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응징과 인도주의의 역설
1999/1999년 05월 :
1999/05/01 00:00
무력응징과 인도주의의 역설
멀리 코소보의 비극과 나토의 폭격은 우리와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갈등의 잔학성과 복잡한 흥망성쇠의 역사를 배경으로 발칸반도는 종종 이해가 불가능한 ‘화약고’로 묘사된다. ‘화약고’ 시나리오에서는 먼저 불씨를 던지는 사람만 죄인일 뿐 다른 모든 이들은 무고한 피해자가 된다.
불똥이 튀지 않으리라 믿는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피해자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만 남는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이 총력을 다한 나토 최대의 공습 결과가 <범죄국가-무력응징>이라는 간편한 공식으로 처리될 수 있을까?
처음에 300여 대의 전투기, 전폭기로 출발해서 3주만에 약 1,200대로 증파시킨, 그리고 3주가 지난 현재 해결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창설 이후 최대의 이번 나토공습은 코소보 지역에서 밀로셰비치정권이 벌인 잔학성과 랑부예 평화협상의 결렬을 군사행동의 명분으로 삼았다. 발표된 나토의 입장은 아주 단순하다. 밀로셰비치정권은 대량학살을 자행한 범죄정권이다, 평화협상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군사행동이 없었으면 코소보 피해자가 더 늘었을 것이다, 확고한 군사행동은 밀로셰비치정권을 굴복시킬 것이다, 굴복 이후 평화체제를 유지하겠다 등이다.
많은 경우 이런 명분을 안 믿는 사람들도 유고정권의 잔학성을 생각하면 나토공격이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단순논리에는 위험이 도사릴 뿐 아니라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워싱턴 일각에서 왜 이 전쟁을 “울브라이트 개인의 전쟁”이라고 부르는지(『워싱턴포스트』 99년 4월 7일자 참조/96년 울브라이트는 ‘무역제재로 이라크 어린이들이 5년간 50만 명 사망한 문제’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그만큼 대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왜 언론에 유고 민간인들의 피해는 제대로 보도가 안 되는지, 나토 50주년에 벌어지는 이 전쟁과 나토확대 전략은 어떤 관계인지, 충분히 생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비록 이번 공습이 람보와 비디오게임에 적응된 미국인들과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하더라도, 몇가지 간단한 사실 대비만으로도 나토의 공습 명분은 거의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 드러난다.
거짓말과 최면, 그리고 혼란
무엇보다 공습은 3주가 지나도록 원래 목적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대신 얻은 것은 아무도 원치 않는 대규모 난민 발생과 유고 민간인 사상자와 민간시설 파괴, 그리고 밀로셰비치정권의 강화와 미러관계의 불안, 짓밟힌 유엔의 뒷처리 부담 등이다.
폭격의 인도주의 명분
나토 폭격의 가장 큰 거짓말은 인도주의라는 전쟁 목적이다(클린턴은 “깨끗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결과를 보더라도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고통을 오히려 몇배 증폭시켰고 이쪽 저쪽에서 폭격 “실수”로 이미 100여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으므로 사실은 이번 나토공격은 인도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시민생활상의 고통과 경제시설의 파괴, 우라늄 탄환 사용으로 인한 수세대의 오염과 질병, 대대로 전해질 세르비아계, 알바니아계의 분노가 모두 합쳐져 대대로 이어질 인도주의의 파괴로 이어질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방어조직인 나토의 군사행동으로 유고연방 안에 국한되었던 분쟁이 이제 발칸지역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토 각국이 수용한 각각 수백명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코소보 난민은 가뜩이나 외국인 배타주의가 늘어가는 사회에서 온갖 문제를 야기할 것이고…. 한 마디로 분쟁의 둑을 터뜨렸다.
인도주의 명분은 명분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인도주의 명분이라면 미국산 전폭기와 무기로 코소보와 같은 규모의 학살과 100만 명의 쿠르드족 피난민을 야기시킨 터키, 주로 영국제 무기로 수만 명 규모로 동티모르인을 학살한 인도네시아, 미국의 묵인 아래 코소보 규모의 학살과 130만 명의 피난민을 발생시킨 콜롬비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 국제법상 최대의 무법자 이스라엘 등지에 진작 폭격을 감행했어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의 비극은 코소보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결국 인도주의 명분이라면 나토는 매일같이 회원국 터키를 포함해서 세계 수십 곳을 폭격해야 한다. 그러나 폭격은커녕 이들 국가를 악당 국가로 지목하지도 않는다. 유일한 차이는 미국과의 친분 여부. 한 마디로 인도주의 명분은 주로 강대국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는 일종의 여론 수단일 뿐이다. 즉 그럴듯한 결과도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번 나토와 미국의 더러운 전쟁이다.
