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체될 그날 위해 투쟁한다
45년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김선명 씨, 민가협이 세계 최장기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냈고 1995년 결국 그를 풀려나게 했다. 이미 칠순이 된 김선명 씨는 병상에 누운 아흔 셋의 어머니께 나를 알아보시겠냐며 통곡했다.

“여기서는 안보여. 집에 있으면 다 보여. 저기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내 마음에 환하게 네 얼굴이 보여.” 아들의 석방에 대한 염원이 한 많은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준 힘이 되었던지,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김선명 씨의 노모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누가 이 어머니와 아들의 한맺힌 이별을 강요해왔는가, 그리고 그 이별을 끝내게 도와준 이들은 또 누군가.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 1985년 미문화원사건 등으로 많은 학생들이 구속됐다. 또 민청련사건으로 김근태 씨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끌려갔고 서노련 등의 노동운동가들도 탄압받았다. 그리고 이들이 구속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독방에 수용된 채 신음해온 장기수들이 있었다.

안기부 대공분실·경찰서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가족들이 갇혀 있는 그들을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구속학생학부모회, 장기수가족협의회, 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 유가족협의회 등으로 나뉘어 있던 가족들에게도 하나의 이름이 필요했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국립정신병원에 감정유치돼 있던 이을호 씨의 부인 최정순 씨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민가협은 모든 간부들이 구속되어 폐쇄 위기에 있던 중구 삼각동의 민청련 사무실을 임시로 얻어쓰게 됐다. 1985년 12월12일의 민가협 현판식이 곧 창립대회였다. 그러나 사무실을 봉쇄한 경찰병력들은 간판도 걸지 못하게 했고 여기 항의해 연좌농성을 하면서 창립선언을 해야했다. 민가협이 이후 걸어야 할 험난한 길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민가협다운 출발이었다.

“한 개인의 석방을 애원하기보다는 민주화 대열에 함께 서는 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이라 믿으며 민중 민주 민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발전적 가족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발기하는 바이다.”

울부짖고 거리에 나뒹굴며 배운 인권운동

집회장을 찾는 어머니들의 가방엔 유인물 뭉치가 들었고, 누구집 자식인지 몰라도 전경들이 학생을 둘러싸면 어머니들은 끈질기게 달려들어 학생을 구출했다. “양심수를 석방하라!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구호를 외쳤고 아들을 살려달라 울부짖기도 했다. 최루탄에 속이 뒤집히고 닭장차에 실려 어딘지도 모를 허허벌판에 버려지는 일을 예사로 당했다. 덕분에 어머니들은 투사가 됐다.

강제연행과 밀실에서 자행되는 수사기관의 고문혐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제일 먼저 달려간다. 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안기부 정문 앞에 라면상자를 깔고 며칠이고 밤을 세웠다. ‘면회투쟁’으로 자식들이 당하는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조금이라도 막아주려는 것이다.

“아이구 다리야, 허리는 왜 또 이리…, 관절염이 다시 도진 모양이지. 끙, 그래도 일어나자, 빨리 안기부 앞으로 가야지, 무지막지한 전경방패 속을 헤집고 들어가야지. 그 방패에 찍히면 피가 나고 까무러치겠지만, 요놈들 오늘은 내가 더 야단을 쳐야지. 빨리 가자.”전경에게 하도 맞아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관절염까지 걸려 진통제를 계속 먹다보니까 몸무게가 12kg이나 불었다는 임기란 씨(1985년 민정당사 점거농성으로 구속된 박신철의 어머니)는 매일 그렇게 독백했단다.

자식들이 수사기관에서 교도소로 옮겨가면 어머니들은 이번에는 교도소로 찾아간다. 1994년 구치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수감자들이 단식농성을 벌인 군산교도소. 어김없이 찾아간 어머니들은 사흘동안 물도 없이 불도 없이 싸웠다. 매일 교도소 철대문에 올라가 버티자 드디어 교도소측이 손을 들었다.

“농성자들은 단식을 풀었고, 우리는 기뻐 펄쩍뛰었지. 힘들었다는 건 다 잊었고 그 뿌듯함이란 말할 수 없어. 그때 우리 엄마들 새카만 땟구정물이 머리에서 옷에서 손발에서 한없이 나왔지.”그렇게 신산스런 몰골로 함께 부둥켜안았던 어머니들…. 그래서 누군가가 출소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두들 자기 자식이 풀려나오는 것처럼 설레었단다. 새벽에 감옥문을 나서는 이들을 얼싸 안아주려고 어머니들은 밤차에 몸을 싣곤 했다. ‘내 자식도 곧 나오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덕분에 어머니들은 전국에 안 가본 교도소가 없다. 전국 36개의 교도소 가는 길이 머릿속에 훤하다.

