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평생 하루하루를 새날처럼
2001/2001년 09월 :
2001/09/01 00:00
한반도 평화지킴이 어머니회 이끈 손덕수 효성 가톨릭대 교수
8월 15일 오후, 을지로 5가 훈련원공원에 50여 명의 엄마들과, 따라나선 아이들로 보이는 청소년들, 대학생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 중에 아줌마 한 명이 하얀 빛깔의 개량한복을 입고, 흰머리를 둘러싼 까만 망으로 만든 모자에다 손에는 적삼을 두르고 분주히 걸어다닌다. 외모만으로는 영 평범한 아줌마 같지 않은, 그렇다고 세련된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 여성은 광복 56주년 기념일을 맞아 ‘한반도 평화 지킴이 어머니회’를 태동시킨 손덕수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이다.
이날 진행된 어머니 평화문화 행사는 ‘한반도 평화와 생명사랑’을 위해 그와 알고 지내던 엄마들이 공동으로 만든 ‘순간’ 작품이다. 행사 진행을 보면 세련되게 준비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목을 적시라고 여기저기 놓은 생수통과 평화상징의 로고를 그린 부채와 구경 온 사람들이 손에 걸 수 있는 적삼이 전부이다. 피켓도 없고 무대도 없다. 외부에서 초청한 사회자도 없다. 이게 무슨 평화행사인가? 어머니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여의도 고수부지에서는 한창 ‘통일’의 구호로 가득찬 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말이다.
“통일을 이야기하는 집회가 여기저기 있지만 엄마들이 참여하기는 쉽지 않아요. 평화운동의 공간은 엄마들의 살림터전인 동네이고 아파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봤습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시작하는 평화운동 선포식이지요. 지금까지 ‘평화’의 상징인 어머니들은 역사의 희생자이면서도 자신이 희생자임을 모른 채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위기를 느껴 답답한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의 어머니들은 눈물과 한숨으로 아들을 전쟁터로 딸들을 정신대로 보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생명을 파괴하며 대량으로 생산되는 인스턴트 음식과 오염된 자연 속에서 나온 식품들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엄마들이 모여 끽 소리라도 한번 하자는 생각에 준비했습니다.”
화운동가 엘런 디더리히와의 만남
올 2월 그는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은 그가 남편 이삼열(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원장)과 유학 갔다가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며 살았던 곳이다. 그리고 지난 2월, 그 곳에서 그는 약 40여 년을 평화운동에 몸담아 온 여성 평화운동가 엘런 디더리히(55세)를 만났다. 엘런은 15살이 되던 때, 당시 사민당 당원인 엄마와 전쟁고아를 모아 집에서 돌보던 아빠의 손을 잡고 거리집회에 따라나섰다고 한다. 거기에서 반전평화 연설을 하고 있는 러셀(당시 그는 할아버지였다)의 영향을 받아 ‘나도 저 할아버지처럼 살아야지’라고 마음을 먹은 다부진 소녀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화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여성이다. 오랜만에 독일을 방문했더니 엘런은 그에게 구라파 어머니들이 조직해온 평화운동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전쟁을 위해 나가면 어머니는 평화를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전쟁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다’를 외치며 조직한 캠페인. 내전으로 민중이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엄마들이 봉고차에 몸을 싣고 유럽 전역을 달려간 이야기.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들이 쿠키와 평화의 빵을 만든 장면. 엘런은 “그런데 아직도 전쟁위기가 감돌고 있는 한반도에서 당신은 어머니로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손덕수 교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분단의 선을 둔 나라의 어머니로서 충격이었다. 60평생을 살아오면서 여성학과 사회복지를 위해 강단에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사회에 요구했지만 생명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로서 평화의 씨받이가 되지 못한 삶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독일에서 엘런과의 만남은 자식을 2차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보내고 가슴을 쓰다듬으며 고통을 감수한 어머니들이 전개한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나아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는 데 어머니로서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전화와 모임을 통해 그 생각을 알리자 어머니들 자신이 ‘평화’의 상징이자 운동의 모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출전식’이 아닌 ‘출평식’을 위해 모인 엄마들
각자 주머니를 털고 시간을 쪼개고 성명서도 직접 만들어 서명도 받고 플래카드도 주문하고, 동창들과 계모임을 하던 아줌마들에게 행사를 알리며 한 달을 바쁘게 지내던 10여 명의 어머니들은 평화문화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세실 레스토랑에서 조촐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곳에는 취지에 공감하는 엄마들과 아이들이 함께 접어 모아준 평화의 상징인 종이비둘기가 놓여 있었다. 또 전세계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의 비극을 알리는 사진들이 엄마들의 손에 의해 전시되어 있었다.