진짜 목적은 블레어와 클린턴이 초기에 자주 언급한 “나토의 공신력 보장”에 있다. 나토의 원래 적이었던 소련이 사라진 지금, 50주년을 기념해서 나토가 유일한 세계 경찰조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적과 무력과시가 필요한 것이다(미국정부의 세계전략계획서에는 ‘미국이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세계가 인식하는 것이 안보에 더 유리하다’는 대목도 있다). 이라크와 함께 유고는 간편하게 가공된 “새로운 적”의 하나일 뿐이다.
응징의 여론
전쟁의 온갖 모순을 다 인정하더라도 유고정부의 잔학상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밀로셰비치를 “발칸의 히틀러”로 부르고 2차세계대전시 연합군의 역할을 상기시키면 이러한 반문은 쉽게 응징의 여론으로 전환된다. “해치워 버리자”는 심리가 확산된다.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여론이다.
그러나 유고가 속한 유럽에서는 미국과 달리 자발적으로 가슴에 표적그림을 달고 인간사슬을 이루며 폭격에 저항하는 민간방패를 형성하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모습에 매우 당혹해 하고 있다. 한때 수만 명의 반정부시위대를 동원했던 유고 민주화세력(여성운동, 평화운동,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합체로 존재하고 있었다)의 궤멸과 밀로셰비치정권의 강화는 더 당혹스런 일이다. 코소보 평화주의 세력의 붕괴와 “대알바니아”를 부르짖는 민족주의 세력(현재 언론에 “자유투사”로 소개되는 이들중 일부 조직은 최근까지 일부 유럽국가의 경찰당국으로부터 대규모 마약밀매 혐의로 추적받고 있었고, 98년초까지 테러조직으로 규정되었다)의 득세도 골치다. 나토폭격으로 산산조각난 75명의 코소보 주민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유고군의 의도된 작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클린턴, 4월 15일)”는 등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응징은커녕 망신당할 조짐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은 이라크에 대해서 8년동안의 군사공격과 제재로도 아무런 굴복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미국과 러시아가 망신당한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이 점점 더 자주 거론되기 시작한다. 유럽의 베트남, 유럽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비유에 “해치워 버리자”는 목소리가 움찔한다. 끔찍한 피의 수렁이 다시 기억나기 때문이다.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사라졌던 반전 평화운동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국제적인 연대망을 갖추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점점 응징보다 명예로운 후퇴를 말하기 시작한다. 유엔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다. 폭격 4주째 유럽사회의 모습이다.
국제법의 몰락
이번 나토공습은 국제법상 완전한 불법이다. 코소보사태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유고연방의 국경내에서 발생했고 무장세력의 의도적인 상호 교전이 있었으므로 저급 내전에 속한다. 즉 내전중지를 위한 국제적 중재가 필요했던 사태다. 랑부예 1차 협상이 끝나자마자 나토의 19개국은 전쟁선포도 하지 않고 유고를 공격했으므로 야만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시작한 셈이다.
무엇보다 모든 회원국에 법적 규정력을 갖는 유엔 헌장 42조에 따르면 유엔 안보리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분쟁 해소 노력이 소진했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주권국가에 전쟁을 선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1990년∼91년 이라크공격 당시 러시아를 경제협력 명분으로 겨우 설득하고 중국의 기권을 통해 가까스로(그러나 역시 유엔 헌장상 불법인 상태로) 유엔의 축복을 획득한 미국으로서는 세르비아와 러시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안보리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목적범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유고전쟁은, 국제사회가 독재국가처럼 법이나 규범보다 무력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긴 했지만, 바로 그 불법성 때문에 나토의 앞날에 두고두고 큰 멍에로 남을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분쟁세력에게 불법행동의 명분만 키워줄 것이다.
