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인권변호사 배금자
1999/1999년 06월 :
1999/06/01 00:00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199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재판소라는 곳에 있었다. 막 새로 지어진 거창한 건물 속에는 어딜 가나 정적만이 들어 있었다. 산사의 정적은 마음을 편안히 해주건만 재판소의 정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 놓는 게 과연 ‘텃값’을 하는구나 싶었다. 호텔처럼 번호가 매겨진 방들. 그 중의 한 방에서 ‘성폭행 의붓아버지 살해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날의 주된 내용은 신경정신과 교수가 참고인 자격으로 폭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리면 사람이 무능력해집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도 6개월만 폭력에 시달리면 제 자식의 문제를 제가 해결해줄 수가 없습니다. 피의자의 어머니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집니다.”참고인 진술의 골자는 이랬다. 당시 사회에서는 딸이 12년간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여론이 있었고 일각에서는 어머니가 가만히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성폭행 사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나온 이러한 참고인 진술은 피의자의 어머니를 폭력의 또 다른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어머니와 딸을 동시에 구해내는 두레박이었다.
여성들의 박수가 터졌다. 가족 안에서 자행되는 아내에 대한 구타와 자녀에 대한 학대가 여성단체의 상담기관에 수도 없이 고발되는 데도, 가족은 신성한 것이며 철저한 사생활공간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각에 눌려 가족 안에서의 인권문제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여성단체에서는 즉각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띄우고 이 사건을 가족내 인권문제 해결의 디딤돌로 삼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터였으니 권위있는 정신과 박사의 이런 발언을 반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판사는 박수를 소란행위라면서 퇴정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앗다, 좋게 말로 하면 될 것을 저래야만 권위가 선다냐’ 속으로 아니꼬왔지만 사법고시 안 붙은 죄로 참을 수밖에. 그러나 참고 있자니 열불 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재판장이 한다는 말이 자기도 이 사건을 새로 맡아서 지금까지의 진행기록을 다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무슨 선언처럼 근엄하게 하는 데다 참고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으면서 중간 중간 ‘간단하게 해달라’고 맥을 끊기 일쑤였다.
그런데 더 얄미운 것은 검사였다. 참고인에게 ‘당신의 말이 정신과 정설이냐’, ‘그것 가지고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를 합리화 할 수 있냐’, ‘딸이 그동안은 가만히 있다가 대학에 가서 애인이 생기니까 그것을 일러서 의붓아버지를 죽이게 했다’는 등 말의 내용도 공분을 불러일으키는데다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하는 태도는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게 풍자마당극이면 ‘우’하고 야유를 퍼부어 미운 속을 풀겠지만 ‘신성한’ 법정이라 냉가슴만 치고 있는데 어디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의 있습니다. 재판장님.”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모두가 강제로 입이 다물려져 있는 상황에서 입을 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자가 내는 이 말 한 마디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황홀했다.
영화처럼 열띤 법정공방
재판은 싱거웠다. 참고인 진술을 듣는 게 전부였으니. 그러나 공대위 사람들과 재판소 계단을 내려가는 내 발걸음은 약간 들떠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우리 나라에도 저런 여자 변호사가 있었단 말인가. 평가와 대책을 논하기 위해 다방에 자리를 잡았지만 연신 그 여자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만만치가 않아요. 우리가 대책을 좀더 치밀하게 짜야되겠어요. 언론이 보수적이라 협조를 안하는 데다가 오늘 참고인 진술에도 재판부가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으니 변호인단을 더 보강할 필요가 있어요.”경상도 억양이 세서 어쩐지 거칠게 느껴지는 것도 퍽 매력적이었다. 박력 있어 보였다. 잠시 후 내가 그 박력에 한방 맞을 줄도 모르고 좋아했으니 한치 앞을 못 내다보는 사람이여!“같이 할 만한 여자변호사가 또 누가 있을까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변호사에게 내 존재를 알리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다. 나는 공대위의 일원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무렵 이혼을 하게 되어 내 코가 석자인 관계로 실제 참여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게 문제라니까요. 여성문제는 왜 여자 변호사만 해야 되죠? 여자 변호사는 순 이혼사건이나 맡는다는 게 사람들이 여자변호사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라구요”그때 무안했던 것이 나뿐이었을까. 무안하고 당황했지만 다음 순간 그의 철저한 문제의식에 대한 감탄이 그것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배금자를 몰랐단 말야?”
