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야 할 '미국문제'
통일과정은 한반도 주민 7,000만 모두가 참여하는 거대한 심포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참여하는 남북한 정부와 일반 주민들 간에는 상호 적절한 역할분담이 있다. 남북관계 개선과정에서 정부와 민간부문 간 역할의 분담과 조화가 요구된다. 정상회담과 당국자회담 등은 정부의 고유한 역할이라면, 주민 생활상의 화합을 위한 실천적 노력은 민간부문에서 추진해 나가야 할 몫이다.

남북간 정치적 화해와 외교․국방 문제 등은 정부가 맡아야 할 부분이라면, 경제 및 사회․문화분야는 민간부문에서 접근돼야 할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동안 북한의 당국간 대화의 거부로 인해 경제분야를 비롯한 민간분야의 교류협력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남북간 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과정에서 이제 정부부문(Track1)과 민간부문(Track2) 간 역할의 조화와 병행을 모색해야 할 상황이다. 특히 민간부문은 정부차원에서 제기될 수 없는 문제나 정부간 공식적 교섭으로 해소될 수 없는 분야에서의 활발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남북한 간 사회․문화분야 교류협력의 중시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평화․화해․협력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현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비정부․민간부문의 역할이 증대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독일 통일과정에 민간교류가 큰 몫

분단국의 통일과정에서 민간부문의 역할 사례는 시민사회의 형성․발전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민간부문의 역할은 물론 평화적 통합에 기여하는 전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성취한 베트남의 경우는 일단 논외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멘의 통일과정은 분단국가간 평화적 합의통일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 사례라는 점에서 언급될 필요가 있다.

남북예멘은 1972년 전쟁을 치르고 난 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일원칙에 합의하였다. 그후 1990년 5월 통일을 선포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쨌든 1:1의 대등한 ‘합의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정치통합의 가능성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3년 4월 총선 결과 심각한 정치적 균열이 드러남에 따라 1994년 5월에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고, 두 달 후 7월에 북예멘이 남예멘을 정복함으로써 사실상 무력통일로 막을 내렸다. 남북예멘은 근대화 전략의 각기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다양한 부족세력, 군부, 일부 지식인만이 주요한 정치적 실체였다. 이를테면 부족적․종교적 형태의 전통사회의 맥락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사회로 시민사회라든가 민간부문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통일문제는 정치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문제였다. 통일 후 지금도 중앙정부가 지방할거적 부족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이 회교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이 지역의 새로운 정치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부문의 역할은 동서독 통합과정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분단국가의 교류협력은 동서독 사례에 적용되는 것으로, 서독정부와 민간부문의 역할분담은 통일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작용했다. 정부가 정치적 화해와 외교․안보 분야를 장악했다면, 민간부문에서는 다양한 교류협력을 추진했다. 서독은 동서독 간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국경을 초월하는 ‘하나의 문화민족’ 개념 위에서 ‘문화협정’을 추진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문화분야 공동협력을 계기로 상대편 체제의 사회․문화 생활에 대한 상호이해를 증진시켜 서로 다른 군사동맹에 소속되어 있고, 상이한 정치․경제적 구조하에 살고 있더라도 양독 주민간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민간부문에의 ‘비국가성’이 강조되어 문화 당사자들 간의 교류협력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국가의 독점이나 개입이 거부되었다. 서독의 경우 민간교류 협력은 연방차원의 지원없이 관련 민간단체․기구들의 자체 재정부담으로 이루어졌다.

한반도 평화구축 위해 민간이 나서야

평화통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통일정책이 정부의 과제라면, 평화통일 운동은 민간부문의 몫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의 냉전적 안보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21세기의 안보개념은 다차원화, 포괄화되어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즉 포괄적 안보개념 또는 협력적 안보개념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여전히 군사위주의 전통적 안보개념이 지배적이다.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군사중심적 사고에서 해방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력 우위를 안보의 전제로 인식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 주민간 상호의존성을 높여 점차 적대의식을 극복해 나감으로써 상호 안보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다. 항상 우리의 안보가 취약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반북 수구집단이 대북 위기설을 계속 강조한다면 ‘늑대소년’의 패러독스처럼, 안보냉소주의나 안보불감증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제 남북한의 군비와 군사력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토대로 군축의 중요성과 불가피성을 설득시켜야 한다. 군축이야말로 남북한 모두의 안보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길이다. 이처럼 합리적 안보인식을 위한 노력은 정부의 몫이라고만 할 수 없기에 민간부분의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평화(보장)체제의 구축은 이러한 안보관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면, 남북한간 공통의 안보를 위해서는 민간부문의 다양한 활동이 기대된다.

지난 20세기 중반이래 한민족의 운명에 대한 미국의 규정력은 결정적이었고, 21세기 현단계에서도 미국의 존재와 대한반도 정책은 남북한 7,000만의 존재양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반미는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주민의 미래 삶의 문제는 우리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선택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금기영역인 ‘자주’와 ‘미국문제’의 돌파구는 시민사회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나설 수 없는 부분을 민간이 떠맡고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냉전문화 타파, 반북 수구세력의 반민족성․반민주성 폭로, 개발논리 중심의 대북진출의 문제, 21세기 민족사회의 전망과 비전제시 등은 민간부문에서 충분히 검토되고 실천되어야 할 과제이다. 분단현실에 발을 딛고 민족사회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전망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조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2000/06/01 00:00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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