폭격의 인종주의
“나토국가들이 피난민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사진을 찍을 때뿐이다.마치 결혼식장에 찍듯이.” 영국 주요 일간지에 실린 한 ‘반전’ 평론가의 지적이다. 턱없이 치를 떨거나 하는 식으로 호들갑 떠는 경우에는 함정이 있다. 서구가 인종청소에 치를 떠는 이유도 뒤집어 보면 단순히 ‘히틀러’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다. 나토의 명분에 충실하자면 지상군을 투입해서 코소보를 안전지역으로 속히 회복시키고 피난민을 모두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를 속출하는 폭격에만 의존하는 것은 나토 군인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깨끗한 전쟁”을 위해서라고 한다. 이 무슨 해괴한 인종주의인가? 폭격맞는 세르비아,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죽어도 “전쟁 중에는 어쩔 수 없다” 하고 영미 군인들은 “인도주의” 전쟁 목적이라도 다쳐서는 곤란하다? 명분이야 원래 허구적이었지만 전쟁을 치르자니 이제는 사람의 주검 값어치도 차별이다. 우리 주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서양 시민권 없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듯하다. 인종청소에 대한 서구의 호들갑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세련된 인종주의 숨기기를 위한 자기최면일 뿐이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하고 수백 명이 죽는 등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데도 밀로셰비치가 살아남으면 나토는 위기에 빠진다. “나는 밀로셰비치정권에 반대한다. 반정부 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폭격을 맞는 마당에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베오그라드 시민의 절규처럼, 밀로셰비치정권이 날로 강화되는 것도 나토로서는 악몽이다. 유고 독재정권과 오합지졸 코소보해방군은(미 해병군가를 부르며) 붕기탱천인 반면 민주세력은 최악이다. 이제 자생적인 힘으로 평화와 인권을 회복하기는 점점 더, 앞으로 상당기간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히틀러” 정권을 붕괴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지상군을 투입하고 더 깊이 개입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러면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이 희생된다. 그러면 유럽판 베트남, 유럽판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발생된다. 다가올 선거에 악재다.
전쟁놀이의 끝
나토는 초조하다. 물러서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3주가 지나자 걷어차 버렸던 유엔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엔을 모독하며 시작한 전쟁이라 유엔 개입의 명분을 쌓자면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폭격에만 의존하자니 망신만 당할 판이다. 결국 이 더러운 전쟁은 유엔을 내세워 흐지부지 종말도 해결된 것도 없는 지리한 말싸움으로, 집권자들간의 흥정으로 즉 다시 원점에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볼 것 같다. 명분을 내세운 세력들은 면죄받고 시체는 말이 없고 원한은 응어리지고, 뒷처리하는 진짜 일꾼들에게 짐만 안긴 채.
아, 참으로 전쟁이란! 전쟁이란 대체로 명분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명분에 집착한다. 그리고 전쟁 지휘관들의 체면상 승부가 나기 전에 물러서지 못하게 만든다. 초조한 독일의 슈뢰더 수상이 평화중재안을 제안해도 영국의 블레어 수상은 “밀로셰비치를 패배시킬 때까지 공습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듣기에도 어색한 강경조로 응수한다. 전쟁이란정확히 얘기하면 ‘남성들의 싸움’에선 명분은 곧 사라지고 오기가 발동한다. 전쟁은 ‘오기’를 낳고 ‘오기’가 전쟁을 지속한다. 인도주의적 전쟁은 없다. 깨끗한 전쟁도 없다.
그러면 코소보에서의 만행을 앞으로 어찌 막을 것인가, 여전히 답답한 심정은 남는다. 이에 대해 역사는 외부의 군사행동이나 힘에 의존해서는 진정한 민주화나 평화가 이뤄질 수 없다고 가르친다. 폭격은 오히려 민주-평화세력을 붕괴시키고 감정적으로 격앙된 청년중심의 군사세력을 키웠다. 비록 평화를 회복하더라도 전쟁이 키운 세력은 두고두고 그 사회를 좀먹는다. 전쟁의 법칙이다.
‘답답함’의 여론을 바탕으로 군사행동으로 쏠리는 조급증, 이에 대한 여론의 지지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남성들이 장악한 국제정치의 남성적 특징이라 말한다. 답답함의 여론은 정교한 평화구축 계획으로 대체돼야 한다. 문제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길게 갈등을 해소하려는 평화적 노력이 유약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짓(남성들이 보는 여성성!)으로 치부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나토나 밀로셰비치나 코소보해방군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북아일랜드의 경우 평화협정까지 20년 이상 걸렸고 적대적인 남북한도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면 50년 이상 소요된다. 현실의 평화는 인내를 요구한다. 답답함을 섬세하고 잘 짜여진, 다각도로 서로 이익이 되는, 상부상조적인 평화계획으로 전환시키는 이성과 끈기가 온전한 사람들이 택할 길일 것이다.
