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독하고 가슴 아팠던 3박4일 남포항 방문기
2000/2000년 06월 :
2000/06/01 00:00
“심장도 좋고 건강합네다.”
지난 5월 1일 오후 6시 대북 지원물품을 실은 ‘안민(安民)호’가 여수항을 출발해 42시간 만에 도착한 북녘땅 서해갑문. 얼떨결에 배에 승선한 한 검역관으로부터 진맥을 받고 그의 억양을 듣자 비로소 방북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검역은 선박의 위생상태와 선원과 승객의 건강을 점검하는 것인데, 건강검진은 맥박을 짚어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모든 검역 절차를 끝내고 도선사의 인도로 2시간 30분 가량에 걸쳐 서해갑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족과 날씨, 연애담, 앞으로 있을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소견 등을 나누었다.
그중 한 젊은 의사의 연애담은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의 아내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대학 다닐 때 서로 알았고 병원에서 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 중간 역할을 간호사들이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예를 들면 연애편지 배달이라든지, 서로의 근황을 전달하는 역할 등등).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뭇 간호사 언니들이 샘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의사와 간호사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마치 사귀는 것이 어렵다는 듯한 대답을 했다. 알 수 없는 계급차이(?)가 직업 속에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대부분 연애를 통해 이뤄지며 연애방법은 매우 고전적이었다. 특히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그들의 연애담을 듣고 있자니 우리는 너무 즉흥적이고, 가슴 설레는 낭만이 부족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의 연애방식(특히 인터넷을 이용한 채팅이나 핸드폰, 전자우편 따위)에 대해 말해 주었더니 매우 흥미롭게 경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는 않는 듯했다.
북한 사람들의 고전적 연애담
남포가 북한의 제2의 대도시라는 명칭에 비해 인구이동은 별로 없는 듯했다. 배에서 15명 남짓 북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한 명 빼고 다들 고향이 남포이고 이곳에서 성장해서 가정을 꾸린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모두들 하나같이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언급만 나오면 그 다음에 꼭 따라오는 말은 역시 ‘미군철수’에 관한 것이었다.
여수항으로부터 거의 44시간에 걸친 항해 끝에 대동강 하류에 닿았다. 쾌청한 날씨와 평온한 물결. 뱃길 여행은 아주 흡족했고 뱃전으로 스쳐 지나가는 경치는 단조롭기는 했지만 아주 매력적이었다. 잔잔한 대동강은 마치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데(넓이가 10km나 된다. 한강의 3배 이상) 강변으로는 횡한 낮은 산뿐이고 먼곳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한강변에서 보았던 높은 제방은 볼 수 없었다.
오후 4시쯤 남포에 도착해서 1시간쯤 기다리니까 한형제 박사(북한농업연구소)와 관계자 2명이 마중나와 필자와 윤성진 국장(여의도순복음교회 선한사람들)을 데리고 외국선원 호텔로 데리고 갔다. 그곳이 우리가 하룻밤 머물 곳이라고 했다.
초청받은 7시 저녁만찬까지는 50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방에 앉아 있기도 답답하여 윤 국장과 함께 호텔 밖을 산책하기 위해 나갔다. 그러나 정문에서 세 발짝을 떼기가 무섭게(?) 민경련의 김철훈 씨가 쫓아와서 우리에게 잠시 얘기 좀 하자며 다시 호텔 안으로 인도했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것도 경계하는 눈치다.
하는 수 없이 호텔내의 매점 상품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상품을 구경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호의적이었다. 옆에서 부모님 선물 사라, 애인 선물 사라며 구매욕을 돋우었다. 그러나 정작 물건들을 보았을 땐 마음이 메어져 왔다. 이건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안 사온 것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그럴싸한 상품이랄 게 없었다. 고작해야 술과 도자기, 약, 옷감, 옷들 따위인데 그 디자인과 색상이라는 것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저녁 7시에 선장, 선원들과 함께 만찬에 초대되어 식당으로 갔다. 식사 전에 한형제 박사는 환영사를 하였다. 그는 외국과 여러 차례 연구 협력사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번만큼 효과적으로 성공을 거둬본 적이 없다며 꼭 슈퍼 옥수수 개발에 성공해서 이 연구사업을 돕는 동포들의 뜻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식사는 제법 많이 차려져 있었다. 그 유명한 꽃게와 새우튀김, 회, 닭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다. 그리고 맛도 좋았다.
