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농민회

2000/2000년 06월 : 2000/06/01 00:00
농민, 약사, 의사가 함께 일구는 아름다운 공동체
“이 배가 똥금 되아부리먼… 올해도 헛농사제.”

중년의 농부 정창규·김성자 부부의 입가엔 시름이 번진다. 도토리만한 알갱이가 수도 없이 열려야 배솎음질을 할 텐데, 서리와 가뭄으로 솎아낼 열매가 수정되지 않았다. 보리농사도 마찬가지. 날씨변동이 심해 여물이 하나도 안 열렸다. 이렇게 농협 빚 얻어 뼈빠지게 농사지어 봤자 남는 것이라곤 빚더미와 병치레뿐. 정부의 농업정책이 농민의 노고를 인정해 농산물 가격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농업재해 보상법이 있어 갑작스런 냉해·한해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니다. 민족의 젖줄인 농업을 지키자고 아무리 외쳐봤자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소외계층인 농민. 그나마 그들에겐 농민회가 있어 ‘떠나고픈 농촌을 그래도 남아야 할 농촌’으로 만들고 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5시간 거리에 위치한 전라남도 나주. 『세종실록 지리지』 제4권(1403년)에 명기된 대로 토공물 배가 유명한 곳. 그곳엔 11만 나주시민이 살고 있다. 전국적으로 농민운동이 약화되는 현실에도 그에 관한 한 별 변동사항이 없는 나주는 전국에서 농민운동 잘되기로 이름난 지역이다. 지난 5월 9일에도 나주농민회(회장 김선중)는 광주 전남도청 앞에 방울토마토와 보릿단을 쏟아놓고 한해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기도 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사월초파일의 전날, 낮 2시쯤 도착할 거라 호언장담한 기자는 시간을 잘못 맞춰 늦은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각에야 나주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따, 사람 참. 6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어딨소? 비 맞고 고추 심고 왔드마는….”

나승범 나주농민회 사무국장은 농민회 사무실에 앉아 서울에서 올 한 사람을 위해 불을 밝히고 있었던 거다.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며 들른 효성식당. 그곳은 서울에서 취재나온 손님과 나주 농민약국 10주년 기념행사 뒤풀이를 위해 마련된 자리. 농민약국, 농민치과, 여성농민회 간부들이 함께 자리했다. 삼겹살에 소주. 흥겨운 술자리에 잠깐 짬을 내어 여성농민회 사람들과 농사청년회 조직부장을 만났다. 유기자(46세) 여성농민회장은 농사일에 가사노동까지 겹쳐 이중고에 시달리는 여성농민의 현실을 성토했다.

“농촌이 기계화되면서 남자들 일은 축소됐지마는 우리 여성들 일은 더 많아졌어요. 밭일(콩밭 메고, 고추 심고)하제, 새참 챙겨야제, 또 점심 해야제, 아주 죽겄어, 죽어. 그란디 말이요, 일은 많아졌지만 남자들에 비해 지위와 대가는 여전히 올라서지 못하고 있어라우.”

이런 문제들 때문에 여성농민회는 여성농민을 위한 독자사업들을 벌이고 있다. 정부시책 중 출산여성 농민에 대한 ‘농가도움이’ 보조 등을 적극 활용하고, 농가부채 탕감, 농업재해보상법 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논농사, 밭농사로 돈이 안되니까 특용작물을 많이 해요. 그런데 그 비닐하우스에서 나오는 폐비닐, 은박봉지, 농약 빈 병 등이 심각한 환경파괴를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우리 여성농민들이 환경운동에도 앞장섭니다. 시 환경과, 도 환경보존과에 수거해 가라고 항의하고, 안되면 환경부까지 쫓아갈 생각이에요.” 여성농민회 임연화(36세) 사무국장의 말이다.

여유로움과 낭만이 있는 농촌풍경은 이미 옛그림이 된 듯하다. 어느덧 도시처럼 농촌도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 이뿐 아니라 농촌총각 문제는 여전히 농촌사회의 주요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곽현일(36세) 농사청년회 조직부장의 말이다.

“촌에 정착하고 살려면 결혼을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 땅의 흙과 더불어 살려는 여자들이 별로 없는가 봐요. 농촌으로 시집 와봐야 논일, 밭일 해야제, 시부모님도 모셔야제, 그러니까 농촌에 서른다섯 넘어도 장가 못 가는 청년들이 많아요. 그래서 농촌총각 결혼대책 위원회 꾸리려고 하거든요. 이 잡지도 농촌으로 시집 오겠다는 사람 있으먼 소개 쫌 해주쑈?”