사무실 간판도 없고 상근하는 활동가 한 명 없이 엄마들은 기자회견의 실무자가 되었다.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준비하는 세련된 기자회견 모습을 대신해 ‘평화의 마음’으로 참여의 취지를 알리는 첫 선을 보였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는 하숙집 주인아줌마, 주부, 전직기자. 한의사, 교수, 화가였던 참가자들은 지금부터 딸과 아들을 낳고 살아온 어미로서 꺼지지 않는 평화의 횃불이 되겠다고 그 의지를 밝혔다. 어찌 자녀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기자회견장에 함께 나선 아이들이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가난한 여성들과의 만남
올해 60세를 맞은 손덕수 교수는 사회복지와 여성운동계에서 잘 알려진 학자 중 한 명이지만 그의 돌출적인 외모와 의상, 발언을 보면 “저 사람 교수 맞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외모만큼이나 그는 사회가 규정한 형식과 내용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시대와 더불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그는 학자로서 체계적인 이론의 연구업적보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열정을 쏟아붓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했다.
84년 독일에서 귀국했던 당시 그는 한 달 만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제안으로 서울 월곡동 빈민지역을 찾았다. 너무나 지독한 가난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이게 지난 10년 동안 내가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나라의 모습이었던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독일에서 잘 살다가 들어와 보니 더 기가 찼다. 그 충격 속에서 그는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들 공부방을 월곡동 한 모퉁이에 세웠다. 여성으로서 또 다른 여성의 고통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그 곳을 다녀간 아이들은 7,000여 명이 넘는다. 지금 그 곳은 그가 가르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슬럼지역의 또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며 운영하고 있다.
강남 불가마를 즐기는 여자들
나이를 먹어 가며 그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몇 년 전부터 유행인 ‘불가마’를 몇 번 다녀왔다. 허리가 아프면 모여 엄마들끼리 이바구를 하는 3000원짜리 동네 사우나 규모를 벗어난 강남의 불가마에서 그는 중산층 여성의 현실을 보았다. 마치 로마의 밤을 즐기기 위해 모인 어머니들 같았다. 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인생을 향락 문화에 던지는 이들 여성의 현실을 개탄하며 비난만 할 수 없어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생각하였다. 이 땅 많은 어머니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했다. 방법은 맨투맨 작전이었다.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취지를 알리면서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불가마에도 평화 선전지를 들고 가 어머니들을 만날 생각이라고 했다. “깨달음의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 그것이 비극의 첫 출발입니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시간이 있으면 시간으로,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으로 운동에 참여해야만 시민사회 내 평화운동이 확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가겠다는 평화를 향한 그의 결단이 얼마나 지속성을 가질지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이제 시작의 횃불을 올린 마당에. 그러나 지금 그의 주변에는 ‘평화’와 ‘어머니’를 화두로 신나게 모이는 어머니들이 있다. 그래서 그가 사는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함께 살아온 이삼열 원장은 “도대체 한평생을 저렇게 정신 없이 살고도 무슨 열정이 또 있는지”라며 혀를 찬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헌신적인 운동가로서도 아니고 그저 생각한 것을 실천하면서 내가 즐겁기 위해 살아왔다. 이중적인 존재가 되기 싫었던 탓에 내 행동은 소수의 여성 중에서도 또 소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포장되어 세상에 보여지길 기대한 적도 없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유학시절 그는 우리보다 30, 40년 이상 발전한 독일사회에서 개성과 합리성을 갖고 자기계발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았다. 굳이 고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 제도권 밖에서 또 하나의 권위적 제도 안에 안주하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그러나 모성애로 포용하는 것. 이런 생각은 한평생 그녀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교수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마음껏 허용한 ‘자유’였다. 그런 그에게도 넘어야 할 큰 장애물 하나가 나이 육십을 앞두고 날아왔다.
