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남단 방환기 씨의 7남매 상봉
“거, 울지들 말어! 시끄럿.”

워커힐호텔 735호실을 나서는 방환길 씨(60세) 가족은 초상 치른 사람들처럼 울고 있었다.

누이 현구(74세), 여동생 금자(64세), 순자(62세), 문자(57세), 환설(53세). 오늘밤이 지나고 나면 북에서 온 형 환기 씨(66세)는 순안공항으로 향한다. 다섯 여형제들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며 시끄럽게 오빠를 찾지만, 남쪽에 홀로 남아 다섯 여형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할 환길 씨는 그들처럼 편하게 울지도 못한다. 우는 동생들을 차례로 야단치고 화도 내보지만 소용이 없다. 줄줄이 서서 뒤로 넘어가며 통곡하는 그들을 무슨 재간으로 말리랴.

‘울 수도 없는 내 마음은 오죽하겠니. 그러니 이젠 그쳐라. …에라, 그래, 울어라! 억장을 치고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나다. 대신 너희라도 실컷 울어 부모님의 한이나 달래드려라.’

올림픽파크텔로 향하는 66호 차에 올라 환길 씨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처연한 눈빛으로 이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기자에게 손을 내저으며 ‘인터뷰 따위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굳이 마이크를 들이대지 않아도 그들의 얼굴에선 착잡한 심경을 읽을 수 있다. 17일 저녁, 식사를 마쳤을 무렵, 올림픽파크텔로 갔다.

“난 할 말 없어요. 이미 다 했잖아요.”

환길 씨는 복받친 마음이 아직도 누그러들지 않은 듯 보였다. 무슨 말로 달래야 좋을지 몰라 사진핑계를 대니 짧게 몇 마디 한다.

“20kg밖에 못 가져간다 해서 짐 싸느라 아무 얘기도 못 했어요. 학용품이랑 속옷이랑 그저 가벼운 것들을 골라 몇 개씩 포장하느라고 정말 아무것도 못 했어. 그리고 그냥 뭐….”

그는 가슴을 친다. 몇 번씩 가슴을 후려치며 몇시간 동안 꿋꿋이 잘 참아내던 눈물을 이윽고 터뜨리고 만다.

“형이 그래요. 죽을 때까지 이 응어리진 한은 안 내려갈 거라고. 평생 어머니가 한으로 남아 여기 그대로 한 덩어리가 뭉쳐 있을 거라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형이 그런 말을 하며 술을 한잔씩 따라줘서 우리 모두가 울었어요. 우리가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흐흐흑). 부둥켜안고 그냥 막 눈물이 나서, 나는…. 내가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형이랑 이렇게 딱 둘이 안았는데, 둘다 심장이 정말 쿵쿵… 막 뛰는 거야…. 형을 안는 게 이게 마지막이다 싶으니까, 아주 내가…. 이건 이산가족이 아니면 아무도 몰라.”

봇물처럼 터져버린 눈물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옆에 있던 아내마저 흐느낀다. 남들한테 특별히 잘못하지 않고 살았건만 오늘 또다시 겪어야 할 생이별이 가슴 찢어진다. 이제 헤어짐의 고통은 고이 접어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가슴 속 한켠에 남겨 두어야 한다. 이를 어쩌리.

50년간 변치 않고 생사를 알려준 떡과 쌀

충북 진천군 이월면이 고향인 방환기 씨. 그는 열일곱 되던 해, 의용군에 입대했다. 평소 친구들로부터 지악스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독했던 사람.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족의 연명을 위해 장에서 동태 같은 생선을 떼어다 마을 어귀에서 팔며 장사했던 위인.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생각해내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그는, 늘 똑똑한 형으로 환길 씨의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 환기 씨가 의용군에 입대하던 날, 어머니 강래월 씨(63년 사망)는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에게 마지막 도시락을 싸줬다. 그후로 1963년 눈감기 전까지 어머니 강래월 씨는 단 한번도 큰아들 환기 씨와 마주앉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터로 간 아들의 생사가 궁금했던 어머니는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다녔다. 교통편도 없던 시절, 이틀 밤 삼일 낮을 걸어가 점쟁이의 얘기를 듣고 와야 직성이 풀렸던 것.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강래월 씨는 시골의 조그만 암자에 작은 불상을 놓고 기도하는 여승을 찾아갔다. 백일 때나 먹음직한 백설기와 쌀을 잔뜩 해 이고 가 밤새도록 불공을 드리고 난 다음, 돌아가려 채비하는 어머니 강래월 씨에게 여승은 떡과 쌀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떡과 쌀이 변하면 그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고, 이게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살아 있으니 그렇게 아시오.”