민가협 14년, 여전한 시련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장례식 때 민가협 어머니들은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도로를 꽉 메운 추모행렬의 맨 앞에서 삼베두건을 쓰고 행렬을 선도했다. 지금은 그 두건이 고난을 상징하는 보랏빛 수건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들의 행렬 ‘어머니가 지켜준다’는 든든한 믿음으로 집회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을 안도하게 만들었다.

1988년 10월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벌인 135일 농성은 민가협 역사에 남을 대기록이다. 1989년 고문경관 이근안 씨를 현상수배한 것도 민가협이고, 1994년 여름 서강대 박홍 총장의 매카시즘적 발언에 항의해 가장 먼저 총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도 어머니들이다. 어머니들은 한 인간의 망언이 자식들의 심장을 노리는 비수가 될 거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의 법정을 찾아가 그들의 죄를 물어 항의한 것도 민가협의 어머니들이다. 법정소란으로 끌려나왔지만 어머니들은 역시 다음 법정에 또 찾아갔다. 5·6공쪽 사람들이 방청권을 마구 사들인 터라 어머니들은 법원 앞에서 조를 짜 밤샘을 하며 방청권을 타내야 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 모든 장기수의 석방을 요구한 것도 민가협이다. 그리고 한총련 학생들과 파업노동자들의 석방을 위해 목요일마다 탑골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교도소를 찾아가 위로하는, 여전히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곳이 또한, 민가협이다. 그 어머니들 머리에는 민가협과 함께 14년의 세월을 보내며 온통 흰서리가 내렸다.

“지금까지 민가협은 양심수를 석방시키고 재소자의 인권을 높이는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정치범 뿐만 아니라 일반재소자·교도관 등을 포함한 감옥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모두 양심수문제를 고리로 민주화 영역을 넓혀온 것입니다. 민가협은 앞으로도 양심수 석방을 우선 과제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양심수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해체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양심수 석방을 위한 노력에 그치지 않고 인권침해 관행과 법 제도를 개선해 인권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민가협의 과제예요.” 오랫동안 민가협을 지켜온 남규선 총무는 민가협의 활동방향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양심수가 다 없어지면’ 민가협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민가협 어머니들은 모든 양심수가 석방되고 민가협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 간판을 내릴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진작에 아들이 석방되고 손자까지 보고서도 민가협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들이 볼 때 그 질문은 아직 섣부른 것이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감옥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총련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학생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사회의 냉담한 시선에 분노한다. 부당해고에 항의하다 구속된 노동자의 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서럽기만 하다. 이들에게는 지금이 여전히 엄혹한 ‘시련기’다.

목표는 ‘민가협 해체!’

“언젠가 아들이 ‘엄마 이제는 누구 엄마 하지 말고 인권운동가 하시오’ 그래. 그때서야 아 내가 인권운동을 해온 거구나 싶었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죽고 해서 매일 농성하고 거리에서 싸우던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자식들 구하고 매맞지 않게 뛰어다닌 거지, 이것이 인권운동인가 어떤 운동을 해야하나 따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전대협 3기 의장 임종석 씨의 어머니인 김정숙 씨처럼 민가협의 어머니들은 개인 스스로 어떤 지위에 오르거나 조명을 받는 스타가 되지 않고 누구의 어머니로, 가족으로, 묵묵히 뒷자리를 지켜왔다.

“우리 어머니들은 탁상공론의 자리가 아니고 울부짖고 거리에 나뒹굴면서 인권운동 배웠지요. 어떤 변호사나 전문가 못지 않은 인권운동가이지요.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전업은 그게 아냐, 어머니지. 우리는 이제 집으로 가야지. 어머니들이 나서게 된 거 억압된 시대 상황이 만든 산물이잖아. 그런 거 빨리 사라져야지.” 임기란 어머니는 앞으로의 인권운동은 계속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어머니들은 동우회정도로 남았으면 딱 좋겠다고 한다.

“ 이제는 우리 소원이 애들하고 똑같아. 양심수 석방되고 악법 없어지고 자주통일되고…, 민주주의 완성되는 거.”
김소희 본지 객원기자
1999/06/01 00:00 1999/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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