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
2000/2000년 10월 :
2000/10/01 00:00
남북의 두 정상이 ‘6 · 15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한 지 100일이 지났다. 알다시피 그 사이 엄청난 일이 많이도 벌어졌다.
이제 통일은, 그저 교과서 속에나 나오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가능성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 먼길 돌아 이제야 가까스로 ‘냉전의 고도’를 탈출했건만, 아직 걸어온 길보다는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통일부를 출입하며 남북관계와 관련한 기사를 쓰고 있는 현장 기자인 내게 ‘평화와 통일’의 관계는 무척이나 버거운 짐이다. 고백컨대 난 ‘통일’이 두렵다. 타자에 대한 관용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갑작스런 통일이란 재앙일 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난 통일보단 평화공존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민은 남는다. ‘평화공존으로 끝인가? 통일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통일=선’이라는 논리는 갔다”
총 166쪽에 불과한 얇은 책 한 권을 소개한다.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지음, 책세상 펴냄, 2000년)이 그것이다. 십수 년 간 저 뜨거웠던 통일운동의 한복판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은 지은이의 고민의 궤적이 짙게 배어 있다. 무엇보다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그의 ‘독특함’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실 좀 단순화해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지금껏 통일운동가는 평화운동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평화운동가들은 다른 측면에서 통일운동에 무관심했다.
이제 책 얘기로 넘어가자.
지은이는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요약해놓았다.
“‘모든 통일이 선이다’라고 주장하던 시간은 지났다. 온 겨레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올 통일과정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세력과 전망이 없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가오는 통일은 어떠한 형태일지라도 더 이상 선이 아니다. 통일과정을 이끌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과정을 잘 이끌어갈 세력 형성, 이것이 200년대 통일운동이 나아갈 방향이다. 2000년대 통일운동의 소명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통일운동의 전망과 방법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평화는 강요된 질서가 아니라 ‘어울림’이다. 남과 북을 어울릴 수 있게 하는 통일운동의 바탕은 곧 한반도에서 특수한 형태의 평화운동이다. 지혜롭고 창조적으로 개척해가는 사람의 발길이 곧 통일로 가는 길이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한국사회에는 언젠가부터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대북관이 남북관계를 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이 점에선 통일운동세력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주체사상파’로 불리는 한총련, 범민련 등 한국사회의 주류 통일운동세력은 체제 대안적 관점에서 북한을 대한다. 반면 오랜 냉전세력인 『조선일보』는 물론 한때 ‘주사파’였으나 이젠 전쟁을 통해서라도 북한을 민주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전의 민족민주혁명당 관계자 등 북한민주화론자들도 체제 대안적 관점에서 북한을 대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70,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북한사회의 존재는 대안적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체제 대안적 관점은 21세기 남북관계를 풀어가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일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아닐까. 이는 지은이의 주장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국가보안법이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걸림돌의 하나라는 데에는, 적어도 민주세력 안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하다. 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100만이 넘는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현실과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사회의 분배구조를 왜곡시키고 사회복지 예산을 턱없이 낮은 수준에 묶어두는 주범의 하나라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통일은 ‘하나’이기 이전에 ‘평화’이다
그렇다면 북한사회가 민주사회든 아니든 우리는 국가보안법과, 60만 군대, 주한미군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는 남북대치 상황을 해체해 평화공존 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남쪽만의 노력으로는 어림없다. 남북관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체제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엔 남북관계의 발전이 절실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북한 체제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북한과 대화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은 경청할 만한 것이다.
또 하나 되짚어보아야 할 게 있다. 통일은 정녕 ‘하나가 되는 것’일 뿐일까? 한국사회엔 ‘조국은 하나다’ 식의 발상에서 비롯된 급속한 통합을 부르짖는 통일관이 강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왜 가난한 애들을 먹여 살려야 되지?’라는 요즘 신세대들의 통일기피증과는 다른 차원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북한의 존재, 남북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보안법과 60만에 이르는 군대와 의무 징집, 주한미군의 존재를 빼놓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삶의 질은 논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통일은 한민족이 한핏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단계에서 추구해야 할 통일은 ‘초기 단계의 특수 상태로서 평화공존’이라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평화공존도 통일이고, 현 시기의 통일상태는 평화공존이며, 이 상태가 역동적으로 발전해가며 통일국가가 강화, 발전하는 것이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통일을 맞이하기 위해 ‘관용’을 연습해야 한다. 관용은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하는 행위’이다.” 관용은 민주주의를 튼실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관용에 익숙하지 않다. 이는 조선족동포와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배타적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상사들의 비인간적 대우에 발발해 선상반란을 일으켜 11명의 한국인을 도륙했던 96년 8월의 ‘페스카마호’ 사건은 그 극적 상징이다.
평화와 통일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엔 통일운동단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평화운동 단체는 가물에 콩나듯 하는 게 현실이다. 이데올로기적 접근법이 실사구시적 태도를 억누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ICBL)은 한국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운동은 핵무기 등 거대군축에만 집중해왔던 반전평화운동에 ‘미시군축’이라는 개념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새롭고, 세계 각국 비정부기구의 주도 아래 130여 개 국가(미국과 한국은 불참)가 서명한,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이라는 지구적 강제틀을 만들어냈다. ‘탈냉전시대 국제시민운동의 새로운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운동은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의 내적 연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비무장지대 남쪽에만 100만 개 이상의 대인지뢰가 묻혀 있는데도 남쪽 사회는 이 운동에 그리 관심이 높지 않다. 대인지뢰는 그저 홍수 때면 어디론가 떠밀려 내려와 애꿋은 농민의 발목을 잘라버리고 마는 어찌할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일 뿐이라는 체념 때문일까?
