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이름의 거대한 침략, 다자간투자협정
1999/1999년 07월 :
1999/07/01 00:00
자유라는 이름의 거대한 침략, 다자간투자협정
지난 5월말 런던의 금융가. 멕시코, 콜롬비아,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 등지에서 온 100여 명의 가난한 농민들이 작업복차림으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자유무역 대신, 공정무역을! 당신네 자선기금이나 차관 필요없다. 그 돈으로 부자만 더 부자되고 우리는 더 가난해졌다. 경제자유화로 피해보는 건 가난한 사람들 뿐이다.” 이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 시위대는 런던 금융계와 기업을 상대로 직접 행동을 전개하기 위해 집단으로 영국에 몰려온 것이다. 지구촌 오지의 농민들과 선진국 기업권력과의 싸움, 이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 다윗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선진국 기업에게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대한 반대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투기자본,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그리고 다자간투자협정이 민간 국제운동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다자간투자협정이 몇몇 비판적 경제전문가들만의 관심사였지만 이제는 개도국 산골의 농민들도 그 폐해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
199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비밀리에 시작된 이 논의는 외국투자기업에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투자를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투자자유화 방안이다. 이 협정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외국기업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모든 부문에서 국내기업과 경쟁할 권리, 모든 부문에서 토지, 천연자원과 전략산업 등 모든 기업과 재산을 자유롭게 취득할 권리, 투자 관련 자금의 국내외 이동에 대한 일체의 간섭과 규제의 철폐, 투자설비 이전의 자유화와 벌칙 철폐, 외국인 주식 지분 제한·국내 구매/고용 조항과 같은 일체의 의무조항 폐지, 외국기업이 모국 종업원을 자유롭게 현지에 배치/입국시킬 수 있는 권리, 이상의 권리가 침해될 경우 외국기업이 투자유치국 정부에 배상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특히 배상소송의 경우 실제 발생한 손실 외에도 예상되는 손실까지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부각되는 유전자조작식품을 여기에 대입해 살펴보자. 이 협정에 의하면 어느 국가든 미국의 유전자조작식품 수입이나 유통을 막았다간, 또는 뭔가 문제 있다고 정부에서 발표하기만 해도 곧 소송당해서 벌금을 왕창 내야 한다. 정부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유전자조작식품의 수입을 규제하기는커녕 기업의 자유를 막은 대가만 지불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무리한 내용을 버젓이 담은 데에는 외국투자를 유치해야 산업도 가동하고 기술도 이전받고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떡고물’ 논리를 가진 개도국들이 결국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한국 정부가 작년 한미투자협정을 ‘선구적’으로 제안할 때 밝힌 명분도 이런 ‘떡고물’ 논리였다.
민간운동진영은 여기에 대항해 전세계 600여 단체의 반대성명과 수차례의 국제집회, 끈질긴 여론확산을 통해 결국 작년 12월에 프랑스정부의 협정논의 유보결정을 이끌어내고 일단 이 논의를 파탄시키는데까지 성공시켰다. 민간운동이 다자간투자협정에 반대하는 논리는 7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협정은 국제자본이동 규제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외국기업과 투자자들이 주권국가 정부의 행정권에 직접 도전하고 위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셋째, 투자이윤이 무한정 외국으로 유출되는 반면 이를 국내 중소기업 육성에 환원하지 못하게 되고 국내 산업기반을 붕괴시킨다. 넷째, 그 나라 특성에 맞는 고용촉진, 환경보호, 인권보호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므로 인권, 환경을 후퇴시킨다. 다섯째, 비밀협상을 통해 진행되었으므로 시민사회의 심의 판단이 배제되어 있다. 여섯째, 협정 준수기간이 20년이나 돼 단기간에 갱신과 조정이 불가능하다. 일곱째, 결국 선진국 기업의 권력이 각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만든다.
논의 중단시킨 민간운동
이 협정에 대한 저항운동은 “떠드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월든 벨로 필리핀대 교수, 경제학자), 토니 클라크(캐나다 폴라리스 연구소), 수전 조지(초국적연구소 부소장), 마틴 코(페낭, 제3세계네트워크 소장) 같은 이들이 앞장섰고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작은 단체들이 감춰진 협정의 정보를 수집하고 예상되는 피해상황을 알려나갔다. 국제인권기구인 유엔인권위를 뒷받침하는 유엔인권소위는 이 협정이 인권침해소지를 담고 있으므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결의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와 하버드 법대 연구원들도 이 협정에 대해 “국제인권기준을 일보 후퇴시키는 것”이라는 제목의 공동 조사보고서를 냈다.
지방자치제가 잘된 나라에서는 도시마다 “MAI배제도시(MAI-Free City)”를 시의회 결의로 선포하고 있다. 즉 중앙정부가 설사 투자자유협정 조치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시 행정권내에서라도 거부하겠다는 뜻인데, 미국의 경우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시애틀, 산타크루즈, 올림피아, 보울더 등의 도시가,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본부가 있는 제네바, 그 외에 캐나다 밴쿠버, 호주 유럽의 도시들이 속속 “MAI배제도시”를 선포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중요한 운동이 될 것이며, 지금도 수백 개 도시에서 시의원들을 설득하고 있으므로 더욱 확산될 것이다.
한국은 아직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6개 단체로 구성된 국제연대행동네트워크가 선구적으로 여론화에 앞장서고 있다.
98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협정논의 중단은 시민사회의 저항이 이끌어낸 의미심장한 승리였다. 29개 선진국 정부와 위력적인 초국적기업들이 추진하던 일을 중단시켰으니 말이다. 이 사건은 비슷한 기간에 일어난 대인지뢰금지국제협약의 선포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성립과 함께 국제 사회운동의 3대 성공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지배하는 국제경제질서에서 이런 승리는 오래 가지 못한다. 올해 1월 유럽연합과 일본 정부가 다자간투자협정과 같은 내용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만큼 협정의 내용이 선진국 기업들에게는 매력적이고, 또 기업생존의 필수요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운동단체들은 다시 한번 온갖 매체를 동원해서 협정 재논의 반대운동을 펴고 있다. 어쨌든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의 때까지 미국정부는 공개적으로 이 협정을 재론하지 않았는데 언론에서는 클린턴이 차기 선거를 의식해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은 시민사회의 비판이 먹혀 들어간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속수무책 한미투자협정
그러나 전문 운동단체들의 판단으로는, 선진국 정부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 협정의 변종을 추진할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확대 북미자유무역지대협약(FTAA), 국제통화기금, 대서양경제협력기구(TEP), 아태경제협력기구(아펙) 등에서, 또한 쌍무간 투자협정에서 제기하고 논의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중에서도 쌍무간 투자자유협정은 두 나라간에 국한된 관계이기 때문에 국제적 압력을 넣기가 오히려 힘들 수가 있는데 작년부터 진행된 한미투자협정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
지난 3월말 한미투자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촉구하기 위해 방한한 미 데일리 상무장관은 이런 말을 하고 갔다. “지난해 한국에 대한 미국 수출도 3분의 1 가량 줄어 무역적자를 더 이상 정치적으로 감내할 수 없는 시점이다.” 이 말을 해석하면 “시간 됐다, 들어간다, 열어라, 내놔라”가 된다. 안방 안마당 다 내주고 떡고물로 연명하자는 논리에 의존한 채 이런 거인의 압력을 버틸 수 있을지 우려된다. 국제사회를 떠도는 투자자들에게 자유라는 말이면 투자에 붙든, 무역에 붙든 무조건 환영하는 한국은 참 친근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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