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민중가수 · 마당극패 · 풍물굿패 지금 어디에 …
2000/2000년 09월 :
2000/09/01 00:00
거리에서 수십만 인파가 독재정권 타도를 목놓아 외쳤던 80년대. 정치적으로는 암흑기였지만 문화운동은 르네상스시대였다. 무수한 민중가요들이 해적판 테이프로 돌고, 시대의 우울을 개탄하던 문학인들도 넘쳐났다. 노래, 극, 풍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삶의 온기를 전하던 그들.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노래모임 ‘아줌마’ 김영남
“우리의 힘으로 열린 새로운 시작을 향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떠나기로 해요~버릴 수 없는~꿈~하나, 아이들의 맑은 눈 속에 함께 나누는 세상 만들어가요~”
잰 손놀림으로 우윳병을 물리고, 노래에 열중해 보지만 칭얼대며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막둥이는 어쩔 수 없다. 번쩍 들어올려 옆구리에 걸치고, 온힘을 다해 목청 돋운다. 시끄럽게 보채던 아이들도 엄마의 고음에는 전율한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기타 하나에 일곱 아줌마들이 입을 맞춘다. 저마다 학교 때는 ‘한가락’하던 광장가수들. 이십대에는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가눌 수 없는 답답함이 솥뚜껑 운전사로 전락한 그들을 짓눌렀다.”
민중가수 김영남을 필두로 7명의 아줌마가 모여 노래모임 ‘아줌마’를 만들었다. 지난 5월 14일 ‘신나는 아줌마 콘서트’를 연 그들은 지금껏 서울을 비롯 부산에서까지 여섯 차례도 넘는 순회공연을 가졌다. 테마는 ‘노래하고 싶었어요’ ‘넉넉하고 당당한 아줌마의 모습’ ‘더불어 함께 희망을’.
80년대 주로 통일을 노래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속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거대한 혁명을 꿈꾸던 이십대 청춘이 결혼 후 살림만 하면서 사회로부터 밀려나 볼품없이 추락했다고 생각되는 자신들의 삶을 다시 정돈해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것. 그런 마음을 온전히 노래로 그려냈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아줌마로서 문화적으로 소외받는 게 많아요. 청소년문화, 청년문화는 있어도 ‘아줌마문화’라는 게 없고, 또 ‘아줌마’ 하면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요. 우리는 애 때문에 극장, 노래방 한번 자유롭게 못 가요. 그런 점에 착안해 노래모임을 만들고,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아줌마’들과 함께 하려고 해요.” 기획자 이정민(35세) 씨의 말이다.
성공적인 첫공연 후, 노래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하지만 정작 모임에 나온 건 딱 둘. 모임의 리더격인 김영남 씨의 말을 들어보자. “자신이 없죠. 저희들도 그랬어요. 하지만 노래모임 ‘아줌마’는 노래하고 싶은 아줌마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이에요. 저희 포스터 맨 뒤에 “2001년 공연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유도 거기 있는 거죠.”
매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엄마, 아내를 관중석에서 우러러본 후 달리 보기 시작한 가족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게 됐다고 뿌듯해하는 7인의 아줌마노래꾼. 장롱 속에 고개를 파묻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범벅이 된 후에야 존재의 이유를 확인했다는 김한나 씨(32세). 노래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웹디자인을 공부하며 취업준비중인 최진아 씨(31세). 모두들 결혼 이후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고 다시 시작하려 준비중이라 그런지 활력이 있다.
‘진혼곡’ 등의 통일노래로 잘 알려진 민중가수 김영남 씨. 그녀는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 아줌마들이 만드는 문화공동체의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노래모임 ‘아줌마’와 한 배를 탔다고 전한다.
“아이 둘 데리고 활동하려니 일이 대여섯배는 더 많더라구요. 아줌마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절실하지만 아무도 관심없죠. 그래서 저희들이 뭔가 하려 합니다.”
386세대로서 통일노래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솔직히 노래로부터 자연스럽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그녀는 “아줌마가 된 ‘30대’ 민중가수 김영남의 고민과 삶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언제나 집회현장에서만 보았던 민중가수 김영남. 그녀는 노래모임 ‘아줌마’로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만나고 있다. 솔직한 자신의 언어로 피곤에 지친 아줌마들의 삶을 위로하면서….
