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남의 기득권세력으로는 통일 어렵다
남한 대사관에서의 첫 느낌

탈북하여 세 개 나라의 감옥을 거치는 등 온갖 간난 신고 끝에 찾아간 남한 대사관에서의 첫 느낌은 ‘아, 이래서 통일이 안되는구나’였다. 물론 북한은 두말할 것 없지만 남한 역시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통일과 직결된 문제이다. 남한 대사관에 난생 처음 찾아간 나는 선교사 한 분과 동행하였다. 일행 중 북한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공관원은 마음놓고 말하였다. “아, 이거 북한 놈들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요”. 방금 전 먼저 와 있던 북한 벌목공 두 명을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겠어”하며 떠밀어내고 들어온 공관원이었다. 희망과 생명의 등대로 믿고 찾아간 남한당국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다 못해 앓아 눕기까지 하였다. 풍찬노숙하며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였으며 그 중 두 가지 문제만 언급하려 한다.

그 첫째는 남한당국의 입장에 관해서이며 둘째는 남한 공관원들의 태도이다. 당시는 92년으로서 탈북자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을 때였다. 단지 남북 화해분위기라는 명목 하에 탈북자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치타협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될 인권문제를 희생물로 삼는 남한당국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둘째로 남한 공관원들의 탈북자에 대한 천시와 멸시의 태도가 역력한 것이다.

그 다음해 문민정부가 들면 좀 나을까 하였는데 한 수 더 뜨는 것 같았다. 북한을 위해 한 생을 바치겠다는 장기수를 보내면서 그 반대인 탈북자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받을 수 없다고 대통령 자신이 말하기도 하였다. 병 들고 늙은 장기수를 인도주의 차원에서 보낸 것이 진실이라면 탈북자도 받아야 할 것이다. 다행히 언론과 사회의 지탄을 받고 탈북자 전원 수용방침으로 돌아섰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김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제기되자 언제 그랬냐 싶게 방치해 버렸다. 북이나 남이나 정치권력자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후 방랑하는 탈북자들과 함께 망명조직을 묶어 유엔 난민기구(UNHCR)와 국제적십자에 난민임을 첫 등록하였다. 한편 국내외 언론과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탈북자 문제를 호소하였다. 이때 놀라운 것은 남한 대사관의 자세였다. 유엔 난민기구 통역을 맡았던 기자에게 공공연히 말하기를 “왜 탈북자 문제를 유엔에까지 끌고 가며 또 언론에서 소란이냐”라고 하였다. 이 말에 기자는 한국정부가 이 정도인 줄 몰랐다고 놀랐다. 몇 달 후에는 탈북자 문제 해결에는 유엔 난민인정 방법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만큼 원칙적인 탈북자정책, 대북정책이 없고 또 있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정치 수준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우리가 그나마 서울에 오게 된 것은 국민여론과 언론, 사회단체들의 활동에 못 이긴 정부의 수용에 의해서였다.

남한 땅에 들어서서 느낀 점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오기 힘든 남한 땅에 들어선 탈북자들은 큰 성취감과 함께 난생 처음 ‘남조선’을 보며 표현할 수 없을 감상에 잠긴다. 수많은 차량과 인파로 붐 비는 거리, 눈 아플 정도로 들어선 고층건물과 광고들을 보며 활기 넘치는 조국의 한쪽 땅을 가슴 뿌듯하게 느낀다. 나 자신도 ‘조국 한쪽 땅만이라도 참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긍지를 가졌다. 통일을 위해서 뭔가 이바지하겠다는 속마음을 다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러한 환희감이 달아올랐을 때 당도한 정보사 지하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찬물을 끼얹는 듯한 분위기에 직면한다. “야 이 새끼 야”, “남산 지하실이란 말은 들어봤어”, “판문점에 도루 보낼 거야”, “가족을 버리고 온 인간 쓰레기”, “한국에 벽돌 한 장 쌓은 것 있어” 등 가장 두렵고 가슴 아픈 말로 언어폭행과 고문행위까지 당한다. 환희가 높았던 것만큼 실망도 크다. 과연 이들과는 함께 살 사람들이 아니라는 회의에 빠지다 못해 격노감마저 일어난다. 흔히 귀순자들은 환대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가 겉으로 보이는 환대 이후에는 가혹행위를 당한다고 하면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 정도가 아니라 귀순자 대부분이 당했다면 말이다.