하지만 전기사정 때문에 명색이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식사도중 전기가 3번이나 나갔다. 식당 불빛이라고는 50촉 전구처럼 희미했는데 그것마저도 간혹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정전에 대해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 황당한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처소를 향해 식당에서 나왔는데 복도는 아예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선장님의 라이터불을 쫓아 몇걸음 걷긴 했지만 이 호텔에서 잠을 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낯선 곳인데다가 불도 없으니 아무리 심장이 강하다 해도(낮에 북한 의사의 판명임) 겁이 조금 났다. 마침 윤 국장이 먼저 운을 떼어서 우린 배로 돌아와 자기로 했다.
부지런한 남포의 아침
5월 4일 아침식사를 하고 뱃머리로 올라와서 300∼400m 전방의 남포시내를 바라다보았다. 아침 7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차는 3분 정도 간격으로 생각보다 자주 왔다갔다했고 간혹 자가용들도 보였다. 예상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자전거 앞바구니에 도시락처럼 보이는 꾸러미도 눈에 띄곤 했다. 물론 걸어다니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안민호 바로 앞 대동강변에서는 사무실 청소를 하기 위해서인지 대걸레를 빨고 양동이에 물 길러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 담당자에게 근무시간을 물으니 대부분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한다고 했다.
출근하는 여자들의 옷차림이 화려하거나 확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단정하고 얼굴에 약간의 화장 하는 부지런함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선원 호텔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아가씨(?)도 예쁘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오가는 남포시민들의 행색 중 공통되는 것은 일단 의상의 색상이 우중충한 감색과 회색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신발은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 신는 실내화처럼 고무밑창이 얇아 쿠션이라곤 전혀 없는 감색 운동화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9시쯤에 인수증을 받고 비료 앞에서 한형제 박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를 전혀 쳐다보지 않던 남포시민들이 저만치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포에 와서 처음 느껴지는 그들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배에 머물며 왔다갔다 움직이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그 순간 저만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히 내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번처럼 가장 고독하고 가장 가슴 아팠던 여행은 없었다. 서로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언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기간동안 나는 너무나도 다른 생각을, 매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떠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의 만남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법.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지금 마음속에 간절히 떠올린 것은, 내가 이곳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한 남포시민들을 다음에는 만나서 삶을 이야기하고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과 그날을 위해 해야 할, 어쩌면 너무나 많을지도 모를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야겠다는 인생의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5월 1일 오후 6시 대북 지원물품을 실은 ‘안민(安民)호’가 여수항을 출발해 42시간 만에 도착한 북녘땅 서해갑문. 얼떨결에 배에 승선한 한 검역관으로부터 진맥을 받고 그의 억양을 듣자 비로소 방북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검역은 선박의 위생상태와 선원과 승객의 건강을 점검하는 것인데, 건강검진은 맥박을 짚어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모든 검역 절차를 끝내고 도선사의 인도로 2시간 30분 가량에 걸쳐 서해갑문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족과 날씨, 연애담, 앞으로 있을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소견 등을 나누었다.
그중 한 젊은 의사의 연애담은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의 아내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대학 다닐 때 서로 알았고 병원에서 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 중간 역할을 간호사들이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예를 들면 연애편지 배달이라든지, 서로의 근황을 전달하는 역할 등등).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뭇 간호사 언니들이 샘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의사와 간호사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마치 사귀는 것이 어렵다는 듯한 대답을 했다. 알 수 없는 계급차이(?)가 직업 속에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대부분 연애를 통해 이뤄지며 연애방법은 매우 고전적이었다. 특히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그들의 연애담을 듣고 있자니 우리는 너무 즉흥적이고, 가슴 설레는 낭만이 부족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의 연애방식(특히 인터넷을 이용한 채팅이나 핸드폰, 전자우편 따위)에 대해 말해 주었더니 매우 흥미롭게 경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는 않는 듯했다.
북한 사람들의 고전적 연애담
남포가 북한의 제2의 대도시라는 명칭에 비해 인구이동은 별로 없는 듯했다. 배에서 15명 남짓 북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한 명 빼고 다들 고향이 남포이고 이곳에서 성장해서 가정을 꾸린 것을 보면 말이다.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모두들 하나같이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언급만 나오면 그 다음에 꼭 따라오는 말은 역시 ‘미군철수’에 관한 것이었다.