풍물굿패 ‘살판’ 박희정
길삼엮기, 개줄당기기, 영산줄당기기, 강강수월래…. 전국농민회총연맹 산하 경기도연맹 여름수련회의 프로그램들이다. 모두 민속놀이를 재연한 것들. 구경만 하면 재미없다. 직접 참가해 함께 어우러져야 놀이의 맛이 있다. 이 대동놀이를 지도하는 사람은 민예총 풍물굿위원회 사무국장 겸 풍물굿패 ‘살판’ 대표 박희정(40세) 씨. 김포청소년수련관에서 만난 박희정 씨는 경기도연맹 회원들에게 대동놀이를 스스로 체험해 보라고 부추긴다.
“뒤에 있으면 뭐하냐? 같이 손잡고 뛰어봐야 재미있지….”
전통혼례도 재연해서 보여주고, 극단 아리랑을 초청해 악극 <엄마의 청춘>도 함께 본다. 밤새 장작을 태우며 신명나게 돌아치면 흠뻑 젖은 땀 속에서 사랑은 솟게 마련이라고. 어려운 일 함께 하는 사람들일수록 대동놀이로 함께 풀어야 돈독한 정을 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게 풍물과 함께 살아온 지 20년. 대학시절 탈춤반에서 풍물을 알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풍물을 떠나본 일이 없다. 대개 서른 전후로 생계문제에 부딪혀 북·장고·꽹과리·징을 버리고 떠나지만 박희정 씨는 끝끝내 남아 ‘풍물의 현재화’를 고민하고 있다.
풍물패 터울림에서 활동하다 풍물굿패 ‘살판’을 만든 것은 지난 1991년.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풍물모임을 보면서 뭔가 제대로 된 내용을 전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물경연대회가 많아지면서 대동놀이의 측면보다 재주를 보여주는 풍물로 바뀌더라구요. 전통적으로 풍물은 같이 어우러져 한판 논다, 이런 의미지 재주를 그냥 보여준다, 이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한판 노는 대동놀이의 의미에서 풍물을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풍물굿패 ‘살판’에서 그는 풍물 대중강습을 통해 풍물의 의미를 전파하고, 창작작품으로 관객들과 사회문제를 공유한다. 92년 <한울타리>, 94년 <바람을 타고 나는 새야Ⅰ·Ⅱ>. <한울타리>는 92년 대선 당시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하고 한울타리로 살자는 의미에서 창작 했고, <바람을 타고 나는 새야Ⅰ>은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농민전쟁 봉기과정을 살풀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바람을…Ⅱ>는 분단50년 일제 수탈과정에서의 민중저항을 그렸다. 극 형식을 빌어 풍물로 대중들과 만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소통이었다.
“풍물은 나를 포기하고 우리를 찾는 과정이에요. 풍물은 잘 하는 한 사람보다 못하는 열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혼자 할 수 없는 게 풍물이에요. 저는 풍물을 통해 잊혀진 ‘두레’를 만납니다. 요즘은 ‘우리’보다 ‘내’가 중요한 세상 아닙니까? 그러나 옛날 시골마을에서 풍물을 즐길 때는 나보다 공동의 가치, 공동의 일을 중요시했어요. 그런 기운을 사회적으로 복원하고 싶기도 해서 활동하고 있죠.”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풍물을 하고 싶다는 박희정 씨. 그는 20년간 전국을 돌며 체득한 문화유산을 몸으로 느낀 만큼 대중들에게 알리고, 꾸준히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꿔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20년간 문화운동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며 빙긋이 웃는다.
프로젝트 앨범 ‘아름다운 청년’ 서미정
인천지역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활동가들이 음반을 냈다. 프로젝트앨범 ‘아름다운 청년’. 13곡의 창작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제작자는 800명. 기성 음반사처럼 독점사업주에 의해 음반이 제작된 게 아니라 인천지역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십시일반이 종잣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청년’(대표 서미정)에서 음반예약권을 미리 발매해 선금으로 모은 돈은 총 400만원. 사용하던 연습실이 누전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배를 곯아가며 정말 어렵게 CD와 TAPE를 내놓았다.
