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시민과 시민사회
2000/2000년 06월 :
2000/06/01 00:00
맑스의 대자적 계급 개념을 빌려와서 새로운 개념 또는 용어를 만들어 보겠다. 대자적 시민(Citizen-for-itself)이 그것이다. 대자적 시민은 즉자적 시민(Citizen-in-itself)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이른바 의식화된 시민을 가리킨다. 즉자적 시민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도 그리고 로마제국에서도 존재해 왔다. 투표권의 소지 여부로 분류된 범주이건 또는 귀족이나 농민과 대별되는 도시민을 가리키는 범주이건 간에 사회적 범주로 존재하는 것이 즉자적 시민이다. 말하자면 즉자적 시민은 사회적 범주일 뿐이다. 반면에 대자적 시민은 살아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이다.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그런 일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시민이 대자적 시민이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아직 석연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예컨대 국가(정치사회)와 시장(경제사회)의 삼각 구도에서 시민사회를 한쪽 꼭지점에 위치시켜 두고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얼마나 자율성을 갖고 있는가, 즉 국가와 시장의 통제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논쟁해 왔다. 그런 와중에서 정작 경험적으로 시민사회의 존재 또는 형성을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민사회는 특히 국가와 대비되는 하나의 범주로서 주어진 것으로, 그냥 존재해 온 것으로 상정해 왔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단순히 범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 말하자면 실체로서의 시민사회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그러면 시민사회의 존재와 형성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현실사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행동하는 시민, 곧 대자적 시민의 존재로서 확인할 수 있다. 행동하는 대자적 시민 없이 시민운동은 일어날 수 없다.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대자적 시민들의 행동이 없다면, 곧 시민운동이 없다면 시민사회의 존재도 확인할 수 없다. 시민운동 없는 시민사회는 이론적으로 추상적으로 또는 범주로 존재할 뿐이다.
흔히들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과 시민사회는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도시에서 자치권을 획득한 부르주아들에 기원한다고 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견에는 시민과 시민사회의 등장을 너무도 단순화시켜 버렸다. 절대 왕권으로 대변되었던 국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계몽된 시민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자각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를 간과했다. 도시의 상공인과 노동자들이 왕권과 교권의 간섭과 억압을 벗어나 직업 선택과 종사를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고도 오랜 장정을 걸어왔는지 잊기 일쑤였다.
영국에서 시민과 시민사회의 등장에서 차티스트들의 운동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19세기 중반에 노동자와 일반 서민들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의 제정을 요구하며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와 비밀투표제 등의 6개 조항을 내걸고 국민헌장 운동을 전개했다. 청원서에 무려 600만 명이나 서명을 했으며, 그것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50만 명이 런던에 모여들었다.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바로 이 행동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자기 표현과 참여에 의해 발전했다. 미국에서도 워싱턴 대행진과 같은 시민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시민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만민공동회에서 행동하는 시민의 맹아가 나타났었다. 100여 년이 지나서는 총선시민연대에서 대자적 시민들이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이제야 우리는 곳곳에서 대자적 시민들을 만나고 또 역동하는 시민사회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아직 석연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예컨대 국가(정치사회)와 시장(경제사회)의 삼각 구도에서 시민사회를 한쪽 꼭지점에 위치시켜 두고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얼마나 자율성을 갖고 있는가, 즉 국가와 시장의 통제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논쟁해 왔다. 그런 와중에서 정작 경험적으로 시민사회의 존재 또는 형성을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민사회는 특히 국가와 대비되는 하나의 범주로서 주어진 것으로, 그냥 존재해 온 것으로 상정해 왔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단순히 범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 말하자면 실체로서의 시민사회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그러면 시민사회의 존재와 형성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현실사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행동하는 시민, 곧 대자적 시민의 존재로서 확인할 수 있다. 행동하는 대자적 시민 없이 시민운동은 일어날 수 없다.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대자적 시민들의 행동이 없다면, 곧 시민운동이 없다면 시민사회의 존재도 확인할 수 없다. 시민운동 없는 시민사회는 이론적으로 추상적으로 또는 범주로 존재할 뿐이다.
흔히들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과 시민사회는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도시에서 자치권을 획득한 부르주아들에 기원한다고 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견에는 시민과 시민사회의 등장을 너무도 단순화시켜 버렸다. 절대 왕권으로 대변되었던 국가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계몽된 시민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자각하고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를 간과했다. 도시의 상공인과 노동자들이 왕권과 교권의 간섭과 억압을 벗어나 직업 선택과 종사를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고도 오랜 장정을 걸어왔는지 잊기 일쑤였다.
영국에서 시민과 시민사회의 등장에서 차티스트들의 운동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19세기 중반에 노동자와 일반 서민들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의 제정을 요구하며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와 비밀투표제 등의 6개 조항을 내걸고 국민헌장 운동을 전개했다. 청원서에 무려 600만 명이나 서명을 했으며, 그것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50만 명이 런던에 모여들었다.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는 바로 이 행동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자기 표현과 참여에 의해 발전했다. 미국에서도 워싱턴 대행진과 같은 시민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시민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만민공동회에서 행동하는 시민의 맹아가 나타났었다. 100여 년이 지나서는 총선시민연대에서 대자적 시민들이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이제야 우리는 곳곳에서 대자적 시민들을 만나고 또 역동하는 시민사회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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