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안보론 위에 피는 동충하초
2000/2000년 06월 :
2000/06/01 00:00
매해 한미 또는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될 때마다 우리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는 두 가지 일이 정례적으로 일어난다. 북한은 이런 군사훈련이 북한에 대한 ‘전쟁 기도’로서 북한의 안보와 한반도 평화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연일 응수하면서 전군 경계령 내지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미군 기지가 있는 오키나와의 카데나의 주민들은 하루에 200여 차례씩 마을 상공을 지나가는 전투기들의 굉음에 새벽부터 시달리며 생지옥을 겪는다.
그 다음은 상상하기에 뻔한 일들이 진행된다. 한미 당국과 언론은 이런 훈련이 방어용 훈련이며 북한에서 얼마든지 참관해도 좋다고 토를 달지만, 북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몇주동안 생난리를 겪고 국가자원도 크게 낭비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마을총회를 열고 일본 정부에 항의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협정에 따라 미군의 훈련에 어떤 제약도 가할 수 없다는 답변을 되풀이한다. 주민들은 삶 자체가 파괴되고 있다고 분노하지만 거대한 일본의 안보를 위해 몇몇 마을 주민들의 삶은 별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오키나와 얘기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매향리에서 그리고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아니, 이런 얘기는 사실 ‘안보’라는 말이 쓰여지는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안보가 지켜질 때마다 불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합동군사훈련은 몰라도 장기나 바둑을 두는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 중에 공격과 방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진실이 있다. 또 책 몇권 읽고 모임을 결성했다고 국가안보를 해친 불순분자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은 국가안보라는 것이 시대에 맞게 대충 조작되는 장난감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른바 북풍 총풍 얘기가 나오면 권력자들의 ‘안보 게임’의 수준을 짐작하게 된다. 한때 미국 관리들이 ‘핵무기는 사용이 목적이 아니라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목적’이라고 한 것은 마치 이 겁주기 게임의 진면목을 말한 거나 다름없다.
때문에 안보 전문가들 중에 ‘안보’란 실체가 없는, 정치인들의 언어행위에 불과하며 ‘안보의 영역’을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페미니스트 국제정치학자들은 안보 영역이 남성적 군사주의에 의해 가장 왜곡된 정치영역이라고 규정한다. 이보다 점잖은 안보 전문가들중 상당수도 국방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할수록 안보위협이 증대되는 ‘국방의 딜레마’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군사력의 명분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적대감인데 이 적대감이 상대국을 긴장시키고 군사력 경쟁을 하게 만들어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최근 미일 양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가 오히려 중국을 자극해서 대만을 압박하게 만들어 오히려 지역 안보를 불안하게 하는 사례도 여기에 속한다.
안보를 정치인들의 말장난이라고까지 보는 까닭은 안보의 영역이 온통 장막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서로 협박관계로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이러저러한 것이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어떤 정치세력이 선언하는 것은 그것을 군사적 위협이라고 해석해서 국민들에게 주지시켜야 정치적 이득이 생기기 때문인데, 이는 주술사들에게만 악마가 보임으로써 신통력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재해나 산업재해, 또는 대량 실업이나 범죄, 교통사고나 환경오염, 또 군사독재 아래 인권침해로 인한 인명살상의 위협도 보통 규모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적이나 군사적 대응과 무관하기 때문에 위협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즉 기존의 안보론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동기에 따른 취사선택적 상황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소수 권력층의 창작물로서의 안보론을 뒤집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 예를 들어 대안적 안보론이나 민중안보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위협 상황과 안전조치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어찌보면 가장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토론 영역인 안보의 영역에 대해서 마치 시민들이 왕정에 대해서 봉기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이다. 그 심정을 느껴보려면 가깝게는 매향리 주민들이나 미군 범죄의 피해자들의 심경을 헤아리면 족하다. 조금 멀게는 수십년간 거대한 국방예산 때문에 바닥을 기는 우리의 사회복지 현실을 생각하면 된다.
