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역 민주화항쟁 참여시민 허정길
1999/1999년 06월 :
1999/06/01 00:00
0.75평 지옥에서 보낸 11년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한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셨고, 청년은 공고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며 ‘보통 사람’의 꿈을 꾸었다. 장가가기에도 꽉 찬 나이 서른 하나. 이제 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머니를 모시며 행복하게 살리라.
그러나 그의 꿈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불혹의 나이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통탄의 한뿐이다. 87년 6월 당시 대전지역 민주화 항쟁에 나섰던 시민 허정길 씨(무직, 43세). 그는 꼬박 11년을 차가운 감방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살인범’이라는 무거운 죄명을 뒤집어 쓴 채.
“제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해야지유.”
지난해 8·15특사로 풀려난 그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개최하는 ‘교도소를 걱정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란다. 11년 동안 대구, 김해, 부산, 강릉 등 전국 14개 교도소를 돌아다니며 갖은 고초를 겪은 그의 ‘이력’은 이런 모임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쓰일지 모를 일이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작았다. 11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얻은 버릇이리라. 긴장된 자세로 앉은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듣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는 상상도 못했쥬. 저는 그때 8톤 트럭 몰았어유. 국민운동본부에 일하던 친구들하고 모여서… 어린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러고 있을 수 있냐고. 그런 얘기 끝에 시위대에 참가하게 됐는데….” 국민운동본부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자 시위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랐다. 충남대 등 대전 시내 5개 대학 학생들이 벌인 거리시위에는 1만여 명의 대중이 참가했다. 대전에서는 특히 경찰의 과잉진압 양상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시위대가 도청을 점거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쥬, 시내 일원은 눈을 뜰 수가 없었으니까요. 최루탄 추방결의대회하고 나오니까 최루탄을 계속 쏴 제끼고.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집회장소에 가려고 하는데, 버스에 학생들이 올라타니까 운전수가 시동을 걸어둔 채 내려버린 거예요. 저는 버스 운전할 줄 아니까 학생들 데려다 줘라, 해서 운전을 하는데 우측에서 최루탄을 쏘더라구요.” 삽시간에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온몸으로 퍼지는 최루탄 가스에 질식할 정도였던 그는 눈조차 뜰 수 없는 상황에서 버스를 멈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버스를 채 피하지 못한 전경 한 명이 버스에 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치이는 줄도 모르고 계속 버스를 몰아 학생들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6시 뉴스부터 계속 속보가 나왔다. ‘버스를 탈취한 시위대가 전경을 죽였다’고. 그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내가 버스를 몰았다’며 나섰다. 그것이 곧바로 ‘살인자’로 낙인찍히는 길인지도 모른 채. 그날로 11년의 수감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내가 운전했다, 그런데 사람 죽인 적 없다, 그랬쥬. 경찰서에 MBC 기자가 왔었는데, 나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라구. 그래서 나는 사람 죽일 의도가 없었다, 잘못된 사회는 바꿔야 된다고 얘기했지. 그런데 나보고 ‘정신 못차렸다’고 그러더라구.”조서를 꾸미는 동안 형사들은 그를 무릎 꿇리고, 등허리에 ‘전경 죽인 놈’이라고 글씨를 적었다. 분홍글씨가 새겨진 그의 등으로 형사들의 구둣발이 쏟아졌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흥분한 수사관들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그는 살인 및 집시법 위반, 그리고 살인미수죄가 적용되어 사형을 구형받았다. 선고는 15년의 중형. 그후, 항소 상고도 모두 기각됐다.
“88년, 6월항쟁 관련자들이 석방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일반사범 문제수로 석방에서 제외됐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저는 그 때 잡혀들어 온 사람들과 같이 ‘교육’ 받았어요. 삼청교육대도 그보다 덜했을 거구만요. 비 오는 뻘밭에서 모래가마니 메고….”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정좌한 자세로 하루종일 지내야만 했고, 책조차 반입이 되지 않는 ‘특별문제수’의 신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다. “너희들은 여기서 죽어야 나갈 수 있다”는 소리도 몇년을 들었다. 특별문제수로 낙인찍힌 6∼7명이 비인간적인 처사를 비관해 목을 매달았다. 그래도 그는 살아남았다. “개 잡듯이 패는” 구타의 세월 속에서, 교도소의 비인간적인 행태 속에서 그는 단식투쟁도 불사했다. 위에서 피가 올라왔지만 어머니를 살아서 만나야 한다는 일념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불과 5개월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억울하지만 재수 없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일부러 죽인 게 아닌데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잘못된 사회는 바꿔야 하는 건데.”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다시 87년의 상황이 오면 어떡하겠냐고 어렵게 물었다.
“당연히 참가해야죠.”
허정길 씨에게 87년 6월은 ‘당연히’ 담당했어야 할 시민으로서의 도리였다. 그러나 ‘못난 아들 손 한번 잡아 보는 게 소원’이라던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 한이라는 허정길 씨, 그들의 삶과 죽음은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어느 시인은 87년 6월을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라 표현했다. 그런데 오늘, 그 ‘죄의식’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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