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녘의 따뜻한 인정 북에 전하렵니다
2000/2000년 09월 :
2000/09/01 00:00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
나는 통일의 노래를 부르다
목이 쉬어 부를 수 없으면 입술로 부르고,
그것도 못 하면 눈으로 부르고,
장님이 되면 심장으로 부르겠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중 - 김동기 -
광주 각하동 무등택시 하차장 앞. 연락을 해도 무응답이다. ‘바쁜 일정에 혹시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타전을 해보았지만 역시 발신음만 울릴 뿐 응답이 없다. 혼자 찾아보리라 생각하고 행인 몇 사람을 잡았다. 그러나 ‘통일의 집’을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 상점 앞에서 내내 서성거리는 이방인에게 눈길을 주던 한 마을 주민.
“어디 찾으신다구요? 통일의 집이요? 바로 저깁니다.”
통일의 집은 앞 건물에 가려서 안 보일 뿐이었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층 양옥집. 대문 앞에는 ‘통일의 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층 계단을 내려오는 한 사람이 보인다. 먼저 말을 건네기도 전에 안에서 “안녕하시오”라고 인사를 한다. “김동기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김동기 선생님, 아까 밖에 나갔었는데 들어왔는지 모르겠오. 일단 먼저 올라가 기다리세요”라며 깍듯이 맞아주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통일의 집’에서 막내로 불리는 이재룡 씨(56세)였다.
남자들만 사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깨끗이 정리된 공간들. 이곳에 머물고있는 비전향 장기수는 3명, 모두 9월 초로 예정된 북으로의 송환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왠지 쓸쓸한 기운이 돈다. 58명 송환자 명단에 올라있는 비전향 장기수 중 한 사람, 김동기(68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가 나온다.
“이제 간다고 하니, 연일 이곳 저곳에서 만나자고 해요. 조기축구회에서까지 나를 보자고 하니…. 지금도 나갔다가 들어와서, 찬물 좀 끼얹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았습니까?”
“이 앞에서 ‘통일의 집’이 어디냐고 물어봤습니다.”
“근데, 어딘 줄 알아요? 아이구, 간첩들이 사는 집인데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는 허허, 웃었다. 간첩? 그렇다. 신고하면 3000만 원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알리는 스티커에서 볼 수 있는 단어. 그는 간첩이었다. 1932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평양상업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상업성(남한의 국세청에 해당)에 과장까지 지내다가 1966년 경상남도 진양군에 정치공작원으로 내려왔다. 주민의 신고로 그는 군경에 의해 허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67년 12월 무기형이 확정되어 부산, 대구, 대전, 광주 감옥에서 33년간 옥살이를 마치고 작년 2월 25일 출소했다.
“그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어요. 인간의 경제적, 인격적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신념과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고문하고 구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승리하고 싶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으로 나를 무릎 꿇게 하려는 사람들, 차라리 죽음으로 대항하고 싶었어요.”
인간은 참 이상하다. 그가 거세게 저항하면 할수록 고문은 심해졌다. 그가 더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그는 죽기로 각오하고, 죽은 시체마냥 고문을 감내하자 그를 고문하는 사람들은 제풀에 죽어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버틴 것이 33년,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살이는 남들의 곱절로 했다. “북에 있는 가족들 소식은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북에는 아내(현재 나이 64세)와 아들(현재 나이 37세)이 있습니다. 제가 북에서 나올 때, 아들은 갓 돌이 지난 나이였죠. 7월 16일 새벽 1시에 독일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이 건강하게 잘 있으니 걱정말고 있으라”고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듣고있는 동안 그가 느끼고 있는 인생의 무상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감옥에서의 33년 후, 이제는 북으로 돌아간다. 아들은 장성해 결혼을 했을테고, 자신은 손주도 볼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은 아내와 비슷한 나이의 할머니들의 얼굴을 열심히 봅니다. 내 기억 속의 아내는 주름 하나 없던 20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봐 두어 북에 가서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날 감옥에서의 기억도 아련하기만 하다. 과연 내가 거기에 있기나 했단 말인가, 의심이 갈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몸의 자세를 바꾸었다. 검거 당시 총상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문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신경에 마비가 오고, 몸 이곳저곳이 쑤신다고 했다.
북으로 갈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기쁘기도 하지만, 그는 남쪽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한 모양이었다. 같은 동지들 중엔 감옥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전향을 한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나보다 몽둥이 찜질에 약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북으로 가고, 그들은 갈 수 없는 겁니다.”라며 착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밤에 누워있으면 이제까지 그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남한 사람들 얼굴도 하나 하나 떠올라 뒤척일 때도 있다.
“따뜻한 심정을 갖고 북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남에도 따뜻한 사람들,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노라고. 남북합의서를 통해 남북 정상이 합의해놓은 화해와 평화에 대해 이제는 얘기해야겠죠.”
그는 요즘 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그가 굳이 그렇게 일을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돈이 필요해 그런 줄 알고, 어느 날은 아주머니 몇 명이 지나가면서 1만 원 지폐를 그에게 푹, 찔러주고 달아났다. 다음날 아침, 아주머니들이 출근하는 길을 지키고 있다가 다시 그 돈을 되돌려 주면서 “나도 지금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요. 그런데 이렇게 돈을 받으면 뇌물이지 않소?”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는 요즘 그렇게 여유가 있다.
잠시 후, 책상을 열어 사람들이 보내준 선물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옥으로 만든 팔찌와 반지를, 또 어떤 이는 최남단의 섬 마라도의 흙을, 모두들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 그를 북으로 떠나보내고자 한 것이다.
“가지고 싶은 책이 있으면 골라요. 젊은이들이 이 집을 찾으면 난 책을 선물한다오.”
둘러보다가 막심 고리끼의 『어느 쓸모 없는 인간의 삶』을 골랐다. 그리고는 돌아앉아 사진기를 손보고 있는데, 그는 책표지를 수건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수건을 입에 가져가 침을 묻히고 또 책표지를 열심히 문지른다. 감옥에서 읽었던 그 책에는 다른 사람의 수번과 이름과 적혀 있었다. 안 닦고, 그냥 주셔도 괜찮다, 고 해도 선물인데, 라며 계속 닦는다.
“내가 무섭소?”
간첩, 얘기를 했더니 그가 물었던 질문이다. 그가 무서울리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나이에 맞지 않게 해맑았고, 그리고 모질게 견뎌온 흔적을 찾을 수 없을리만치 인자하고 평온했다. 어릴 적 받았던 반공의 잔재물인 간첩에 대한 이미지와 현실에서의 간첩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는가, 라는 슬픔과 막막함의 교차. 나오면서 터미널로 가는 버스 번호를 물은 것이 화근이 되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가 배웅을 나왔다.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는데 그가 택시를 잡는다.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려는 순간, 그가 택시기사에게 1만 원 지폐를 건넨다. 막무가내로 올라타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바람에 그냥 올라탔다. 또 다시 울먹해진다. 우리는 왜, 그 오랜 시간동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며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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