그가 누구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주부, 사법고시 합격’이라고 화제의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무릎을 쳤다.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고시공부를 해서 합격했다고 퉁퉁 부은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세련되지 않은 옷차림으로 찍은 그의 사진을 분명 나도 보았다.
“독한 여자지. 정말 대단해. 준비를 얼마나 꼼꼼히 하는지 몰라, 말도 잘하지, 논리정연하지, 핵심을 정확히 찍는다니까. 믿음직해.”공대위에는 여성운동가뿐 아니라 교사, 목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변호사로서는 그에게 대단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부터 ‘거칠다’ ‘무섭다’는 반응까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을까. 그가 텔레비전에 나타났다. 다른 변호사와 함께 방송의 고정프로그램을 맡은 것이다. 공동 진행자인 남자 변호사는 매끈한 용모에 서울말씨여서 그의 사투리 억양이 더 두드러졌고 정장에 방송국 스타일의 머리와 화장을 한 그는 어쩐지 좀 긴장되어 자기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무렵, 큰 부자와 결혼하여 신데렐라 같이 살고 있던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혹시 했더니 역시 이혼문제를 안고 왔다. 남편이 외도에 폭력이 겹쳤는데 회사에 고문변호사가 있으니 법률적으로 방어망이 탄탄해서 자기에게도 힘센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단박에 그가 떠올랐다. 선배도 매스컴 타는 변호사가 미더운지 ‘이의제기 없이’ 따라나섰다.
검은색 호마이카 삼각 명패에 자개로 ‘변호사 배금자’라고 우뚝 새겨 놓은 것을 앞에 놓고 그와 마주 앉으니 그야말로 ‘커리어 우먼’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내 시선이 거기 머물러 있음을 눈치챈 그가 하는 말,“이거 웃기죠. 저도 이런 거 싫어요.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고… 그런데요, 이런 게 있어야 변호사 대접을 하는 게 보통이에요. 그렇잖아도 여자 변호사하면 괜히 깔보고 로비력이 없어서 이기게 해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데…그래서 싫지만…….”뜻밖이었다. 그에게 이런 겸손함이 있다니(나중에 그가 낸 책 『이의 있습니다』에 보니 그는 시골의 가난한 빈농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알았고 부모님에게 항상 겸손하게 남을 돕고 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남편되는 분이 참 나쁘네요. 한 마디로 지능적이지요. 그렇게 좋은 머리를 좋은 데 쓰면 얼마나 좋아요. 꼭 그렇게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 손해 입히는 데 쓴다니까…. 아무튼 그런 남자들은요, 혼을 내줘야 돼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거기 변호사가 있으면 나도 변호사예요. 그쪽이 잘못했는데 왜 질 것이라고 지레 포기를 하세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남자들의 눈으로 잘못 운용해서 그렇지 법은 정의롭고 공정한 것이에요. 그걸 성실하게 파고들면 이기게 돼 있어요. 논리싸움이거든요.” 그의 화끈한 말은 같이 간 선배에게 용기의 폭포수가 되었고 나에게는 살아 있는 법여성학 강의였다. 이야기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방송국이라고 했다.
“그 프로그램 하면서 제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몰라요. 억양이 세다, 말투가 부드럽지 않다. 날 꽃으로 갖다가 앉힌 줄 아는 모양이에요. 옷차림이랑 얼굴모양도 나답지 않게 해놓고, 그것까진 좋아요. 공동 MC인데 작가가 가져온 대본을 보니까 저는 옆에서 맞장구만 치게 돼 있더라구요. 문제제기를 했죠. 그랬더니 작가들도 여자인지라 곧 수긍을 해요. 그렇지만 남자가 중심, 여자는 보조라는 인식이 윗사람부터 아랫사람까지 아주 절어 있어서 달라지지 않아요. 그걸 자꾸 지적하다보니 나만 까탈스럽고 잘난척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거예요. 언론이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해요.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그러니….”여성운동가를 자처하는 나로서도 그런 판에서는 그처럼 투철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금 감탄했다. 그가 사회성이 덜 발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회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나이 어린 그에게 서서히 존경심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본 것은 95년 12월이었다. 꽤나 긴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에 그는 아팠다고 했다. 책을 냈다고 한 권 주는데 제목이 『이의 있습니다』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 둘이 간단히 송별회를 한 며칠 뒤, 아침 주부대상 프로그램이 신년 첫방송으로 마련한 이른바 말발 센 여자들 초대하는 프로그램에서 출연교섭이 들어왔다. 나는 거절했다. 다음날 아침 그가 전화를 했다. ‘나가야 한다. 나도 갈 거다. 가서 여자들에게 정신 번쩍 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사명이다’. 마다할 명분이 없었다. 변호사가 거저 되는 게 아니다 싶었다.