군사적 안보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民)중심의 대안적 안보론은 보통 세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객관적 변화에 대한 인식인데, 이제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간의 관계는 경제나 문화 어떤 면으로 보나 서로 깊이 연관되어 가기 때문에 상대 국가를 적국으로 상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국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인식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협력관계로 대하는 것이 훨씬 우리에게 또 상대방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이제 정보나 토론이 풍성해지면서 민중 스스로 무엇이 안보위협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소수 정치엘리트들이 안보론을 독점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특히 갈수록 친밀해지는 정치권과 거대 군수산업의 연계망은 일부의 기득권을 위해 안보론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만든다. 이럴 때 민중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안보위협을 기초로 새롭게 안보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은 이런 낡은 군산정(軍産政) 과두제를 폐지시키는 길이 된다는 생각이 두 번째 전제다.
세 번째 전제는 낡은 안보론의 사생아들, 즉 온갖 흉악한 무기들의 전지구적 범람이 이제 더 이상 눈뜨고 못 볼 위험한 지경까지 처해 있다는 인식이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살상과 분쟁이 무기의 범람 때문에 또는 그에 힘입어 발생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속화되는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더욱 가공할 무기가 계속 만들어지고 범람할 것이기 때문에, ‘무기없는 평화’를 더 이상 미래의 희망사항만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반(反)군사적 안보로서 대안적 안보를 모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안적 안보론의 세 가지 전제만 보아도 안보론은 기존의 권력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몇몇 평화이론가들은 대안적 안보론을 ‘아래로부터의 평화구축 모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평화체제를 만드는 힘, 즉 ‘아래로부터의 평화력’은 군사력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민간 평화조직, 직접 교류와 대화, 생활에 기반한 안보 인식의 형성, 가능한 분쟁의 예방 및 조정을 위한 민간 체계 등이 중요하다. 군사력과 관련된 권력구조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평화구축 모델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꾸려는 ‘대항 헤게모니’적 성격을 띤다. 밀로셰비치 패배 이후 코소보에 평화가 왔다고 믿는 ‘헤게모니 순응’적 평화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앞으로 전통적인 안보론의 허구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평화력에 대한 토론이 풍성해지는데 아래와 같은 비교표가 유익할 듯하다.
그 다음은 상상하기에 뻔한 일들이 진행된다. 한미 당국과 언론은 이런 훈련이 방어용 훈련이며 북한에서 얼마든지 참관해도 좋다고 토를 달지만, 북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몇주동안 생난리를 겪고 국가자원도 크게 낭비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마을총회를 열고 일본 정부에 항의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협정에 따라 미군의 훈련에 어떤 제약도 가할 수 없다는 답변을 되풀이한다. 주민들은 삶 자체가 파괴되고 있다고 분노하지만 거대한 일본의 안보를 위해 몇몇 마을 주민들의 삶은 별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오키나와 얘기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매향리에서 그리고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아니, 이런 얘기는 사실 ‘안보’라는 말이 쓰여지는 모든 곳에서 반복된다. 안보가 지켜질 때마다 불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합동군사훈련은 몰라도 장기나 바둑을 두는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 중에 공격과 방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진실이 있다. 또 책 몇권 읽고 모임을 결성했다고 국가안보를 해친 불순분자로 낙인찍히는 사람들은 국가안보라는 것이 시대에 맞게 대충 조작되는 장난감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른바 북풍 총풍 얘기가 나오면 권력자들의 ‘안보 게임’의 수준을 짐작하게 된다. 한때 미국 관리들이 ‘핵무기는 사용이 목적이 아니라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목적’이라고 한 것은 마치 이 겁주기 게임의 진면목을 말한 거나 다름없다.