“대부분 운동권 노래라 하면 투쟁성이 강한 걸로만 기억하는데 저희들의 노래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노래부터 비장하고 장중한 음악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의 대표 서미정 씨(30세)의 말이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시민문화센터(이하 시민문화센터)엔 ‘일하는 사람들이 부는 휘파람’이란 노래패가 있다. 지난 1996년 5월에 창립한 ‘휘파람’은 전문노래패의 지향을 가진 직장인 노래패. 그해 10월 26일 첫공연을 가진 후 아마추어 노래일꾼 12명은 지난 5년간 인천지역의 행사, 노동조합 투쟁지원, 자체 공연 등을 거쳐 전문노래일꾼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은 성장해 온 것이다. 팀 사람들은 가수 7명과 연주자 2명. 곡과 가락은 모두 ‘아름다운 청년’팀에서 소화했다. 이들의 주요 테마는 청년의 삶. ‘청년이란 나이로 매겨지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매겨지는 것’, 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 나이는 묻지 마라, 나이가 젊다고 청년이 아냐/푸르른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내가 바로 이 땅의 푸른나이 청년”(푸른나이, 청년)
지난 7월초 음반 발매 후 서점을 통해 유통한 결과 반응은 ‘신선하다’로 축약됐다. 대중가요풍의 음악색이 있지만, 노랫말은 진부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잠깐 노랫말을 들어보자.
“그리움의 세월, 그 눈물 다 걷어내고 녹슬은 기차야 날개를 펴라/꿈에라도 가고 싶던 저 땅을 우리 함께 가자/우리의 손으로 통일을 이루자”(우리의 소원은 통일)
“내 나이 사십에 이렇게 배가 나올 줄은 몰랐어/이렇게 낯선 사십이 될 줄이야/그러나 내 인생엔 가난하지만 부자인 후배들과 사랑하는 가족들,…날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지/당신의 지친 사십보다 당신의 화려한 사십보다 내 나이 사십엔 희망이 있지”(내 나이 사십엔)
모던록 분위기에서 보사노바풍, 클래식을 접목한 행진곡풍 등 다양한 음색을 갖춰 글을 붙였다. 특히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상임대표이자 시인인 신연수 씨가 쓴 ‘내 나이 사십엔’이란 노랫말은 중년층에게 인기가 있다고.
지금까지 CD 1,000장, TAPE 2,000장이 팔렸다. 아직까지는 전문성이 미흡하다고 자가진단해 앞에 ‘프로젝트’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실제 이 음반의 제작에는 ‘휘파람’ 회원들, 인천지역 사회단체 노래패, 가톨릭청년회, 노래모임 ‘세상그리기’ 등 인천에서 노래하는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5년간 인천지역에서 노래만을 고집해온 ‘아름다운 청년’ 대표 서미정 씨, 그는 팀의 향후 계획을 이렇게 밝힌다.
“인천지역에서 만들어진 노래패인만큼 지역현안을 가지고 노래하려고 해요. 수돗물 불소화 문제라든가, 주한미군 문제 등을 주제로 생활노래를 만들어 겨울쯤 싱글앨범을 하나 더 내고요. 또 하나는 ‘민중가요 다시부르기’로, 그때의 노래들을 편곡해서 앨범으로 낼 계획입니다.”