이제 통일은, 그저 교과서 속에나 나오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 가능성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 먼길 돌아 이제야 가까스로 ‘냉전의 고도’를 탈출했건만, 아직 걸어온 길보다는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통일부를 출입하며 남북관계와 관련한 기사를 쓰고 있는 현장 기자인 내게 ‘평화와 통일’의 관계는 무척이나 버거운 짐이다. 고백컨대 난 ‘통일’이 두렵다. 타자에 대한 관용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갑작스런 통일이란 재앙일 뿐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난 통일보단 평화공존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민은 남는다. ‘평화공존으로 끝인가? 통일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통일=선’이라는 논리는 갔다”
총 166쪽에 불과한 얇은 책 한 권을 소개한다.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지음, 책세상 펴냄, 2000년)이 그것이다. 십수 년 간 저 뜨거웠던 통일운동의 한복판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은 지은이의 고민의 궤적이 짙게 배어 있다. 무엇보다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그의 ‘독특함’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실 좀 단순화해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지금껏 통일운동가는 평화운동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평화운동가들은 다른 측면에서 통일운동에 무관심했다.
이제 책 얘기로 넘어가자.
지은이는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요약해놓았다.
“‘모든 통일이 선이다’라고 주장하던 시간은 지났다. 온 겨레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올 통일과정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세력과 전망이 없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가오는 통일은 어떠한 형태일지라도 더 이상 선이 아니다. 통일과정을 이끌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과정을 잘 이끌어갈 세력 형성, 이것이 200년대 통일운동이 나아갈 방향이다. 2000년대 통일운동의 소명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통일운동의 전망과 방법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평화는 강요된 질서가 아니라 ‘어울림’이다. 남과 북을 어울릴 수 있게 하는 통일운동의 바탕은 곧 한반도에서 특수한 형태의 평화운동이다. 지혜롭고 창조적으로 개척해가는 사람의 발길이 곧 통일로 가는 길이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한국사회에는 언젠가부터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대북관이 남북관계를 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이 점에선 통일운동세력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주체사상파’로 불리는 한총련, 범민련 등 한국사회의 주류 통일운동세력은 체제 대안적 관점에서 북한을 대한다. 반면 오랜 냉전세력인 『조선일보』는 물론 한때 ‘주사파’였으나 이젠 전쟁을 통해서라도 북한을 민주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전의 민족민주혁명당 관계자 등 북한민주화론자들도 체제 대안적 관점에서 북한을 대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70,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북한사회의 존재는 대안적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체제 대안적 관점은 21세기 남북관계를 풀어가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일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아닐까. 이는 지은이의 주장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국가보안법이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 걸림돌의 하나라는 데에는, 적어도 민주세력 안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하다. 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100만이 넘는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현실과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사회의 분배구조를 왜곡시키고 사회복지 예산을 턱없이 낮은 수준에 묶어두는 주범의 하나라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통일은 ‘하나’이기 이전에 ‘평화’이다
그렇다면 북한사회가 민주사회든 아니든 우리는 국가보안법과, 60만 군대, 주한미군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는 남북대치 상황을 해체해 평화공존 구조로 바꿔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는 남쪽만의 노력으로는 어림없다. 남북관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체제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엔 남북관계의 발전이 절실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북한 체제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북한과 대화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은 경청할 만한 것이다.
또 하나 되짚어보아야 할 게 있다. 통일은 정녕 ‘하나가 되는 것’일 뿐일까? 한국사회엔 ‘조국은 하나다’ 식의 발상에서 비롯된 급속한 통합을 부르짖는 통일관이 강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왜 가난한 애들을 먹여 살려야 되지?’라는 요즘 신세대들의 통일기피증과는 다른 차원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북한의 존재, 남북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보안법과 60만에 이르는 군대와 의무 징집, 주한미군의 존재를 빼놓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삶의 질은 논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통일은 한민족이 한핏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단계에서 추구해야 할 통일은 ‘초기 단계의 특수 상태로서 평화공존’이라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평화공존도 통일이고, 현 시기의 통일상태는 평화공존이며, 이 상태가 역동적으로 발전해가며 통일국가가 강화, 발전하는 것이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통일을 맞이하기 위해 ‘관용’을 연습해야 한다. 관용은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하는 행위’이다.” 관용은 민주주의를 튼실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관용에 익숙하지 않다. 이는 조선족동포와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배타적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상사들의 비인간적 대우에 발발해 선상반란을 일으켜 11명의 한국인을 도륙했던 96년 8월의 ‘페스카마호’ 사건은 그 극적 상징이다.
평화와 통일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엔 통일운동단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평화운동 단체는 가물에 콩나듯 하는 게 현실이다. 이데올로기적 접근법이 실사구시적 태도를 억누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ICBL)은 한국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운동은 핵무기 등 거대군축에만 집중해왔던 반전평화운동에 ‘미시군축’이라는 개념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새롭고, 세계 각국 비정부기구의 주도 아래 130여 개 국가(미국과 한국은 불참)가 서명한,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이라는 지구적 강제틀을 만들어냈다. ‘탈냉전시대 국제시민운동의 새로운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운동은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의 내적 연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비무장지대 남쪽에만 100만 개 이상의 대인지뢰가 묻혀 있는데도 남쪽 사회는 이 운동에 그리 관심이 높지 않다. 대인지뢰는 그저 홍수 때면 어디론가 떠밀려 내려와 애꿋은 농민의 발목을 잘라버리고 마는 어찌할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일 뿐이라는 체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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