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쪽팔림으로 여러 사람이 즐겁다면, 내가 기꺼이….”

드라마 <허준> 임현식 버전으로 말하는 벤허나이트클럽 웨이터 박찬호(34세) 씨. 그는 전국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KBS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했단다. 진초록 바지에 연둣빛 체크콤비를 입은 그는 출연자 대기소를 왔다갔다하며 녹화 시작 전부터 출연자들과 ‘뒤풀이 장소’를 의논한다. 공개구혼을 위해 무대에 섰다는 신화영(37세) 씨. 그녀는 “동물의 왕국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전화번호 좀 잡지에 적어줘!” 하며 눈가에 반짝이를 붙이고 윙크한다. 탕수육 전문점에서 일한다는 1남 2녀의 주부 최미숙(36세) 씨는 얼굴에 연신 분을 바르고, 백마 라이브 카페에서 홀서빙을 한다는 젊은 청년은 “화악~ 망가질 거예요. 그래야 상 타죠” 한다. 미용사 출신 주부 김희선(28세) 씨, 원당에서 아동복 장사한다는 맹구 아저씨 이명수 씨, 마사회노래교실 400여 회원의 경쟁을 뚫고 출전한 노장의 정두연(69세)■권영희(71세) 듀엣,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로 분위기 석권을 자임하는 일산시 마두2동에 사는 만화가 배영호 씨. 모두들 거리를 지나다 한번쯤은 봤을 법한 평범한 얼굴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남들이 갖지 못한 재능과 ‘끼’, 노래실력이 그것.

고양시 꽃박람회가 한창이던 지난 5월 6일 토요일, 일산 호수공원 야외공연장.

봄볕엔 며느리만 밭에 내보낸다는 옛말이 있는데도 뜨거운 태양 아래 1,000여 명이 넘게 운집해 있다. 그들은 모두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한 지역 주민들의 익살스런 표정과 몸 동작을 보고 한바탕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모여들었을 것. 흥에 겨운 사람들은 시그널이 나오기도 전에 일어서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방청객들의 열기만으로도 이미 후끈 달아올라 있는 그 프로엔 어떤 매력이 있길래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까.

매주 일요일 정오에 방송하는 전국노래자랑을 애청한다는 어느 70대 노인은 “이 프로그램에는 우리 서민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어요. 번쩍번쩍 윤이 나는 세련된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노래하지 않아도 출연자의 목소리 따라 박수치며 노래하게 되고, 슬픔과 감동이 있는 가정사를 듣게 되면 같이 눈물짓게 돼요. 장애인문제, 노인문제까지도 얘기되는 이 프로그램 참 좋습디다”며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장단을 맞춘다.

언제나 출연자들과 반주로 호흡을 맞추는 김인엽 악단장. 그 역시 20년간 전국노래자랑과 함께 했다. 올해 회갑을 맞은 그는 뒷이야기만도 책 한 권 분량은 될 거라며 노래자랑 초창기 일화를 전해준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의 밑바닥이 구멍나 악기가 새나가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리고 다녔고, 전남 부안에서는 한 노인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노래자랑에 나왔는데, 본인은 정작 TV에 나오는 걸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전국노래자랑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 ‘사’자 들어가는 전문직이라야 대우받는 현실에서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 식품점 주인, 나이트클럽 웨이터, 카페 종업원 등 이른바 우리 사회 ‘비주류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에 대한 MC 송해(72세) 씨의 생각이다.

“노래자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프로예요. 남녀노소 없이 누구나 나와 노래도 하고, 세배도 하고, 음식도 나눠먹는 분위기죠. 그러니까 부담없이들 나오죠.”

담당 프로듀서인 안인기 씨는 위선과 체면 때문에 근엄떠는 사람들도 사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폭소를 터뜨린다고 말한다. 그가 연출하면서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토막.

“이른바 ‘보통사람’ 시대에 시장, 군수들에게 나와 노래 좀 하라 하면 권위적인 그들은 나오지 않았어요. 한다는 노래도 맨 비목, 선구자 이런 거…. 위신이 내려가면 안되니까. 그런데 밀양시장이 나와서 추억의 노래를 불렀는데, 동아일보 기자가 그걸 보고 ‘기자의 눈’에 쓴 거예요. 이게 얼마나 선량한가…. 그 후론 서로 노래 좀 부르게 해달라고 얼마나 부탁해 왔는지 알아요? 그리고 민선시대엔 더 했죠. 표와 관련 있다 싶으면 뭐든 다 하잖아요?”

이 프로그램은 매주 전국의 시, 군 단위를 돌며 노래자랑을 연다. 원하는 시, 군의 신청을 받아 가장 오래 전에 다녀온 시, 군부터 간다. 대략 예심을 신청하는 지역 주민은 1,000명 가량. 지금까지 가장 길게 예심을 했던 때는 10년 전쯤 1,200~1,300명 가량의 인천 시민들이 참여해 새벽 5시까지 격전을 벌였던 것. 최근에도 그 열기는 좀체 가시지 않고, 500~600여 명의 지역 주민이 언제나 모여든다. 20년 된 이 프로는 출연자 분석도 가능하다. 대개 노래자랑에는 7 : 3의 비율로 여성의 도전이 높고, 지역적으로는 충청․강원이 소극적인 데 반해, 호남․영남이 적극적이란다.

“충청도와 강원도에 가면 박수가 안 나와.” 안 PD는 전국적으로 안 다닌 데 없지만, 어디를 가든 지역감정의 벽을 느낄 수는 없었다고 덧붙인다. “바캉스 시즌엔 전라도 땅에서 경상도 사람이 출연해 노래하기도 해요. 같이 웃고 즐기죠. 본바탕 사투리 빡빡 써가면서 얼마나 노래를 열심히 하는데요. 노래 앞에 감정이 날 수 없죠.”

그는 사실 이 프로그램은 연출자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모여든 청중과 지역의 출연자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노래자랑은 ‘국민과 음악이 있는 한 영원하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0년간 지속된 이 프로에서 탄생시킨 기성가수도 꽤 된다. 1971년 10월 시작된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을 모태로 한다면 이미자 씨도 노래자랑 출신이고, ‘새색시 시집가네’의 유연실, ‘둥지’의 오은정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성가수 제조기 역할을 했다. 최근 전국노래자랑의 노래손님으로는 송대관, 태진아, 현숙, 설운도 등이 출연, 중견가수들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년이면 전국을 딱 2바퀴 돈다는 KBS 전국노래자랑. 그들은 지난 20년간 벌써 전국을 40바퀴나 돌았다. 40번 전국을 돌며 그들이 만든 편안한 웃음은 언제나 시청자에게 훈훈한 정서를 만들어 준다. 대중이 참여해 직접 만들어 가는 아마추어 노래자랑. 다음은 전남 보성군이다. 보성에서는 또 어떤 대중들이 좌중을 배꼽 빠지게 할까.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2000/06/01 00:00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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