최근 이라크와 코소보사태를 보면 무시못할 공통점이 있다. 어디엔가 서구문명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미국이 ‘악당’ 국가로 지명하고 그곳에 부활한 “히틀러”가 있다고 선포되고 그가 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인도주의”적 개입의 명분을 제공하고, 그리고 다른 강대국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옛 서방세력의 군사공격이 감행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우였으면 하는 심정에서 북한을 이에 대비시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비슷해 보인다. 북한은 아직 군사강대국이 아닌 중국의 느슨한 보호를 받고 있지만 1994년 한반도에서 실제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는 사실과 러시아가 최근 경제지원을 대가로 미국의 군사행동을 눈감아주었던 사례, 그리고 중국정부와 엘리트의 경제성장 열망, 일본의 최근 군사동향을 염두에 두면 우리에게 안심할 여지는 별로 많지 않다. 특히 유럽에 비해 미국에 대한 다자간 억제체제나 견제 여론, 평화세력, 국제적 관심 그 어느 것도 전무하거나 열등한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행동은 코소보에 비하면 그야말로 ‘맘먹기’에 달려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와 코소보
때문에 전쟁예방의 관점에서 미국이 시작한 전쟁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코소보에서 군사행동의 무용성을 핵심 교훈으로 얻어야 할 것이다.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코소보공습이 주는 교훈은 정권과 국민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면 어떤 군사행동으로도 그 나라를 굴복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쟁을 겪은 청소년들을 군사행동 또는 테러로 내몰면서 새로운 분쟁과 폭력을 수십 년간 연장, 증폭시키고 인간성과 자원을 고갈시키며 인근 지역을 총체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 투하된 폭탄의 수만큼 증오와 폭력의 기간은 길어진다. 군사행동은 총체적으로 퇴보하는 길이라는 점이 한반도와 그 근처에서 군사행동을 꿈꾸는 망상주의자들에게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코소보전쟁을 보면 명분 없는 전쟁은 곧 여론의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대량학살 범죄, 인권침해, 인도주의적 개입 등의 수사로 표현되는 구미국가의 윤리적 판단은 점점 더 신빙성을 잃어가고 그 뒷배경에 더 논쟁이 모아진다. 초기 여론의 싸움에서 한쪽이 약점을 잡히면 기다렸던 군사행동이 전개되지만, 전쟁 개시 이후 여론의 전쟁은 지속된다. 코소보에서 보듯이 군사행동이 명분을 쌓지 못하자 여론의 전쟁은 ‘인간 드라마’에 의해 좌우된다. 피난민의 처참한 행렬, 폭격의 민간인 희생자들, 노인, 병약자, 아녀자들의 고난을 둘러싸고 양쪽 지휘부 사이에 더러운 여론전쟁이 진행된다. 고고한 목적은 사라지고 민간인의 죽음을 담보로 한 말싸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분없는 전쟁 대신 처음부터 지리한 말싸움만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적대국간의 말싸움은 아주 건설적인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군비지출과 버금가는 군사적 긴장을 자랑하는 동북아지역에서, 또 국제적인 반전, 군축, 평화운동의 경험이 거의 전무한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여론은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우리에게 코소보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예나 지금이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봉합할 뿐이며 그 과정에서 일부 정치세력과 군산복합체만 이익을 보는 장사놀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비군사적인 평화노력과 적을 설정하지 않는 비군사적인 안보체제의 수립없이 코소보사태는 앞으로 반복될 강대국 패권주의의 작은 사례일 뿐이라는 암시도 우리에게 침울하게 다가온다. “문명의 충돌”을 주장한 헌팅턴은 최근 “미국은 점점 난폭한 초강대국으로 행세하고 있는데…(그러면) 그 힘을 견제하기 위한 대항 연합이 생길 것이다”고 경고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번 폭격을 보면서 “언제나 세계 약소국의 민족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미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까?”라고 탄식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듣기 힘든 금지된 탄식과 경고이다. 20세기말 패권시대의 지속을 알리는 인도주의의 조종(弔鐘)을 들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 사회에는 어떤 조종이 필요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 조종이 새로운 반패권 연대의 탄종(誕鐘)이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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