놀이패 ‘한두레’ 남기성
8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흰옷 입은 사람들의 마당극이었다. 도서관 앞이든, 작은 광장이든 자리를 차고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사회문제를 고발했다. 이런 마당극 놀이패는 농촌활동 혹은 공장활동에 들어가서도 극 형식으로 농민의 아픔과 노동자의 설움을 달래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1974년 창립한 놀이패 ‘한두레’는 지난 26년간 꾸준히 활동해온 전문 연희패로 널리 알려져 있다. 80년대 초반엔 ‘가자 인천으로’라는 슬로건이 나올 만큼 대학가에서 공장 투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두레 단원들도 노동자로 위장취업해 살며, 그들의 삶을 마당극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87년 봄에 나온 <어떤 생일날>이다. 공연도 집회신고를 내야 허가해줬던 70, 80년대에 전문연희패로 시대를 풍미한 ‘한두레’는 90년대를 넘어 2000년대에 와서도 극을 통해 한민족과 한국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주로 노동자·농민문제를 화두로 삼았던 한두레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일상적으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주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활동도 다양해졌어요. 2000년대인 지금의 경향을 놓고 뭐다, 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한두레 대표 남기성(38세) 씨는 좀더 주민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연희패는 서울보다 지방에서 훨씬 많다고 전한다.
“목포에 ‘갯돌’이라는 놀이패가 있어요. 이들은 목포 근처에 있는 섬들을 몇 년째 순회하면서 공연활동을 해요. 또 청주의 춤패 ‘너울’도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강습뿐만 아니라 공연도 많이 합니다. 서울에선 최근 ‘열대야 전통연희축제’라고 하여 APT촌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죠. 밤중에 무료로 하는 공연이라 그런지 호응이 좋아요. 예전과 달리 문화운동도 대중을 찾아가는 활동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80년대를 풍미한 마당극운동은 점점 더 깊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면 지금은 사업장 밖에 있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의 가족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연희무대를 만들고 있는 것. 주제도 노동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에서부터 실업문제나 생태, 생명문제를 얘기하는 것까지 다양해졌다. 이런 마당극운동의 내용 변화에 대해 남기성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자기모순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마당극처럼 풍자와 해학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문화적 요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계속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방안을 고민하도록 하는 게 마당극운동의 존재이유 아닐까요? ”
상계근린공원에서 ‘열대야 전통연희축제’ 자료사진을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남기성 씨는 주최단체인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배우 겸 연출가로 알려진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탈춤을 추기 시작했단다. 인생의 절반을 탈춤과 함께한 그는 지금도 바쁘다. 그에게 문화운동의 비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한가롭게 들릴 정도로 그는 정신이 없었다. 끝으로 그는 “홍보 좀 합시다” 하며 9월부터 부산에서 있을 전국민족극한마당 입장료가 2,000원이니 한번쯤 구경하는 것도 마당극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지 않겠냐며 웃었다.
노래모임 ‘아줌마’ 김영남
“우리의 힘으로 열린 새로운 시작을 향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떠나기로 해요~버릴 수 없는~꿈~하나, 아이들의 맑은 눈 속에 함께 나누는 세상 만들어가요~”
잰 손놀림으로 우윳병을 물리고, 노래에 열중해 보지만 칭얼대며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막둥이는 어쩔 수 없다. 번쩍 들어올려 옆구리에 걸치고, 온힘을 다해 목청 돋운다. 시끄럽게 보채던 아이들도 엄마의 고음에는 전율한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기타 하나에 일곱 아줌마들이 입을 맞춘다. 저마다 학교 때는 ‘한가락’하던 광장가수들. 이십대에는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결혼 이후 가눌 수 없는 답답함이 솥뚜껑 운전사로 전락한 그들을 짓눌렀다.”
민중가수 김영남을 필두로 7명의 아줌마가 모여 노래모임 ‘아줌마’를 만들었다. 지난 5월 14일 ‘신나는 아줌마 콘서트’를 연 그들은 지금껏 서울을 비롯 부산에서까지 여섯 차례도 넘는 순회공연을 가졌다. 테마는 ‘노래하고 싶었어요’ ‘넉넉하고 당당한 아줌마의 모습’ ‘더불어 함께 희망을’.
80년대 주로 통일을 노래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속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거대한 혁명을 꿈꾸던 이십대 청춘이 결혼 후 살림만 하면서 사회로부터 밀려나 볼품없이 추락했다고 생각되는 자신들의 삶을 다시 정돈해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것. 그런 마음을 온전히 노래로 그려냈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아줌마로서 문화적으로 소외받는 게 많아요. 청소년문화, 청년문화는 있어도 ‘아줌마문화’라는 게 없고, 또 ‘아줌마’ 하면 상당히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요. 우리는 애 때문에 극장, 노래방 한번 자유롭게 못 가요. 그런 점에 착안해 노래모임을 만들고,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아줌마’들과 함께 하려고 해요.” 기획자 이정민(35세) 씨의 말이다.