대를 이어 농촌을 지키려 해도 결혼을 못해 도시로 나가는 농촌청년들이 많다는 것. 이 속에서 농사청년회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농민 잘살기 운동을 펼쳐봐야 소용없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축산·과수 등의 농사정보 교환, 하우스 특용작물 재배를 위한 토양교육, 농기계를 이용한 자연농법 등을 회원대상으로 교육한다고.

나주지역에는 10년간 묵묵히 농민약국을 지켜온 젊은 여성약사들이 있다. 1989년부터 나주지역에 주말진료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건강을 보살폈던 ‘학생’들이 1990년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을 결의하고, 농촌에 들어와 산다. 개국 당시에는 안기부의 농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전남지역에 5개 농민약국 지부, 17명의 ‘농민약사’를 탄생시켰다. 대표약사 이연임 씨의 말이다.

“농민에 의한 농민의 약국을 만들기 위해 쉼없이 달려온 나날들이었습니다. 농약중독, 스테로이드 추방, 비닐하우스증후군, 농부증 등에 대한 조사와 순회진료를 하면서 농민건강 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았구요. 지금은 농민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부항·침·뜸’ 놓는 법과 집에서 할 수 있는 건강 운동’을 교육하고 있어요. 사실 저희는 약사지만 농민운동에 복무하는 거예요. 그래서 약국에서 약을 파는 것보다 농민 건강 운동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농민약국의 올해 중점사업은 ‘후배사업’. 앗! 약국이 사람 사업도 하나?

“옛날에는 주로 학생회 인맥을 통해 후배들이 농민운동을 결의하고 왔어요. 허나 지금은 학생운동이 잘 안되는 관계로 지속적으로 농민운동 하겠다는 약사후배들이 없어요. 그래서 올해는 조직적으로 조선대와 전남대 약대에 농민약국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안정적인 재생산 구조를 위해. 저희들의 목표는 전국에 ‘농민약국’을 만드는 거예요.”

영산포 본부에는 7명의 약사들이 한집에 산다. 일명 금남의 집. 그들은 주 1회 생활총화를 통해 고민을 공유하고, 약국운영과 농민운동에 대해 토론한다. 약국과 함께 농민의 건강을 보살피는 농민치과가 있다. 농민치과 역시 농민약국과 함께 순회진료를 돌며 농민건강 지키기에 이바지하고 있다. 실제 치과와 약국은 매월 농민회의 사업비(100만 원)를 후원하고 있으며, 사실상 농민회 회원 조직화 사업에 약국과 치과가 많은 역할을 하는 게 현실이라고 나승범 국장은 첨언했다.

나주농민회는 약국과 치과를 중심으로 한 농민 건강운동을 벌이면서 또 다른 축으로는 농민경제를 위한 경제사업단 일도 한다. 그 출발이 농민주유소. 나주농민 100여 명이 2억 4,000만 원을 출자해 주유소를 냈다 하여 세간이 떠들썩했었다. 과연 잘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역시 그들은 나주지역 주유소들이 농민주유소 때문에 가격을 내리고, 서비스를 좋게 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주유소문화 바꾸기’까지 이뤘다. 유행근(41세) 대표이사의 말이다.

“농민회는 거짓말 안한다. 그게 주유소를 성공하게 만든 비결이에요. 면세유 쓰지만, 그것도 중간폭을 없애 더 농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했더니 멀리서도 기름 사러와요. 박리다매랄까. 어쨌든 우리 때문에 다른 주유소들이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려 주민들도 좋아합디다.”

6개월간의 실험 속에서 희망의 싹을 보았고, 앞으로는 보다 친농민적인 경제사업을 개발, 농민운동과 농업·사회발전의 교량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가끔 사람들은 농민회의 투쟁성이 약화됐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생활 속으로 뿌리깊게 들어가 다각적으로 농민들과 호흡하고 있었다. 철저히 아래로 내려가 농민의 고통과 손잡는다. 그래서인지 나주엔 심정적 나주농민회원이 많단다. 이연임 약사의 말이다.

“순회진료 하면 전부 농민회원이래요. 면단위, 읍단위에 한 명만 회원이 있어도 그 지역은 모두 농민회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일까? 나주는 농민회를 중심으로 심리적 공동체가 형성됐다고 느껴져요. 저희 10주년 기념행사 때도 농번기라 아무도 안 오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는데 600명이 넘게 오셨어요. 그 바쁜 농민들이 모두 일손을 놓고. 이렇게 친형제처럼 보듬고 사니까 정말 농민 곁을 떠날 수가 없네요.”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2000/06/01 00:00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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