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원활동가의 호주 환경운동 체험기
98년도 가을 한국은 IMF사태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상황이었고 난 개인적인 혼란함 때문에 호주로 배낭여행이란 걸 떠났다. 난 시민운동을 하려거나 배우러 호주에 가지 않았다. 운동(movement)이라곤 학생 때 거리에서 손 몇 번 흔들어 본 것이 전부이고 졸업 후 사회에서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온 터였다. 때문에 내가 호주에 갔던 것은 무슨 대단한 결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생활에 염증을 느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떠난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배낭 여행 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과 겪은 상황들이 모두 지금은 개인적인 추억으로 간직되지만 단 하나, 단지 추억이라기보다는 삶의 좌표처럼 남는 기억이 있어 잠시 같이 나누고자 한다.

그럭저럭 여행도 10개월째로 접어들어 호주를 한바퀴 돌고 어찌 어찌해서 호주 최남단의 섬인 타즈마니아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주도(州都)인 호바트라는 조그만 항구도시에 다다르게 되었다. 4월 초,중반 무렵이었다. 항구와 인접한 여행자 숙소에 자리를 잡고서 당시의 습관처럼 술집을 찾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어느 할아버지로부터 내일 시내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예정이니 나와보지 않겠냐는 얘길 들었다. 그저 지역에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다음 날 숙소를 나와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몰로 가던 중 센터포인트의 중심가 거리에서 어제 보았던 일상의 모습이 아닌 다채로운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만난 시위대, 지역 주민들이 집회 주도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류의 행사는 있었던 터라 그다지 신기할 건 없었지만 그간의 호주 여행 중 이렇게 대단위의 정치적인(?) 행사는 못봤기에, 더군다나 호주 본토도 아닌 이 조그만 남쪽 끝 항구도시에서 벌어졌던 것이기에 처음엔 조금 놀랐다.

이유는 호바트항에 미군의 핵전함이 들어온다는 것을 호주 그린피스 및 지역 환경단체와 그 밖의 단체들이 반대를 해왔는데 그걸 무시하고 주정부가 미해군의 입항을 허용했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항의를 하고 있었다.

행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내용을 갖고 있었다. 스케이트 보드와 롤러 브레이드로 무장(?)한 지역 청소년들에서부터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의 모임, 지역 극장주 연합, 사과농장 관계자들, 한달 연금을 행사비용으로 내놓는 연금생활자들의 모임, 그리고 군복을 입은 퇴역 군인들까지. 오히려 그린피스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바디 페인팅이라던가 뼈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하는 판토마임은 뒷전에 쳐진 터였다. 주요 행사내용은 현지 주민들의 의견개진과 타스마니아 주정부 관리들간의 설왕설래였다. 경찰들도 피켓을 같이 들고 있는 모습 또한 이채로웠다. 그것이 단지 그 경찰의 개인적인 파격이라 해도 나 혼자 놀라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 끼어있는 배낭객들과 한국인을 제외한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호바트 거주 이민자들의 무리가 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만든 피켓을 아이들의 손에 쥐어준 채…. 그저 그런 지역 행사일 거라는 어제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지역행사는 지역행사였다. 그러나 그저 그런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결국 호바트 항에는 미 해군 핵전함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항구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피켓을 들고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가졌다. 의외로 아주 밝은 모습으로.

그날 저녁 숙소에서 행사에 참석한 ATCV(호주의 삼림을 보호하는 외국인 자원봉사자 모임) 친구들과 함께 하며 몇가지의 궁금증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들은 나와 같은 외국인이었고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친구들이었다. 나만의 한국식 사고였을까? 이런 외진 곳까지 와서 타 지역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배우고 무슨 특별한 직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생각도 당연히 투쟁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고 이 지역에서 환경에 대한 모임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역민들이 중심이 되어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더 놀랄만한 일은 주도한 단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린피스까지도 외지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단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같이 공유할 내용이 중요했고, 일회성의 분노가 아닌 지속적인 관심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또 하나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밤 술집에서 조그만 사고가 하나 있었다. 미해군 흑인 병사들의 현지인 여자들에 대한 행패가 있었는데 주둔군처럼 행동하는 그들을 보면서 난 솔직히 동물적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보여준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경찰은 출동되지 않았다. 항구 근처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가족을 동반하여 나왔고 레스토랑이며 술집은 물론이고 문을 닫은 가게들까지도 전부 불을 켜고 장사를 다시 시작하였으며 6시면 끝나는 중심가의 자체 음악방송도 재개되어 도저히 미군 병사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저 호바트 주민의 일상에 파묻혀버린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끝내는 장교들의 인솔하에 병사들은 철책이 쳐진 자신들만의 항구 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는 끝났고 싸움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 이후 지금도 연락을 하는 한 히피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우린 주정부의 어려움을 안다. 때문에 입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단지 저 철조망 밖으로의 입항만을 허용한 것이다.”

그날 밤 난 얼떨결에 심야영업(?)을 하게된 술집에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틀 동안 흥분했었던 사람은 나와 미 해군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음 날 신문엔 아무 기사도 나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뉴스보도에서만 접할 수 있는 한국 시민운동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작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게 되었다. 핵 전함이었는지 핵 잠수함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개인적인 기억들이 근거가 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명분도 거창하게 시민운동에 희망을 걸고.

물론 다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짧은 기간이나마 보았던 한국의 시민단체의 분위기가 호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겪었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많은 것을 제외하고 가장 크게 단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한국의 시민운동은 무겁고 거창하다는 것이다. 일단 느낌이 그렇고 실제 일을 할 때도….

상근자들에게서 보여지는 80년대식 희생정신, 그것이 저간에 깔린 공동체의식 그리고 약간의 엘리트의식까지. 사업은 언론에 보도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거의가 취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은 뉴스보도를 보기만 하면 된다. 자기방식대로 말이다. 낙선운동이 한참 진행되던 얼마 전 TV를 보던 회사동료들이 말하듯이 “야! 잘한다 잘해. 참여연대는 완전히 떴구만 당(黨) 하나 만들어도 되겠어 시민당!” 이렇게 말이다. 물론 낙천낙선 운동이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의미있는 큰 일이었지만 난 사람들의 농담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해봤다. 왜 자꾸 한국의 시민단체는 TV나 신문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좀더 우리 곁으로 올 수는 없을까? 그래서 큰 결심 없이도 찾아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곳일 수는 없을까?

한국적 상황이 아직도 시민운동을 정치지향적으로 만들고 터뜨리기식의 언론플레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우릴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자’라거나 ‘언론의 물결을 타는 곳이니까’라는 식의 참여 말고 나의 일이란 생각으로 참여하는 시민을 기대하기엔 아직 시민의식이 미성숙한 것일까?

또한 이 악물고 하는 모습보단 즐거워하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싶은 것도 너무 거창한 희망일까.
서병철 제네럴네트웍스 기획실
2000/07/01 00:00 200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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