성공적인 첫공연 후, 노래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하지만 정작 모임에 나온 건 딱 둘. 모임의 리더격인 김영남 씨의 말을 들어보자. “자신이 없죠. 저희들도 그랬어요. 하지만 노래모임 ‘아줌마’는 노래하고 싶은 아줌마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이에요. 저희 포스터 맨 뒤에 “2001년 공연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유도 거기 있는 거죠.”
매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엄마, 아내를 관중석에서 우러러본 후 달리 보기 시작한 가족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게 됐다고 뿌듯해하는 7인의 아줌마노래꾼. 장롱 속에 고개를 파묻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범벅이 된 후에야 존재의 이유를 확인했다는 김한나 씨(32세). 노래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웹디자인을 공부하며 취업준비중인 최진아 씨(31세). 모두들 결혼 이후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고 다시 시작하려 준비중이라 그런지 활력이 있다.
‘진혼곡’ 등의 통일노래로 잘 알려진 민중가수 김영남 씨. 그녀는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 아줌마들이 만드는 문화공동체의 필요성을 절감했기에 노래모임 ‘아줌마’와 한 배를 탔다고 전한다.
“아이 둘 데리고 활동하려니 일이 대여섯배는 더 많더라구요. 아줌마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절실하지만 아무도 관심없죠. 그래서 저희들이 뭔가 하려 합니다.”
386세대로서 통일노래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솔직히 노래로부터 자연스럽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그녀는 “아줌마가 된 ‘30대’ 민중가수 김영남의 고민과 삶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언제나 집회현장에서만 보았던 민중가수 김영남. 그녀는 노래모임 ‘아줌마’로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만나고 있다. 솔직한 자신의 언어로 피곤에 지친 아줌마들의 삶을 위로하면서….
풍물굿패 ‘살판’ 박희정
길삼엮기, 개줄당기기, 영산줄당기기, 강강수월래…. 전국농민회총연맹 산하 경기도연맹 여름수련회의 프로그램들이다. 모두 민속놀이를 재연한 것들. 구경만 하면 재미없다. 직접 참가해 함께 어우러져야 놀이의 맛이 있다. 이 대동놀이를 지도하는 사람은 민예총 풍물굿위원회 사무국장 겸 풍물굿패 ‘살판’ 대표 박희정(40세) 씨. 김포청소년수련관에서 만난 박희정 씨는 경기도연맹 회원들에게 대동놀이를 스스로 체험해 보라고 부추긴다.
“뒤에 있으면 뭐하냐? 같이 손잡고 뛰어봐야 재미있지….”
전통혼례도 재연해서 보여주고, 극단 아리랑을 초청해 악극 <엄마의 청춘>도 함께 본다. 밤새 장작을 태우며 신명나게 돌아치면 흠뻑 젖은 땀 속에서 사랑은 솟게 마련이라고. 어려운 일 함께 하는 사람들일수록 대동놀이로 함께 풀어야 돈독한 정을 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게 풍물과 함께 살아온 지 20년. 대학시절 탈춤반에서 풍물을 알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풍물을 떠나본 일이 없다. 대개 서른 전후로 생계문제에 부딪혀 북·장고·꽹과리·징을 버리고 떠나지만 박희정 씨는 끝끝내 남아 ‘풍물의 현재화’를 고민하고 있다.
