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바람났어요?
2001/2001년 09월 :
2001/09/01 00:00
꿈을 파는 홍제동 육류 소매점 주인 김용기 씨의 시민운동 사랑
“용기가 없다고 용기 있게 살라고 ‘용기’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만나자마자 그가 건넨 인사말이다. 김용기 씨, 용기….
‘공정한 보도보다는 탈세와 사주 눈치보기에 급급했다’고 용기 있게 나서는 기자 하나 없고, ‘대권 욕심에 눈이 어두워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고 용기있게 고백하는 국회의원 하나 없는 나라이니 분명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긴 하다. 김용기 씨, 그는 과연 이름처럼 용기 있는 사람일까? 그는 서울 홍제동의 한 대형유통매장에서 육류 소매업을 하고 있다. 그의 점심시간은 남다르다.
머리 모양새며 옷차림이며 아무리 봐도 여염집 가정주부임이 틀림없는 여자들과 식사를 한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파트너도 자주 바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람이라도 낫나 싶지만 알고 보면 다 그의 고객들이다. 쇠고기 한 근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영업 방법치고는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그가 물건만 파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런 자리를 통해 손님의 가정 이야기도 듣고, 고민도 같이 나누고, 자신의 생각들도 함께 나눈다. 자신의 가게에서 가족의 건강을 좌지우지할 먹거리를 사가는 만큼 마음도 풀고 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점심 값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래도 이렇게 알게 된 손님을 통해서 광우병 파동으로 고생할 무렵에는 광우병 안심보험도 들었다고 한다. 보험 설계사를 하는 그의 손님이 일류 호텔에서나 가입하는 보험 상품을 알려줬고, 위험시에는 1억 원을 보상해준다는 보험가입증명서를 가게에 비치해두자 발길이 뜸했던 손님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우병이라는 게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것이니 돈 1억 때문에 손님들이 모여들었을 리는 없다. 보험까지 가입하는 주인에 대한 신뢰가 손님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실제 그는 산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떼온다. 먹거리만큼은 안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함께 살아가는 의미까지 파는 가게
그가 물건만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가게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가 운영하는 가게 한쪽 벽에는 ‘참여연대 회원의 가게’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 옆에는 간이 가판대를 설치해 놓고 회원소식지인 『아름다운 사람들』과 『참여사회』 참여연대 가입서를 비치해 두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답게,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이동전화요금인하 서명도 받고 있다. 기자가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서명자만 모두 70여 명. 서명을 받을 때도 이동전화 사용하면서 느꼈던 불편사항도 들어보고, 왜 요금인하를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가 이런 참여연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일년 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그 해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전까지 그는 십 억대의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였다. 3대독자인 그가 스물 한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유산으로 십 억대의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인심 좋은 아버지가 서 준 보증이 화근이 됐다. 안방에 놓인 낡은 탁상시계에까지 노란 가압류 딱지가 붙는 일이 무려 열여덟 번이나 반복됐다.
20대, 남에게 고개를 숙이기엔 너무나 뜨거웠던 나이에 그는 사채업자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야 했다. 낮에는 일터로 출근 하고 밤에는 사채업자 집으로 출근 했다. 때론 애원도 하고 때론 ‘난 지금 갚을 돈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한 달에 200만 원 넘는 이자를 내고 살면서, 주위를 둘러보거나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른 길인가를 점검해보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저 ‘이번 달엔 이자를 낼 수 있을까, 원금도 갚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만이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기를 십여 년. 그 기나긴 채무자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1999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인생을 짓누르던 무게가 없어지자 그는 허탈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금 가는 이 길이 맞는 건지, 자꾸 뒤가 돌아봐지는 시간이었다.
인생의 좌표를 시민운동에서 다시 찾아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참여연대’였다. 당시는 총선시민연대 활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참여연대의 모습이 매스컴을 많이 타던 시기.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의 집 가훈 ‘똑바로 살자’를 떠올렸다. 처음엔 참여 아카데미부터 시작했다. 저녁 7시면 ‘참여연대’에 도착해서 아카데미 강의를 듣고, 9시 30분까지 다시 불이 나게 달려가 가게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또 회원들이 뒤풀이를 하고 있는 안국동으로 달려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그의 승합차 가득 회원들을 싣고 일일이 집에까지 데려다 줬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활은 또 다른 오해를 낳고 말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퇴근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고, 일요일에도 외출이 잦았던 터라 아내는 다른 여자가 생긴 것으로 오해한 것. 어려운 형편에서 결혼했고, 결혼하고도 수백만 원을 이자로 내야 하는 생활을 불평 한마디 없이 따라주던 아내였기에 그런 행동이 있기까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결국 아내에게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저 쑥스러워서 그랬다는 말과 함께.
최근 그는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다. 세 들어 있는 상가 주인이 그에게 이사 가기를 요구한 것이다. 계약 기간이야 만료됐지만 인테리어 비용에 그동안 다져온 단골 손님이 얼만데, 무작정 나가라는 것이다. 장사도 잘 되고 유통 상가 내에서도 인심을 얻고 있는 그를 무턱대고 쫓아내려는 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평소 ‘꼭 매장 안에 참여연대 책자를 비치해야 하느냐’는 등 시민운동을 곱지 않게 보던 주인의 생각이 이런 결과까지 낳은 것은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는 참여연대에서 추진하고 있는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시민운동이 곧 나를 위한 운동임을 느끼기도 했단다. 그렇다고 그가 참여연대 활동에 100% 만족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들 직업이 있고 바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번번이 약속시간을 넘기는 ‘참여연대 코리안 타임’은 늘 그의 맘을 불편하게 한다. 또 아무리 술 안 먹고도 술 취한 사람보다 더 잘 논다는 그이지만 본론보다 더 길게 이어지는 뒤풀이 문화도 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안 그래도 시민운동의 권위주의니 내실 없는 외형적 살찌우기니 말이 많은 요즘인데, 이런 때일수록 시민운동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하고,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 김용기 씨는 든든한 빽을 느낀다고 한다. 그것도 세상을 학연과 지연으로만 얼기설기 거미줄 치는 ‘악한 빽’이 아니라, 올바르게 똑바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주는 ‘선한 빽’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의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고 한 발 한 발 첫 걸음을 떼는 어린애’ 라고 표현한다. ‘내가 찾으면 찾을수록 가까워지고, 참여하는 만큼 변한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발걸음을 내딛는 김용기 씨. 그는 우리 시대,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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