북한 간첩이 아닐까?!

한 나이 많은 귀순자는 피멍이 들도록 맞으면서 “바로 이놈(때리는 자)이 다름 아닌 북한 간첩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먼 노정을 거쳐 방금 입국하였음에도 잠시의 쉼도 없이 취조하고 야비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과연 이들이 한 동포로서 통일을 바라는 자들인지 의문이 컸다. 이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면 통일과 안보를 위해서 그런다고 누구보다 소리 높다. 그러나 얼마 후 그 가혹행위 주도자는 ‘총풍 사건’의 공모자로 좌천당한 것으로 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기득권 유지라면 적과도 손잡는 사람들이 아직도 관에 남아 한마디 반성은커녕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뻗대는 요지경이다. 이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귀순위장 간첩색출이라는 명분은 과연 맞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출신 귀순자 위장간첩을 한 건도 제시 못하고 있다.

귀순자들이 가혹행위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을 분석해 보면, 첫째로, 탈북자를 인권 사각지대 안에서 그것도 범죄자 취급하는 데 있다. 둘째로, 북한 사람을 깔보는 경향이 농후한 데 있다. 셋째로, 지난 독재정권, 좀더 멀게는 일제시대의 나쁜 관행과 습성의 연장이다.

권력유지라면 친일역적도 기용, 불법 쿠데타를 해서라도 승자면 된다는 나쁜 전통의 산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느낀다.

귀순자 인권유린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되었다. 그것은 바른 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관리보호체계 안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에 나서는 것은 물론 글을 기고하는 것도 간섭하였다. 본인 역시 신문에 기고한 건을 가지고 안기부 본 청사에 세 번씩이나 불려가 고초를 당하였다. 귀순자 사회정착 정책도 엉망이었다. 귀순자 관할기관은 안기부, 대성공사, 경찰청, 보건복지부, 통일원 등으로 많으나 누구 하나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농업전문가를 수원 농촌진흥청 쪽으로 배치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벌목공으로 배치하고, 초보적인 정착기준도 없었다. 수십년 동안 통일원이 존재했는데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의문만 생긴다. 이런 환경 속에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기득권에 대한 엄중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간혹 희생적으로 나선 이들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고립속에 말할 수 없는 압제(연행은 물론 실종까지 당함)를 받아 각개 격파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박차고 1년 전에 조직적으로 나선 것이 ‘자유를 찾아온 북한인 협회’이다. 최초의 귀순자 자율조직과 인권단체들과 언론의 연대로 말미암아 귀순자의 인권과 정착문제가 파격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국민과 언론은 깨어 있어야

국민의 정부에 이르렀어도 수십만의 탈북자가 해외에서 버림받고 있다. 햇볕과 정상회담 집착으로 멀어지는 것은 탈북자와 북 인권문제다. 수십만을 굶겨 죽이며 권력유지밖에 모르는 현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에로 어쩔 수 없이 나오게 하는 열쇠는 탈북자와 북 인권문제 해결에 있다. 이런 원칙하에서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을 해야 그 자체도 성공을 거둘 것이다. 동독정권을 통일로 이끌어낸 서독정부의 대 동독 의지가 바로 그러했다.

탈북자와 북한인권문제를 멀리하는 그 어떤 “햇볕”과 정상회담도 정치가들만을 위한 잔치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을 견제하고 정도로 가게 하는 힘은 오직 국민과 여론밖에 없다. 민주사회의 우월성은 바로 이것이므로 국민과 언론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또 북한 통치자에게 철저히 빼앗긴 민주를 되찾을 때까지 북 주민을 도와 더욱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새천년 5월 17일 서울.
이민복 전 북한과학원 연구원, 자유를 찾아온 북한인협회 대변인
2000/06/01 00:00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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