아들에 대하여… 세 여자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손덕수 교수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 민영이 29세가 되던 해,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며 소개하였다. 고등학교 때 사귄 첫 여자친구였지만 성인이 되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여자는 이미 이혼을 하고 두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하필이면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이 바로 그 젊은 이혼녀였다. 세 여자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잠을 설친 날이 많았다. 직업도 없는 아들이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평생 자신이 주장해온 ‘처녀성’과 ‘이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깨부수어야 하는 도전카드를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받은 셈이었다. “손덕수, 너 한번 잘해 봐라. 여성학에서 진보이론을 주장하며 살아온 니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이제야 알 것이다.” 그가 아들의 결혼문제를 둘러싸고 고심하다 홀로 방에서 소리치며 자신에게 던진 말이었다. 제 아무리 앞선 이론과 주장으로 살아온 사람들도 문제의 당사자가 되면 꼬리를 내리는 경우가 많은 법. 그러나 그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며 다시 한번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만이 유일한 자식이고, 자신의 성을 가진 새끼만 잘 키우려는 가부장사회의 허위이데올로기를 스스로 깨고 아들과 세 여자를 받아들였다.
“이전에는 남편이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가방에서 수북이 나오던 책 대신 요즘엔 지혜(11세)와 정은(10세)이에게 줄 인형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내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손덕수 부부는 아이들의 맑은 세계에 감격하고 두 아이들에 의해 다시금 세상의 허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순수하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한평생 강단과 사회에서 주류에 반대하는 삶을 살아왔는데 결국 아들이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가장 큰 실천을 요구했어요. 아들을 통해 우리 부부는 구제된 것이지요.”
그는 “이 결혼을 허락하기까지 그저 30년을 준비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마 그는 소수의 여성운동가 중에서도 또 소수, ‘진보’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속에서도 겉과 속이 같은, 정직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진보’와 ‘자유’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발전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볼 때 그는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하다.
남성에 대하여
55세가 넘어가더니 그는 아무데서나 거리낌없이 남성들의 손을 잡고 얼굴도 쓰다듬어 상대를 당혹스럽게 한다. ‘어머니의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몸을 21세기 약손이라고 믿었는지 ‘남성들 손질하기’에 나선 것이다. 다른 이들이 가사노동 분담을 이야기할 때 그는 “제발 살림을 해라, 아빠가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 많아질수록 여성의 본성을 배워가고 덜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살림을 배워라, 어머니의 속성을 깨달아 간다. 애는 우리가 낳아 주었으니 키우는 것은 남자가 해라.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아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반대하게 된다.”
그가 쏟아내는 주문 앞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받기만 해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남성은 베풀고 자신의 것을 주면서 기뻐하는 속성을 잃어가고 있다.”
60이라는 나이에 그가 말하는 남성은 뭔가를 상실한 채 계급사회에 순응해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성인남자를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말한다. ‘니가 행복하기 위해서’ 바뀌라고. 남성들이 시장바구니 들고 아이를 등에 업고 거리를 활보하라고, 그래야 여성과 함께 인간의 본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주문 또 주문한다.
“여자든 남자든 누군가와 함께 살림을 하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어야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권위로 똘똘 포장된 제도에는 얽매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제는 반대만 하는 운동에 매이지 맙시다. 서로를 계몽해야 합니다. 이 사회에서 가장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세대인 어른들입니다. 맑은 정신과 성품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이유를 어른들 스스로 찾아야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그에 대해 앞서가도 한참 앞서가 있다고 말할 때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총평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면서 하나의 색깔로 상대를 규정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누군가 그의 60평생 인생살이를 “정신 없다”고 말할 때, 반은 여전히 바꾸어야 할 똥물로 차 있고, 나머지는 제 정신이 있는 어머니라고 말한다. 미장원에서 흰머리 감추려고 염색하고 파마하는 것도 환경파괴다 싶어 대신 이쁜 보자기를 두르고 다닌다. 그래서 역시 ‘튄다’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깨달음’과 ‘실천’과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몸을 ‘우주’로 비유한다면 그는 온전한 ‘우주’를 몸에 담아 자양분을 스스로 키워가고자 하는 여성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가 익숙치 않아 이방인의 시선으로, 때론 순수한 감동을 받으며, 그를 만나곤 한다.
1년 후에 그는 교수직을 사퇴하고 평화어머니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삶은 천박한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행복한 비명의 연속이어야 해요. 그 변혁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깃털처럼 던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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