그후로 어머니 강래월 씨는 그 떡과 쌀을 형 환기 씨가 의용군에 입대하기 전 입고 다녔던 재킷 왼쪽 주머니에 한지로 잘 싸서 넣어두고 다락방에 보관했다.

어머니 강래월 씨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지 환기 씨는 죽지 않고 50년 만에 살아 돌아왔다. 세살배기 막내 환설이 쉰을 넘긴 지천명의 나이가 됐고, 열 살짜리 꼬마이던 환길이 환갑을 맞는단다. 곱던 누이는 지팡이 없이 못 다니는 노인이 됐고, 둘째 누이 은자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다.

환길 씨는 형을 만나면 제일 먼저 어머니 얘기를 하며 떡과 쌀을 전해줄 작정이었다. ‘어머니의 한이 서린 것이니 형이 가져가!’ 한참동안 울던 형 환기 씨는 진정하고 이렇게 말했단다. “이 떡과 쌀이 변하면 내가 죽은 것이고, 이게 변치 않으면 내가 산 것이니 이건 너희들이 갖고 있으면서 내 생사를 알아둬라. 이건 내가 가져가지 않겠다.” 7남매는 또다시 부둥켜안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살던 이월면은 옛날 그대로니?”

환기 씨는 이북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가족 없이 홀로 사니 외로워 자식을 많이 낳았단다. 1남 4녀. 모두 출가해 손자 손녀들이 있다고. 함흥에 사는 환기 씨는 이번 방남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싸준 도시락보를 가져왔다.

“광목천 네 귀퉁이를 어머니가 손재봉틀로 박아 만든 도시락보를 형이 가지고 왔더라구요. 이북에서 형은 그 광목천을 깔고 남쪽을 향해 어머니께 제사를 올렸대요. 두 군데나 떨어진 걸 형은 기워가지고 50년간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더라구요. 저희가 쌀과 떡을 못 버린 것처럼 형도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밥 싸주신 걸 잊지 못했던 것이지요.”

50년 만의 만남이지만 7남매는 울다웃다 너무나 정겨웠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았던 얘기, 형이 좋아했던 음악·노래이야기, 철봉하다 뼈가 튕그러져 고생했던 얘기. 밤새 얘기해도 못 다할 이야기보따리가 나왔다. 이렇게 길고도 먼 50년 세월동안 환길 씨는 형 환기 씨를 만나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62년 5월 일본에서 형한테 가족 안부를 묻는 편지가 왔어요. 박정희 시절엔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의 집이 언제나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북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늘 빨갱이의 너울을 쓰고 살아야했죠. 솔직히 그 당시 따발총 앞에서 의용군 안 가겠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하튼 일본에서 온 편지는 형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반공이 국시이던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쓴 조작편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91년 중국 연변 조선족 여자가 제가 다니던 대림산업 현장 식당에서 일했어요. 그 여자가 제 명찰을 보더니 대뜸 ‘우리 이모부도 방씨인데’ 하는 거예요. 귀가 번쩍 뜨여 수소문했고, 2년 만에 중국에 있는 방득림이란 사람을 통해 형이 함흥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됐어요. 그후론 방득림-옥선-우리 형 이렇게 삼각구도로 서신을 교환했어요. 어떤 때는 진짜같기도, 또 가짜 같기도 한 서신교환이었죠.”

이런 노력이 오늘 형제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환길 씨는 형에게 줄 선물로 양복, Y셔츠, 카메라, 시계, 화장품, 속옷, 학용품 등 꾹꾹 눌러 한짐 쌌다. 형에게선 선물로 북한산 보드카, 화병, 들쭉술 등 북에서 준비한 선물세트 1박스를 받았다. 삼일 밤 사흘 낮, 너무나 짧은 일정이라 50년 동안 쌓인 얘기도 다 못했다. 형은 고향소식을 계속 물었다. “이월면은 옛날 그대로니?”

“아니야, 형. 지금은 3∼4층짜리 건물들이 꽉꽉 들어섰어. 옛날의 이월면이 아니지. 삼송리 우리 살던 집에 창고 있었잖아? 난 그 창고 허물고난 자리 뒤에 집 짓고 살아.”

형 환기 씨가 한번만이라도 와보면 좋으련만. 서울에서 일정을 마치고 다시 북으로 가야 한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아직도 생사 소식 한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가족이 천만 아니던가.

“우린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바라는 건 지금껏 상봉하지 못한 다른 가족들 다 만나고 한번 더 차례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요. 그저 서신왕래라도 하게 해주면 좋겠어요. 형이 마지막으로 당부하대요. 제사는 형이 모셔가지만 기일 때 너희들도 모여 부모님을 추모하라고. 저희들은 형이 말씀하신 대로 따르려 해요. 언젠간 살아 있는 7남매가 모여 편안히 제를 올릴 수 있겠죠.”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2000/09/01 00:00 2000/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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