때문에 안보 전문가들 중에 ‘안보’란 실체가 없는, 정치인들의 언어행위에 불과하며 ‘안보의 영역’을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페미니스트 국제정치학자들은 안보 영역이 남성적 군사주의에 의해 가장 왜곡된 정치영역이라고 규정한다. 이보다 점잖은 안보 전문가들중 상당수도 국방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할수록 안보위협이 증대되는 ‘국방의 딜레마’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군사력의 명분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적대감인데 이 적대감이 상대국을 긴장시키고 군사력 경쟁을 하게 만들어 칼날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최근 미일 양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가 오히려 중국을 자극해서 대만을 압박하게 만들어 오히려 지역 안보를 불안하게 하는 사례도 여기에 속한다.
안보를 정치인들의 말장난이라고까지 보는 까닭은 안보의 영역이 온통 장막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서로 협박관계로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이러저러한 것이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어떤 정치세력이 선언하는 것은 그것을 군사적 위협이라고 해석해서 국민들에게 주지시켜야 정치적 이득이 생기기 때문인데, 이는 주술사들에게만 악마가 보임으로써 신통력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재해나 산업재해, 또는 대량 실업이나 범죄, 교통사고나 환경오염, 또 군사독재 아래 인권침해로 인한 인명살상의 위협도 보통 규모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적이나 군사적 대응과 무관하기 때문에 위협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즉 기존의 안보론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동기에 따른 취사선택적 상황해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소수 권력층의 창작물로서의 안보론을 뒤집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 예를 들어 대안적 안보론이나 민중안보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위협 상황과 안전조치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어찌보면 가장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토론 영역인 안보의 영역에 대해서 마치 시민들이 왕정에 대해서 봉기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이다. 그 심정을 느껴보려면 가깝게는 매향리 주민들이나 미군 범죄의 피해자들의 심경을 헤아리면 족하다. 조금 멀게는 수십년간 거대한 국방예산 때문에 바닥을 기는 우리의 사회복지 현실을 생각하면 된다.
군사적 안보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民)중심의 대안적 안보론은 보통 세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객관적 변화에 대한 인식인데, 이제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간의 관계는 경제나 문화 어떤 면으로 보나 서로 깊이 연관되어 가기 때문에 상대 국가를 적국으로 상대하는 것이 오히려 자국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인식이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협력관계로 대하는 것이 훨씬 우리에게 또 상대방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이제 정보나 토론이 풍성해지면서 민중 스스로 무엇이 안보위협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소수 정치엘리트들이 안보론을 독점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특히 갈수록 친밀해지는 정치권과 거대 군수산업의 연계망은 일부의 기득권을 위해 안보론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만든다. 이럴 때 민중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안보위협을 기초로 새롭게 안보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은 이런 낡은 군산정(軍産政) 과두제를 폐지시키는 길이 된다는 생각이 두 번째 전제다.
세 번째 전제는 낡은 안보론의 사생아들, 즉 온갖 흉악한 무기들의 전지구적 범람이 이제 더 이상 눈뜨고 못 볼 위험한 지경까지 처해 있다는 인식이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살상과 분쟁이 무기의 범람 때문에 또는 그에 힘입어 발생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속화되는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더욱 가공할 무기가 계속 만들어지고 범람할 것이기 때문에, ‘무기없는 평화’를 더 이상 미래의 희망사항만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반(反)군사적 안보로서 대안적 안보를 모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안적 안보론의 세 가지 전제만 보아도 안보론은 기존의 권력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몇몇 평화이론가들은 대안적 안보론을 ‘아래로부터의 평화구축 모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평화체제를 만드는 힘, 즉 ‘아래로부터의 평화력’은 군사력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민간 평화조직, 직접 교류와 대화, 생활에 기반한 안보 인식의 형성, 가능한 분쟁의 예방 및 조정을 위한 민간 체계 등이 중요하다. 군사력과 관련된 권력구조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평화구축 모델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꾸려는 ‘대항 헤게모니’적 성격을 띤다. 밀로셰비치 패배 이후 코소보에 평화가 왔다고 믿는 ‘헤게모니 순응’적 평화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앞으로 전통적인 안보론의 허구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평화력에 대한 토론이 풍성해지는데 아래와 같은 비교표가 유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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