뚱뚱한 여자도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사회
3년이 지나 미국에서 돌아온 그를 다시 만났다. 한국에 와서 보니 무엇이 바뀌었냐고 물었다.
“오늘 현장 검증 갔는데 사무장이 판사에게 돈봉투 주던 게 없어졌어요. 밥값 조로 줬었는데 거기도 받을 생각 안하고 우리도 주면 안 되는 걸로 알고. 또 변호사가 판사에게 전화로 설명하면 건방지다고 했는데 요새는 전화로 설명해도 돼요. 그게 확실히 바뀌었어요. 법조비리 터지면서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러더군요. ‘여자니까 가정사건 주로 하시겠죠’ 그 사람이 서울대 교수였어요.”최근 미국 여성운동의 동향이 성별역할 분담과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자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왔다니 그가 느꼈을 씁쓸함은 더 했으리라.
“미국으로 떠날 때 저는 완전히 지치고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몰랐었어요. 한 마디로 과부하 상태였지요. 정신대, 주한미군 범죄, 성폭력, 가정폭력, 국가보안법, 시국사건 무료변론, 당직 변호사… 변호사 한명이 여성권익이나 인권에 관심이 있으면 너무 많은 것이 요구되고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고… 변호사가 시민단체를 돕는 일은 돈 내고 시간 내는 것인데 절반은 돈벌이를 하고, 절반은 무료로 해야하는데 최소한의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시간도 없으니 결국 소모만 되는 거지요. 민변 소속 소수 변호사는 모두 그런 과부하상태였어요.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더 과부하가 걸렸죠.”그래서 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 가보니 변호사 윤리에 아예 자기 시간의 일정부분을 무료변론에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많은 변호사들이 사회단체에 기여하거나 헌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돌아와 보니 민변에 여성위원회가 생겼어요. 여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여권신장을 위해 돕는 것이라면 그럴수록 남자 변호사를 많이 참여시켜야지요.”그는 여자이기 때문에 여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법이 인간평등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호사로서 소송을 통해 여성의 지위신장에 그리고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을 통한 사회발전을 그는 미국의 판례연구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항공사에서 뚱뚱한 여자나 임신한 여자를 해고한 것에 대해 소송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나이 많은 스튜어디스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소송은 여성을 근무능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과 섹시함을 비즈니스 전략화 하는 산업을 추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금녀의 구역이었는데 여고생들의 진정을 받아들여 법무부가 소송을 제기하여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문이 재미있어요. ‘호된 훈련을 감당할 여자가 반드시 있다. 입학에서부터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성차별이다’ 방송국 성차별 소송도 있어요. 여성앵커들이 나이 들면 밀려나는 것, 남성은 늙을수록 중후함으로 인정받는 것과 다르지요.”
관행화된 성희롱에 경종
최근에는 성희롱 소송이 압도적이라고 한다. 미국에도 성희롱 법이 없었지만 20년간 부단히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이 마련되었고 그 결과 상사가 부하직원을 성희롱했을 경우 고용주가 책임지도록 함으로서 성희롱 예방교육에 기업들이 철저히 노력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보세요. 아무도 그걸 문제라고 인식 못했어요. 음성적으로 성희롱이 판치는 가운데 성희롱은 강간이 아니므로 문제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성희롱에 대한 배상은 생각도 못했잖아요. 온갖 정보가 집중되면서 법원이 불법행위로 인정한 것이지요. 법은 포괄적으로 되어 있는데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헌법은 열려 있는 법이에요. 그러므로 시대정신과 가치관이 거기 들어가야 하는 거지요.”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영어로 쓴 논문 한 편을 내게 주었다. 하버드 법대 졸업논문으로 쓴 담배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담배소송의 역사는 40년인데 금연운동단체나 간접흡연자들이 담배회사에 계속 져오다가 3∼4년 전부터는 이기고 있다고 했다.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판단될 때일지라도, 아니 그럴 때일수록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게 변호사이고, 세상이 전부 그러려니 하고 있는 것을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예민한 사회의식적 후각을 가져야 변호사일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달았다.