풍물패 터울림에서 활동하다 풍물굿패 ‘살판’을 만든 것은 지난 1991년.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풍물모임을 보면서 뭔가 제대로 된 내용을 전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물경연대회가 많아지면서 대동놀이의 측면보다 재주를 보여주는 풍물로 바뀌더라구요. 전통적으로 풍물은 같이 어우러져 한판 논다, 이런 의미지 재주를 그냥 보여준다, 이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한판 노는 대동놀이의 의미에서 풍물을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풍물굿패 ‘살판’에서 그는 풍물 대중강습을 통해 풍물의 의미를 전파하고, 창작작품으로 관객들과 사회문제를 공유한다. 92년 <한울타리>, 94년 <바람을 타고 나는 새야Ⅰ·Ⅱ>. <한울타리>는 92년 대선 당시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하고 한울타리로 살자는 의미에서 창작 했고, <바람을 타고 나는 새야Ⅰ>은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농민전쟁 봉기과정을 살풀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바람을…Ⅱ>는 분단50년 일제 수탈과정에서의 민중저항을 그렸다. 극 형식을 빌어 풍물로 대중들과 만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소통이었다.
“풍물은 나를 포기하고 우리를 찾는 과정이에요. 풍물은 잘 하는 한 사람보다 못하는 열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혼자 할 수 없는 게 풍물이에요. 저는 풍물을 통해 잊혀진 ‘두레’를 만납니다. 요즘은 ‘우리’보다 ‘내’가 중요한 세상 아닙니까? 그러나 옛날 시골마을에서 풍물을 즐길 때는 나보다 공동의 가치, 공동의 일을 중요시했어요. 그런 기운을 사회적으로 복원하고 싶기도 해서 활동하고 있죠.”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풍물을 하고 싶다는 박희정 씨. 그는 20년간 전국을 돌며 체득한 문화유산을 몸으로 느낀 만큼 대중들에게 알리고, 꾸준히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꿔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20년간 문화운동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며 빙긋이 웃는다.
프로젝트 앨범 ‘아름다운 청년’ 서미정
인천지역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활동가들이 음반을 냈다. 프로젝트앨범 ‘아름다운 청년’. 13곡의 창작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제작자는 800명. 기성 음반사처럼 독점사업주에 의해 음반이 제작된 게 아니라 인천지역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십시일반이 종잣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청년’(대표 서미정)에서 음반예약권을 미리 발매해 선금으로 모은 돈은 총 400만원. 사용하던 연습실이 누전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배를 곯아가며 정말 어렵게 CD와 TAPE를 내놓았다.
“대부분 운동권 노래라 하면 투쟁성이 강한 걸로만 기억하는데 저희들의 노래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노래부터 비장하고 장중한 음악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의 대표 서미정 씨(30세)의 말이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시민문화센터(이하 시민문화센터)엔 ‘일하는 사람들이 부는 휘파람’이란 노래패가 있다. 지난 1996년 5월에 창립한 ‘휘파람’은 전문노래패의 지향을 가진 직장인 노래패. 그해 10월 26일 첫공연을 가진 후 아마추어 노래일꾼 12명은 지난 5년간 인천지역의 행사, 노동조합 투쟁지원, 자체 공연 등을 거쳐 전문노래일꾼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은 성장해 온 것이다. 팀 사람들은 가수 7명과 연주자 2명. 곡과 가락은 모두 ‘아름다운 청년’팀에서 소화했다. 이들의 주요 테마는 청년의 삶. ‘청년이란 나이로 매겨지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매겨지는 것’, 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 나이는 묻지 마라, 나이가 젊다고 청년이 아냐/푸르른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내가 바로 이 땅의 푸른나이 청년”(푸른나이, 청년)
지난 7월초 음반 발매 후 서점을 통해 유통한 결과 반응은 ‘신선하다’로 축약됐다. 대중가요풍의 음악색이 있지만, 노랫말은 진부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잠깐 노랫말을 들어보자.
“그리움의 세월, 그 눈물 다 걷어내고 녹슬은 기차야 날개를 펴라/꿈에라도 가고 싶던 저 땅을 우리 함께 가자/우리의 손으로 통일을 이루자”(우리의 소원은 통일)
“내 나이 사십에 이렇게 배가 나올 줄은 몰랐어/이렇게 낯선 사십이 될 줄이야/그러나 내 인생엔 가난하지만 부자인 후배들과 사랑하는 가족들,…날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지/당신의 지친 사십보다 당신의 화려한 사십보다 내 나이 사십엔 희망이 있지”(내 나이 사십엔)
모던록 분위기에서 보사노바풍, 클래식을 접목한 행진곡풍 등 다양한 음색을 갖춰 글을 붙였다. 특히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상임대표이자 시인인 신연수 씨가 쓴 ‘내 나이 사십엔’이란 노랫말은 중년층에게 인기가 있다고.
