학살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 무장대에 의한 학살 중에서 강화지역의 갑곶 나루터와 옥계갯벌에서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학살은 1951년 1월 6~8일 3일간 강화 구대교 옆 갑곶 나루터와 옥림리(옥계) 갯벌에서 발생했다. 학살이 일어난 당시는 9·28 수복 후 민간청년 반공단체인 치안대원과 대한정의단 단원들이 부역한 사람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고문하고 취조하던 시기였다. 1951년 1·4후퇴 당시 그들 중 약 22명이 향토방위 특공대를 결성하여 비밀리에 강화 신문지에 있는 양조장 자리에 본부를 두고 남아 있는 부역자나 월북자 가족들을 연행해 갔다. 서영선 씨의 집에도 12월 27일경 저녁 무렵에 특공대 소속 3명의 기동대원이 복면을 하고 들어와 이곳 저곳을 뒤지다가 아이를 업고 마루에 서 있는 그의 어머니를 끌고 갔다. 그들은 서영선 씨의 어머니 등 부녀자 15명을 포함해 모두 60명 가량을 양조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에 관청리 옛 곡물검사소 건물로 옮겨 가두었다. 그곳에서 향토방위 특공대는 간판을 걸고 일했는데 경찰이 1951년 1월 1,2일 후퇴하게 되자 대신 경찰서를 장악하고 유치장에 사람들을 가두었다가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약 10여 명씩 저녁시간에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 끌고 나와 바다를 향해 세워놓고 뒤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
그 후 특공대는 1월부터 2월말에 걸쳐 갑곶 해안에서 약 300명을 웃도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먼저 학살된 60명은 노인, 부녀자, 갓난아이로 모두 민간인이었고, 그 후의 피해자는 부역을 하고 피난 갔다가 다시 들어온 강화 주민들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향토방위 특공대의 자의적인 판단일 뿐이며,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고 서영선 씨는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할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창립배경
특별법 제정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야
올해 2월, 제주에서 있었던 인권학술회의(한국인권재단 주최)에서 몇몇 연구자와 유족들에 의해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중요한 테제로 떠올랐고, 지난 4월부터 민간인 할살에 대한 연구조사와 진상규명 작업의 필요성이 학계와 언론계, 변호사, 인권운동가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 후 수차례의 모임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대표 강정구)'이 구성됐고,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제4회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전남 례 5.19)에서 이 문제의 전문가와 지역의 유족 그리고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직적인 활동과 유족들의 연대사업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연구자와 유족, 관련단체 활동가의 의견수렴과 지원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협의회(준)'가 만들어졌고, 연구자 모임을 중심으로 지난 6월 21일 프레스센터에서 「전쟁과 인권」이라는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게 되었다.
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강정규 교수, 김동춘 교수, 강금실 변호사의 원고가 이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특히 학살문제의 법률적인 검토를 위해 공동변호인단이 법무법인 덕수 · 지평 · 한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집단소송, 입법청원, 헌법소원 제출 등을 통해 유족들을 지원했다. 토론자로 나선 서중석 · 이장희 교수는 주제발표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했다. 물론 이날 피학살자의 유형에 따라 유족회 간 이해관계가 얽혀 중지를 모으기가 어려웠는데 이 때문에 대구와 경산 유족회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강화, 전남 나주, 화순 그리고 고창 유족회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도 파주와 남양주, 전주교도소의 학살사건이 새롭게 밝혀지거나 유족이 나타나기도 했다.
심포지엄 이후 각계 전문가와 유족들의 논의를 거쳐 전국규모의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창립준비위원회'(위원장 강정구)를 구성했다. 그리고 대구, 대전, 익산, 부산 등지에서 전국의 유족회와 사회운동가, 전문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조직확동과 준비작업을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준비위원회에서는 세부적인 인선작업과 회칙마련을 위한 워크숍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계획과 활동방향 등을 논의하였고 마침내 창립대회를 가졌다.
범국민위원회는 앞으로 민간인 대량학살(genocide)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전국적인 피해실태를 조사, 연구하고 정보의 공유를 통한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 특별법 제정을 한국정부와 미국에 촉구할 예정이다.
범국민위원회는 또 정부가 나서서 유족과 관련 전문가를 포함하는 진상규명기구를 발족시키도록 하고, 군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피해 유족과 국민들에게 사죄하고, 유족들에게 합당한 배상을 실시하도록 촉구할 계획이다.
후원을 위한 계좌번호 : 국민은행 367-01-0050-121
예금주 : 민간인학살규명범국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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