여수항으로부터 거의 44시간에 걸친 항해 끝에 대동강 하류에 닿았다. 쾌청한 날씨와 평온한 물결. 뱃길 여행은 아주 흡족했고 뱃전으로 스쳐 지나가는 경치는 단조롭기는 했지만 아주 매력적이었다. 잔잔한 대동강은 마치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데(넓이가 10km나 된다. 한강의 3배 이상) 강변으로는 횡한 낮은 산뿐이고 먼곳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한강변에서 보았던 높은 제방은 볼 수 없었다.
오후 4시쯤 남포에 도착해서 1시간쯤 기다리니까 한형제 박사(북한농업연구소)와 관계자 2명이 마중나와 필자와 윤성진 국장(여의도순복음교회 선한사람들)을 데리고 외국선원 호텔로 데리고 갔다. 그곳이 우리가 하룻밤 머물 곳이라고 했다.
초청받은 7시 저녁만찬까지는 50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방에 앉아 있기도 답답하여 윤 국장과 함께 호텔 밖을 산책하기 위해 나갔다. 그러나 정문에서 세 발짝을 떼기가 무섭게(?) 민경련의 김철훈 씨가 쫓아와서 우리에게 잠시 얘기 좀 하자며 다시 호텔 안으로 인도했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것도 경계하는 눈치다.
하는 수 없이 호텔내의 매점 상품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상품을 구경하는 것에 대해선 매우 호의적이었다. 옆에서 부모님 선물 사라, 애인 선물 사라며 구매욕을 돋우었다. 그러나 정작 물건들을 보았을 땐 마음이 메어져 왔다. 이건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안 사온 것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그럴싸한 상품이랄 게 없었다. 고작해야 술과 도자기, 약, 옷감, 옷들 따위인데 그 디자인과 색상이라는 것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저녁 7시에 선장, 선원들과 함께 만찬에 초대되어 식당으로 갔다. 식사 전에 한형제 박사는 환영사를 하였다. 그는 외국과 여러 차례 연구 협력사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번만큼 효과적으로 성공을 거둬본 적이 없다며 꼭 슈퍼 옥수수 개발에 성공해서 이 연구사업을 돕는 동포들의 뜻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식사는 제법 많이 차려져 있었다. 그 유명한 꽃게와 새우튀김, 회, 닭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다. 그리고 맛도 좋았다.
하지만 전기사정 때문에 명색이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식사도중 전기가 3번이나 나갔다. 식당 불빛이라고는 50촉 전구처럼 희미했는데 그것마저도 간혹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정전에 대해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 황당한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처소를 향해 식당에서 나왔는데 복도는 아예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선장님의 라이터불을 쫓아 몇걸음 걷긴 했지만 이 호텔에서 잠을 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낯선 곳인데다가 불도 없으니 아무리 심장이 강하다 해도(낮에 북한 의사의 판명임) 겁이 조금 났다. 마침 윤 국장이 먼저 운을 떼어서 우린 배로 돌아와 자기로 했다.
부지런한 남포의 아침
5월 4일 아침식사를 하고 뱃머리로 올라와서 300∼400m 전방의 남포시내를 바라다보았다. 아침 7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차는 3분 정도 간격으로 생각보다 자주 왔다갔다했고 간혹 자가용들도 보였다. 예상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자전거 앞바구니에 도시락처럼 보이는 꾸러미도 눈에 띄곤 했다. 물론 걸어다니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안민호 바로 앞 대동강변에서는 사무실 청소를 하기 위해서인지 대걸레를 빨고 양동이에 물 길러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한 담당자에게 근무시간을 물으니 대부분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한다고 했다.
출근하는 여자들의 옷차림이 화려하거나 확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단정하고 얼굴에 약간의 화장 하는 부지런함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는 외국선원 호텔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아가씨(?)도 예쁘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오가는 남포시민들의 행색 중 공통되는 것은 일단 의상의 색상이 우중충한 감색과 회색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신발은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 신는 실내화처럼 고무밑창이 얇아 쿠션이라곤 전혀 없는 감색 운동화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9시쯤에 인수증을 받고 비료 앞에서 한형제 박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를 전혀 쳐다보지 않던 남포시민들이 저만치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남포에 와서 처음 느껴지는 그들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배에 머물며 왔다갔다 움직이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그 순간 저만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히 내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번처럼 가장 고독하고 가장 가슴 아팠던 여행은 없었다. 서로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언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기간동안 나는 너무나도 다른 생각을, 매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떠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의 만남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법.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런지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지금 마음속에 간절히 떠올린 것은, 내가 이곳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한 남포시민들을 다음에는 만나서 삶을 이야기하고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과 그날을 위해 해야 할, 어쩌면 너무나 많을지도 모를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야겠다는 인생의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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