지금까지 CD 1,000장, TAPE 2,000장이 팔렸다. 아직까지는 전문성이 미흡하다고 자가진단해 앞에 ‘프로젝트’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실제 이 음반의 제작에는 ‘휘파람’ 회원들, 인천지역 사회단체 노래패, 가톨릭청년회, 노래모임 ‘세상그리기’ 등 인천에서 노래하는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5년간 인천지역에서 노래만을 고집해온 ‘아름다운 청년’ 대표 서미정 씨, 그는 팀의 향후 계획을 이렇게 밝힌다.
“인천지역에서 만들어진 노래패인만큼 지역현안을 가지고 노래하려고 해요. 수돗물 불소화 문제라든가, 주한미군 문제 등을 주제로 생활노래를 만들어 겨울쯤 싱글앨범을 하나 더 내고요. 또 하나는 ‘민중가요 다시부르기’로, 그때의 노래들을 편곡해서 앨범으로 낼 계획입니다.”
놀이패 ‘한두레’ 남기성
8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흰옷 입은 사람들의 마당극이었다. 도서관 앞이든, 작은 광장이든 자리를 차고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사회문제를 고발했다. 이런 마당극 놀이패는 농촌활동 혹은 공장활동에 들어가서도 극 형식으로 농민의 아픔과 노동자의 설움을 달래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1974년 창립한 놀이패 ‘한두레’는 지난 26년간 꾸준히 활동해온 전문 연희패로 널리 알려져 있다. 80년대 초반엔 ‘가자 인천으로’라는 슬로건이 나올 만큼 대학가에서 공장 투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두레 단원들도 노동자로 위장취업해 살며, 그들의 삶을 마당극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87년 봄에 나온 <어떤 생일날>이다. 공연도 집회신고를 내야 허가해줬던 70, 80년대에 전문연희패로 시대를 풍미한 ‘한두레’는 90년대를 넘어 2000년대에 와서도 극을 통해 한민족과 한국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주로 노동자·농민문제를 화두로 삼았던 한두레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일상적으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주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활동도 다양해졌어요. 2000년대인 지금의 경향을 놓고 뭐다, 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한두레 대표 남기성(38세) 씨는 좀더 주민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연희패는 서울보다 지방에서 훨씬 많다고 전한다.
“목포에 ‘갯돌’이라는 놀이패가 있어요. 이들은 목포 근처에 있는 섬들을 몇 년째 순회하면서 공연활동을 해요. 또 청주의 춤패 ‘너울’도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강습뿐만 아니라 공연도 많이 합니다. 서울에선 최근 ‘열대야 전통연희축제’라고 하여 APT촌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죠. 밤중에 무료로 하는 공연이라 그런지 호응이 좋아요. 예전과 달리 문화운동도 대중을 찾아가는 활동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80년대를 풍미한 마당극운동은 점점 더 깊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면 지금은 사업장 밖에 있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의 가족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연희무대를 만들고 있는 것. 주제도 노동현실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에서부터 실업문제나 생태, 생명문제를 얘기하는 것까지 다양해졌다. 이런 마당극운동의 내용 변화에 대해 남기성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자기모순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마당극처럼 풍자와 해학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문화적 요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계속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방안을 고민하도록 하는 게 마당극운동의 존재이유 아닐까요? ”
상계근린공원에서 ‘열대야 전통연희축제’ 자료사진을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남기성 씨는 주최단체인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배우 겸 연출가로 알려진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탈춤을 추기 시작했단다. 인생의 절반을 탈춤과 함께한 그는 지금도 바쁘다. 그에게 문화운동의 비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한가롭게 들릴 정도로 그는 정신이 없었다. 끝으로 그는 “홍보 좀 합시다” 하며 9월부터 부산에서 있을 전국민족극한마당 입장료가 2,000원이니 한번쯤 구경하는 것도 마당극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지 않겠냐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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