아직도 변호사를 ‘산다’는 말이 통용되고 억울해도 돈 있어야 재판 건다는 통념이 지배적인 우리 사회를 생각할 때 그의 존재를 변호사들에 대한 “이의 있음”으로 해석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봉사정신 배운 미국유학
그는 지명도가 생기고 한참 잘 나갈 수 있는 그때에 과감히 사무실과 전세 보증금을 빼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몸 지치고 나이 들고 역량은 국내에만 제한되고 멀리 바라볼 식견없이 소모만 된다면 인생의 앞날은 뻔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내몰았다. 안주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넓고 큰 자기’를 찾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키우겠다는 발심은 특히 조건에 쉽게 타협하여 자신의 잠재능력을 잠재우는 우리 여성들에게 자극하는 바가 크다. 미국 농무성의 파견근무 조건으로 뒤따라온 남편이 워싱턴에서 아이를 돌보겠으니 아내를 멀리 떨어진 보스톤의 하바드 법대에 가도록 권한 것도 그의 강한 정신력을 믿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경제적으로 극빈 생활이었어요. 커피 한 잔을 사 마실 수 없었어요.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내가 왜 사서 고생인가 후회도 들었지만 배움에 대한 만족감으로 감수했어요. 하루에 200페이지씩 읽어야 하니 아침 여덟 시부터 밥 때 외에는 도서관에서 죽쳤어요.”잠깐 시간이 나면 싼 비행기표를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그렇게 날아가서 김치 담그고 밑반찬 해놓고 다시 왔다. 운동화에 청바지 입고 배낭이 그의 고정스타일이었다. 흔한 미제 가전제품 옷 화장품 아무 것도 없었다. 하루 15시간씩 공부해서 두 달 반만에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니 눈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놀랍고 존경스럽고 자랑스런 사람이라는 감탄이 내 안에서 계속 올라왔다(그가 미국에서 내게 안부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낸 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답장 한번 안한 죄책감에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그의 장기적 안목 또한 배울만한 점이다. 변호사들이 전공을 개척해야 살아남는 추세를 파악한 바 그는 언론사건, 연예계 법률문제, 지적재산권 등을 전공분야로 정했다.
“이 셋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표절시비, 음반 저작권 유명인의 모습을 광고에 이용하는 초상권 침해, 비디오 사건의 오 아무개씨도 사생활 침해로 언론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출연계약에도 법률문제가 따르지요.”장차 돈 좀 될 분야를 전공으로 잘 정했다는 농담을 건넸다. 그간 공부하느라 찌들었던 생활이 펴길 기대한다는 기원을 담은 말이었는데 그는 웃으면서 ‘돈도 벌어야죠’ 하더니 그러나 돈만 벌지는 않겠다고 했다.
“미국에서 저는 변호사 자격증도 중요했지만 자원봉사정신을 배운 것이 컸어요. 국제 변호사가 된 후 카운티 법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범죄 청소년에 대한 가정환경 조사를 자원봉사로 했어요. ‘나는 여기 살면서 우리 아이가 공립교육을 무료로 받는 혜택을 누렸다. 한국인으로서 남은 기간동안 미국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거였지요. 그들은 정말 기쁘게 맞아 주었고 그 분야에서 배운 바가 많았어요. 자원봉사가 그저 남 좋은 일만이 아니에요. 미국 여성의 60%가 직장인입니다. 전업주부도 자원봉사로 사회활동을 다 해요. 사람들이 아주 지적이고 시간 때우기식의 활동은 거의 없어요.”여성운동가로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다녀야 하는지 사명감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여성단체에서 저 이용하세요. 뭐든지 도울게요, 사실 같이 하는 거지만요. 저 사례연구 많이 하고 좋은 자료들 많이 가져왔어요. 사실 전처럼 과부하가 걸릴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그동안 충전 좀 됐으니까 이제 또 일해야죠.”밤 9시가 넘은 시간에 그의 남편이 사무실로 아내를 데리러 왔다. 나에게 집이 시외인데 어떻게 가겠냐고 하더니 대뜸 “여보, 우리 드라이브 삼아 오 선생 집까지 데려다 주고 옵시다.” 판단하는 순간 빛처럼 직진하는 그의 실천력. 그 저돌성, 피로에 쌓인 그 남편의 얼굴이 채 대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먼저 답을 했다. 지하철이 더 빠르다고.
“어머, 그래요.”
씩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 혼자 말했다.
“못 말리는 배금자, 당신이 다시 떴군요.”
그는 살아 있는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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